소설리스트

5권-#외전 1 (26/31)

CONTENTS

#외전 1

#외전 2

#외전 3

#외전 4

#외전 5

#외전 1

멍하니 테이블에 앉아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채원은 멀리 보이는 한 점을 유심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노트북을 바라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랑, 하는 방울 소리와 함께 민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민우는 여느 때처럼 인사를 건네는 지현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채원의 앞에 앉았다. 하지만 채원은 관심 없다는 얼굴로 다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왔어요.”

그런 채원의 행동이 익숙한 듯 민우는 제 노트북을 펼치며 인사를 건넸다.

“응.”

그리고 짧은 채원의 답이 이어졌다.

지난번 술에 취해 사고를 친 다음부터 두 사람 사이엔 기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채원은 은연중에 그를 기다리는 듯했고, 민우는 열심히 출근 도장을 찍는 중이었다. 조용히 마주 앉아 키보드를 두드려 대던 두 사람 사이에 곧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고, 고함과 웃음소리를 동반한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어둑해진 하늘이 땅거미를 내릴 즘, 시간을 확인한 민우가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채원이 의문을 담아 민우를 바라봤지만 이내 시선을 거뒀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그런 채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우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며 채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평소보다 일찍 카페를 나섰다.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민우의 뒷모습을 채원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다음 날 민우는 카페에 오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기만 하던 채원은 느릿느릿 게임에 접속했다.

[길드 마스터 무지개 요정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 [세츠나 : 헬로~]

[길드] [노아 : ㅎ2]

[길드] [율 : 안녕하세요]

[길드] [제로사이드 : 하요~]

[길드] [욕정벌레 : 발기찬 아침!]

[길드] [아타락시아 : 안녕하세요 ㅋㅋㅋ]

[길드] [집사 : 오셨어요.]

접속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길드원들 틈에서 민우의 아이디가 보였다. 맥이 풀리는 기분과 함께 뭔가가 울컥했다.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딱히 내색할 이유도 없고, 내색하기도 싫어서 인사를 주고받으며 쉼터에 앉아 있자 민우에게서 귓속말이 왔다.

[귓속말] [제로사이드 : 형 저 오늘은 카페 못 갈 것 같아요]

[귓속말] [무지개 요정 : 응]

[귓속말] [제로사이드 : 내일은 갈게요]

[귓속말] [무지개 요정 : 그러던가]

[귓속말] [제로사이드 : 네]

가지 못한다며 먼저 귓속말을 보내주는 민우였지만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채원은 고개를 드는 궁금증을 애써 무시하며 무관심한 척 그대로 대화를 끝내 버렸다. 이후로 민우는 종종 카페에 오지 않게 됐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이 먼저 오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을 민우였을 텐데, 그는 오지 못한다는 걸 통보하면서도 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채원은 평소와 같이 태연자약한 얼굴로 제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데 열중인 민우를 흘끗 바라봤다. 잠깐 시선을 뒀을 뿐인데 민우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시선을 들어 채원을 마주 봐 왔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저한테 할 말 있어요?”

“없어.”

민우의 물음에 뜨끔한 채원이 부러 차갑게 답하며 시선을 내리자 민우도 다시 시선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빤히 쳐다보기에….”

민우의 스치듯 지나가는 중얼거림에 채원은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지만, 사실 채원은 저도 모르게 민우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시선을 눈치챈 민우가 고개를 들 때까지 계속.

***

-형, 오늘도 못 갈 것 같아요.-

출근 중에 민우에게서 도착한 톡을 보며 채원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무언가 답장을 하려다가 포기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 버렸다. 매장에 도착해 자신의 지정석에 자리 잡은 채원은 노트북도 꺼내놓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드물게 보인 채원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지현이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이 곁눈질로 채원을 바라보거나 그를 보기 위해 매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채원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루하루 민우의 부재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기다리지 않는 척, 신경 쓰지 않는 척, 허울 좋게 포장해 봐도 그가 오지 않을 때면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만 있으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차라리 오지 못하는 정확한 이유라도 물어봤다면 이렇게 초조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에 묻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하기만 했다. 묻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 민우가 오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줬으면 하는데, 그것에 관해선 민우도 언제나 묵묵부답이었다.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앉아 있는 채원 덕에 그날 하루 매출은 평소를 훨씬 웃돌았지만, 채원은 텅 빈 앞자리만 신경 쓰고 있을 뿐이었다.

-형, 오늘은 갈게요.-

어제와 같이 출근길에 도착한 민우의 톡을 바라보며 채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올 수 있을 때는 따로 연락을 해오지 않았던 민우였다. 연락 없이 쳐들어오는 게 그의 전매특허 아니었던가. 그래도 오겠다는 연락 하나에 어제완 다르게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할 수 있었다.

“사장님.”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채원의 눈앞에 커피를 든 지현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채원을 보며 지현은 긴 한숨과 함께 채원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런 한심한 얼굴 하지 마세요. 손님 다 달아나겠어요.”

“뭐?”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아.”

채원이 영문을 몰라 되묻자, 지현은 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기다리시는 거예요?”

“뭐? 누굴?”

“그분이요.”

지현이 말하는 ‘그분’이란 게 누구를 지칭하는지 채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허를 찔린 기분에 멍하니 지현을 올려다보던 채원은 시선을 돌려 매장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각. 오전에 오겠다고 연락을 했던 민우는 오지 않고 있었다.

채원은 그제야 민우를 기다리는 자신이 실의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았다.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건지, 얼마나 심각했으면 지현이 저런 말을 한 건지, 자각한 마음이 그대로 열기를 몰고 올라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남들이 보면 덩달아 얼굴을 붉혔을 상황이지만, 지현은 난색을 보이며 펄쩍 뛰었다.

“으엑! 뭐예요!”

“뭐, 뭐가!”

“징그러워요!”

“뭣?”

“너무 예뻐서 징그럽단 말이에요!”

“?”

“이 세상이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요!”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지, 팔을 마구 긁어대며 버럭버럭 소릴 질러대는 지현의 말에 당황한 채원을 두고, 지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기다리지만 말고, 연락해 보시면 되잖아요.”

지현의 말에 채원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싫어!”

홍옥 같은 얼굴로 소리치는 채원을 보며 지현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뒤돌아섰다. 지현이 자리를 뜨자, 진정이 되는지, 채원은 붉게 달아오른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시작했다.

동시에 딸랑, 하는 종소리가 울리고 매장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섰다. 카운터로 향하던 지현은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다 상대방을 확인하고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웃어 주었다.

지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민우는 채원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하려다 우뚝 멈춰 섰다. 제가 온 것도 모른 채, 채원은 붉게 물든 두 뺨에 대고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매장 밖에서 봤을 때는 단순히 지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무언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지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기에 두 뺨을 붉힌 건지, 자신이 온 것도 모른 채, 얼굴의 열기를 식히기에 열중인지, 왜 타인에게 그런 얼굴을 보여주는 건지.

굳어버린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채원의 맞은편에 앉은 민우는 자신의 등장에 놀란 채원이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시선을 돌리는 모습에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린 것보다 상기된 그의 얼굴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얽혔던 시선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채원은 부러 모른 척 노트북만 바라봤고, 민우는 그런 채원을 고집스레 바라봤지만, 채원은 절대 민우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

[홍(虹)안의 성녀⋩⊰민지⊱⋨ : 길마님~]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저 드뎌 하프됐어영!]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저 렙업 조금만 돠 주시면 안대영?!]

[홍(虹)안의 성녀⋩⊰민지⊱⋨ : 빨리 균렙되서 길마님이랑 사냥 가고 싶어영~]

[무지개 요정 : 네가 나랑 균렙이 되도 너랑 사냥 갈 생각은 없다...]

[홍(虹)안의 성녀⋩⊰민지⊱⋨ : ㅇㅅㅇ...]

[홍(虹)안의 성녀⋩⊰민지⊱⋨ : 왜영?]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또다시 쉼터까지 찾아와 귀찮게 하는 민지의 행동에 모니터를 바라보던 채원이 앓는 소리를 냈다.

“왜요?”

그런 채원의 행동에 마주 앉아 있던 민우가 의아한 듯 물었다.

“민지, 얘 또 찾아왔어.”

“또?”

심각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채원을 바라보던 민우는 곧장 귀환 스킬을 사용해 쉼터로 되돌아 왔다. 필요한 재료가 있다며 노가다를 떠났던 민우가 쉼터로 돌아오자, 채원은 의아한 듯 민우를 바라봤지만, 민우는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제로사이드 : 이건 왜또 왔어?]

[홍(虹)안의 성녀⋩⊰민지⊱⋨ : ㅡㅡ]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제로님은 왜 제가 올 때마다 시비에여!]

[제로사이드 : 꼴 보기 싫으니까]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제로님 보러온 거 아니니까 신경끄세영!]

[제로사이드 : 네 흉물스런 아이디가 빤히 보이는데 어떻게 신경을 끔?]

[홍(虹)안의 성녀⋩⊰민지⊱⋨ : 안 보시면 되잖아여!]

[제로사이드 : 안 보시게 네가 꺼져주면 되잖아여!]

[홍(虹)안의 성녀⋩⊰민지⊱⋨ : 시른데여ㅡㅡ 제로님이 가세여!]

[제로사이드 : 저도 시른데여ㅡㅡ]

[홍(虹)안의 성녀⋩⊰민지⊱⋨ : 따라하지 마세여! 이러시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르니깐!]

[제로사이드 : 뭔소리지?]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제가 나중에 길마님하고 겨론하면 제로님 쫓아낼거에여!]

[제로사이드 : ?]

[제로사이드 : ㅋㅋㅋㅋ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돌겠네 진짜...]

[무지개 요정 : 민지야]

[홍(虹)안의 성녀⋩⊰민지⊱⋨ : 넹!]

[무지개 요정 : 내가 매번 말하지만 너는 이제 이 길드하고는 연관이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쉼터에 그만 찾아와]

[홍(虹)안의 성녀⋩⊰민지⊱⋨ : 괜찮아여! 저는 길마님 보러오는 거니까여!]

[제로사이드 : 하 ㅋㅋㅋㅋ진짴ㅋㅋㅋㅋㅋㅋㅋ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무지개 요정 : 쉼터에도 찾자 오지 말고 날 찾아오지도 말라고 하는 소리야]

[홍(虹)안의 성녀⋩⊰민지⊱⋨ : 왜영....]

[무지개 요정 : 왜라니...]

[제로사이드 : 너 싫다는 거임 ㅇㅇ]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전 길마님 좋아하니까 괜찮아영!]

[제로사이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솔직히 너 이렇게 자꾸 찾아오는 거 민폐야]

[홍(虹)안의 성녀⋩⊰민지⊱⋨ : ??]

[무지개 요정 : 네가 이렇게 쉼터에 있는 거 보면 불편해할 사람도 있고 네가 찾아오는 거 자체를 반기는 길드원도 없어 고깝게 보기만 할 뿐이지]

[홍(虹)안의 성녀⋩⊰민지⊱⋨ : 전 길마님을 보러오는 거니까 누가 절 고깝게 보던 상관없는데...]

[무지개 요정 : 아...제발...]

[제로사이드 : 진짜 멘탈 갑이다]

[무지개 요정 : 네가 이렇게 찾아오는 거 나도 불편하고 고깝다고 이렇게까지 말해줘야 알아듣니?]

[홍(虹)안의 성녀⋩⊰민지⊱⋨ : 그럼 쉼터로 안 올 테니까 저랑 사겨주세영!]

[무지개 요정 : 대체...]

[제로사이드 : 답 없네요 진짜]

[홍(虹)안의 성녀⋩⊰민지⊱⋨ : 사귀는 사람 없으시져?? 그럼 저랑 사겨영~ 저 진짜 길마님 너무 좋아영! 같이 다니면 되게 뿌듯할 것 같아영! 친구들한테 자랑도 하고 싶어영!]

[무지개 요정 : 내가 무슨 네 전용 쇼윈도야?]

[제로사이드 : 님 얼굴만 좋아요~ 라고 광고하고 있네]

[홍(虹)안의 성녀⋩⊰민지⊱⋨ : 넹! 광고하고 싶어영! 그러니까 저랑 사귀고 데이트해영!]

[제로사이드 : 제정신아니네]

[홍(虹)안의 성녀⋩⊰민지⊱⋨ : 뭐 어때서영! 닳는 것도 아니잖아여!]

[제로사이드 : 닳아]

[홍(虹)안의 성녀⋩⊰민지⊱⋨ : ??]

[홍(虹)안의 성녀⋩⊰민지⊱⋨ : 진짜여?]

[무지개 요정 : 제발 그만하자]

[무지개 요정 : 그리고 민지 넌 다시는 볼일 없었으면 좋겠다]

[홍(虹)안의 성녀⋩⊰민지⊱⋨ : 싫어영!! 저랑 사겨여!!! 길마님~~]

[홍(虹)안의 성녀⋩⊰민지⊱⋨ : 아...혹시 길마님 사귀는 사람있어여?]

[무지개 요정 : ...]

[무지개 요정 : 그걸 이제서 묻니?]

[홍(虹)안의 성녀⋩⊰민지⊱⋨ : 그럼 헤어질 때까지 기다릴게영! 기다릴 수 있어연!]

[제로사이드 : 와...]

[무지개 요정 : 헐...]

[홍(虹)안의 성녀⋩⊰민지⊱⋨ : 왜영?]

[제로사이드 : 그 말은 진짜 무례하다]

[홍(虹)안의 성녀⋩⊰민지⊱⋨ : 왜여?]

[무지개 요정 : 제발 가라...]

[홍(虹)안의 성녀⋩⊰민지⊱⋨ : 사귀는 사람 진짜 있어여 길마님?!]

[홍(虹)안의 성녀⋩⊰민지⊱⋨ : 언제쯤 헤어지실 예정이에영?]

[제로사이드 : 대쳌ㅋㅋㅋㅋ]

[무지개 요정 : 맘에 둔 사람 있어 이 사람 생각밖에 없어서 넌 안중에도 없어]

[홍(虹)안의 성녀⋩⊰민지⊱⋨ : 헐...]

[홍(虹)안의 성녀⋩⊰민지⊱⋨ : 여태 절 갖고 노신거에여?ㅠㅠ]

[무지개 요정 : 뭔...소리야?]

[홍(虹)안의 성녀⋩⊰민지⊱⋨ : 몸과 마음을 다 받쳤는데...정말 너무하세여...]

[무지개 요정 : ...바쳤는데야.]

[홍(虹)안의 성녀⋩⊰민지⊱⋨ : ...]

[홍(虹)안의 성녀⋩⊰민지⊱⋨ : 다시는 길마님을 찾지 않을 거예여! 후회해도 이젠 늦었어여!!]

마지막까지 폭탄 발언을 내던지고 쉼터에서 벗어나는 민지의 머리 위로 /흥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그 당당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채원이 헛숨을 터트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 늘어졌다.

채팅만으로 기를 빨린 듯 처지는 몸을 추슬러 다시 게임에 집중하려던 채원은 맞은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민우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어딘지 화가 난 듯 보이는 그의 시선에 아차, 싶었다. 맘에 둔 사람이 있다는 건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임시방편으로 아무렇게 뱉은 말인데, 그가 괜한 오해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변명해 볼까도 싶었지만, 그가 오해하든 말든 왜 자신이 신경을 써야 하나, 하는 마음에 그대로 침묵해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 저를 대하는 민우의 행동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 느낀 변화는 말수가 적어졌다는 점이었다. 먼저 살갑게 다가오던 행동도 없어지고, 자신과 필요 이상 가까워지는 걸 꺼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민우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채원에게 설명하지 않았고, 채원도 민우에게 묻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 사이는 점차 겉돌기 시작했다.

먼 하늘이 우르릉하고 울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좋지 않다 싶더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 되어 있었다. 채원은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비어 있는 제 앞자리를 바라봤다. 자리의 주인은 잠시 화장실을 갔을 뿐인데도 비어 있는 모습이 싸늘해 보였다.

채원은 요즘, 도통 게임에 집중하지 못했다. 마주 앉은 민우에게만 온통 신경이 쏠린 탓이었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가 불편했다. 자신에게는 서먹하게 거리를 두는 것 같은데 길드원들하고는 평소와 똑같이 지내는 모습이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의미 없이 마우스를 놀리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난감하게 들리는 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자 민우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여자는 아담한 체구에 곱상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채원은 왠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못마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채원은 문득 왜 자신이 기분이 나빠야 하나 싶었다. 서둘러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젓는데, 저를 부르는 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그녀의 부름에 채원은 카운터로 향했다.

자신의 팬이라던 여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민우의 귓가에 채원을 부르는 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화 중이라는 것도 잊고 시선을 옮기니, 카운터에 선 채원과 지현이 바짝 붙어 뭔가를 얘기하는 게 보였다.

“제로님?”

두 사람의 모습에 넋을 빼고 있자 여자가 민우를 불렀다. 민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여자와 대화를 이었다. 여자는 레페르토르의 유저로 제가 제로사이드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제가 올리는 공략 영상의 팬이라고 했다. 기분 좋게 대화를 끝낸 민우는 카운터의 두 사람을 신경 쓰며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한참 지현과 발주 건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채원은 자리에 앉아 있는 민우의 뒷모습에 안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불만이 삐죽 솟아올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원의 눈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민우가 보였다.

시선을 들어 매장을 훑어보자 조금 전, 민우와 얘기를 나누던 여자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어이없는 상황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황당함에 헛웃음을 터트리자, 민우가 시선을 들어 자신을 바라봤다. 초연한 눈빛에 울컥하고 짜증이 샘솟았다.

“저쪽에 가서 앉지 그러냐?”

“네?”

난데없는 채원의 말에 민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내가 자리를 비켜주면 되나?”

“무슨 소리예요?”

“문자로 주절주절 댈 것 없이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채원의 말에 민우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하지만 민우의 얼굴을 보면서도 채원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헌팅을 할 거면 다른 데 가….”

쾅-!

내부를 울리는 굉음에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소음의 근원지인 두 사람에게 이목이 쏠렸다. 쏘아붙이는 채원의 말들에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친 민우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채원을 향해 무서운 얼굴로 물었다.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예요?”

“뭐?”

“아, 아니면 방해가 되고 있나요. 내가?”

“무슨?”

“이참에 내가 저 여자랑 손잡고 꺼져주길 바라는 거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형이야말로…!”

“?”

뭔가를 외치려던 민우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카페를 나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한 채원을 포함한 카페 안의 모두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민우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하늘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빗줄기가 퍼붓듯 쏟아지자, 민우에 대한 것은 잊고, 자신들의 우산 유무를 확인하기에 바빠졌다.

텅 비어버린 민우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채원은 귓가를 때리는 빗소리에 삐걱삐걱 시선을 옮겨 하늘을 바라봤다.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붓는 빗줄기에 방금 카페를 빠져나간 민우가 비에 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현 씨…, 나, 갈게….”

인사를 건네는 채원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힘이 없었다. 매장을 나서는 두 어깨도 어쩐지 축 처진 듯해서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는 지현의 두 눈에 근심이 가득 찼다.

쏟아지는 빗속을 우산을 쓰고 걷던 채원은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민우가 카페에 출근 도장을 찍은 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지만,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게임을 하면서 사소한 일로 치고받은 일은 많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낸 건 처음이라서 채원도 복잡한 심경에 이렇다 할 대처도 반박도 하지 못했다. 민우의 행동이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하는데 그의 행동에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어이없기도 했다.

생각에 잠겨서 걷기를 한참, 어느덧 아파트에 도착한 채원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층수를 누르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털고 있자 층에 도착했는지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

하지만 채원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 없었다. 흠뻑 젖은 민우가 자신의 집 현관 앞에 기대앉아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고 있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내는 소음을 들었을 터인데도 민우는 묻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덩달아 움직이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채원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얼른 열림 버튼을 누르고, 다급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민우의 앞으로 걸어가 멈췄다.

“너, 여기서 뭐해.”

자신도 모르게 냉랭한 목소리가 튀어 나가서 채원은 짐짓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부러 내색하지 않고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데, 느릿느릿 고개를 든 민우가 몸을 일으켰다. 민우의 움직임에 따라 푹 젖어 있는 온몸에서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는 얼굴과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이 신경 쓰였다. 손을 들어 쓸어 올려주고 싶은데 차마 손이 나가질 않아 우물쭈물하고 있는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다.

“저 헌팅 한 거 아니에요.”

어색한 침묵 속에 잔뜩 가라앉은 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시잖아요, 제가 형 좋아하는 거.”

“…….”

“죄송해요.”

“뭐?”

“욕심으로 조금 더 옆에 있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젠….”

“뭐?”

“처음부터 말해줬으면 귀찮게 굴지는 않았을 텐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민우가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 없어 되묻는 채원의 말에 민우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채원을 바라봤다. 가을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연신 얼굴로 흘러내려 우는 것처럼 보였다.

“좋아하시잖아요, 그분.”

“…?”

민우가 하는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좋아한다니 누굴? 그분이라니 누구? 채원은 엉망으로 엉켜 드는 의문 때문에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졌다.

눈앞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시선을 피하는 채원의 행동에 민우는 의혹이 확신으로 변하는 씁쓸함을 맛봤다.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와 빗소리가 제 심장에 온통 박혀 드는 기분이 들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헐떡이며 뛰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민우는 눈앞에 서 있는 채원의 모든 것을 눈에 담으려는 듯 꼼꼼하게 훑어봤다. 그리고 손을 뻗어 채원의 뒷머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놀라며 벌어진 채원의 입술을 제 입술로 포개어 덮었다. 채원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민우는 채원의 뒷머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채원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여러 차례 방향을 바꿔가며 입술을 탐하고, 뒷머리를 쥔 손은 어느덧 채원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진득한 마찰음이 오가고, 한참 만에 입술을 떼어낸 민우는 상기된 얼굴로 뜨거운 숨을 내뱉는 채원의 얼굴에 다시 한번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리고 잔뜩 굳어버린 채원을 내버려 두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요란하던 빗소리도, 조금 쌀쌀하게 느껴지던 공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에 잔불처럼 번져버린 열기가 채원의 온몸과 사고를 옭아매고 한참 동안 그를 놔주지 않았다.

***

그날 이후 민우는 카페에 오지 않았다. 남은 게 있다면 그가 남기고 간 노트북뿐이었다. 거기에 기대를 걸고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려봤지만, 민우의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건 게임에서는 여전히 한 길드 안에 있고, 길드원들을 대하는 것도 평소와 같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저를 대하는 그에게서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껄끄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해서였다.

그는 게임 안에서 노가다를 가거나, 파티를 가거나, 공대를 뛰거나 하는 식으로 자신과의 접촉을 피했고, 종국엔 지크프리트의 소환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참다못한 채원이 대화를 시도하거나 귓속말을 보내 봐도 바빴다, 혹은 정신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귓속말] [무지개 요정 : 얘기 좀 해]

[귓속말] [제로사이드 : 오늘은 바빠요]

심각한 얼굴로 채팅을 치던 채원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대체 몇 번째 거절인지 몰랐다. 결국, 참다못한 채원이 핸드폰을 들어 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짧은 신호음 끝에 들려온 단정한 목소리에 채원이 짓씹듯 말했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뭐가요.」

“당장 와.”

「갈 일 없어요.」

“노트북은 어쩔 건데?”

「…….」

“당장 와.”

「카페로는 안 가요.」

“이…!”

「…….」

“후… 그래, 카페가 싫으면 집으로 오든 어디로 오든 당장 와.”

「… 집 앞으로 갈게요.」

민우의 말에 채원은 대답도 하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민우의 노트북을 챙겨 들고 그대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발견한 채원은 걸음을 서둘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서 있던 남자도 시선을 돌려 채원을 바라봤다. 민우는 단숨에 다가온 채원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노트북을 달라는 것 같았다.

만나자마자 말도 없이 노트북을 달라는 듯 행동하는 민우의 행동에 채원의 미간이 더할 나위 없이 찌푸려졌다. 채원은 보란 듯이 노트북을 들고 있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뭐하시는….”

“너야말로 뭐 하자는 건데?”

“노트북 주세요.”

“알 수 없는 말만 줄줄이 늘어놓고, 어중간하게 끊어내면 뭐가 해결되기라도 해?”

“노트북….”

“얘기하자고 했잖아, 네가 무슨 소릴 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으니까! 얘기 좀 하자고 몇 번이고!”

“…….”

“그 전엔 노트북 못 돌려줘.”

“…그럼 그냥 버리세요.”

채원의 말에 민우는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게 진짜….”

머리끝까지 화가 난 채원은 손을 뻗어 민우의 뒷덜미를 낚아채 잡아당겼다. 덕분에 휘청이며 넘어질 뻔한 민우는 채원의 손을 쳐내며 소리쳤다.

“뭐 하는…!”

“말을 하라고!”

하지만 민우의 목소리는 화를 내며 소리치는 채원의 목소리에 금세 묻혀버렸다. 자주 투덕거리며 언쟁을 벌이긴 했지만, 채원이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민우가 얼이 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채원은 민우의 멱살을 쥐며 끌어당겼다.

“그때 네가 했던 얘기들, 난 하나도 이해가 안 가니까 제대로 얘기하자고!”

“얘기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뭐?”

“좋아한다며!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며!”

“?”

“무슨 얘길 하자는 건데? 밀어내기 전에 알아서 꺼져 주겠다는데, 왜 자꾸 들러붙어!”

절규하듯 소리친 민우는 제 멱살을 쥐고 있는 채원의 손을 억지로 뜯어내며 그를 밀어냈다. 무식할 정도의 힘에 밀쳐진 채원이 휘청이며 뒷걸음질 치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민우의 손이 채원을 붙들어 주었다.

무의식적으로 행한 민우의 행동에 민우와 채원 둘 다 당황한 듯했다. 민우는 낮게 혀를 차며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채원이 민우의 손을 쥐었다.

“놔 주세요.”

“싫어.”

“왜 그러는 거예요. 진짜….”

“너야말로 왜 그러는 건데? 멋대로 오해하고, 단정 짓지 마.”

채원에게 잡힌 제 손을 빼내려 실랑이를 벌이던 민우는 나지막이 들려온 채원의 말에 손에 힘을 주며 억지로 뿌리쳤다.

“오해? 뭐가 오해인 건데요? 그럼 형이 말해 봐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민지에게 했던 말은… 걔를 떼어내려고 했던 거짓말이었어.”

채원의 말에 민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 한순간이라도 떠오른 사람이 없다고는 못 해.”

하지만 이어진 채원의 말에 민우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럼 나한테 이러지 말고, 그분한테 가요.”

“…넌 나랑 온종일 카페에 붙어 있잖아.”

“?”

“나한테 그런 상대가 따로 있어 보였어?”

“…네.”

뜸을 들이긴 했지만, 확신하는 민우의 대답에 채원은 낮은 한숨을 흘리며 민우에게 한발 다가섰다. 민우는 가까워진 채원과의 거리에 움찔거리긴 했지만, 뒤로 물러서거나 하진 않았다.

“민우야.”

덤덤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민우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처음으로 불러 주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채원의 눈동자는 너무나 깨끗하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어서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 보였다. 민우는 저도 모르게 울고 싶어졌다.

“동정하지 말아요…”

“뭐?”

“가벼운 감정으로 손 내밀지 말아 주세요.”

더는 마주하고 있기가 힘든지, 민우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채원은 멀어지는 민우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민우는 제게 손을 뻗는 채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동정할 거면 좋아해 줘요!”

절규하듯 내질러진 고함에 채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손을 뻗어 민우의 얼굴을 감싸 쥐고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순간,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짧게 닿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채원은 잔뜩 굳어 있는 민우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충격에 굳어버려 맞닿아 오는 체온의 이유도 생각할 수 없는 민우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종일 나랑 붙어있는 건 너잖아….”

“?”

“너라고.”

단지 앞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남정네들의 모습에 이목이 쏠릴까 민망해진 채원은 잔뜩 굳어 버린 민우를 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멍한 얼굴로 굳어있는 민우를 소파에 앉힌 채원이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내밀자 삐걱삐걱 시선을 움직인 민우가 고개를 저었다.

“술은… 안 할래요.”

“?”

자신 몫의 캔을 따려던 채원은 더듬더듬 내뱉어진 민우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캔 맥주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실수할까 봐요….”

민우의 말에 덩달아 입맛이 떨어진 채원은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공기에 뻘쭘해진 채원은 캔 맥주를 도로 냉장고에 넣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자신의 팔을 붙잡는 민우에 의해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채원의 팔을 붙들긴 했지만, 민우는 채원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저, 푹 숙어진 머리가 채원의 가슴 한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형….”

“응.”

저를 부르는 소리에 답해 주었지만, 민우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채원은 재촉하지 않았다. 조용히 기다려 주기만 할 뿐. 그리고 시간이 지나, 고개를 든 민우는 채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채원은 답이 없었다. 민우는 조급해지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채원의 팔을 세게 쥐었다. 채원은 불안함을 담은 얼굴로 간절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민우의 얼굴에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너야.”

“형, 그건….”

“말했었지? 먼저 물어줬으면 좋겠다고.”

채원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민우가 조심조심 물었다.

“형… 날… 좋아해요?”

초조하게 제 대답을 기다리는 민우를 빤히 바라보던 채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명백한 부정의 답에 민우의 얼굴이 절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럴지도 몰라.”

부정을 확신하던 민우는 이어진 채원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채원은 저를 보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민우는 그대로 채원을 잡아당겨 소파 위에 눕히고, 키스를 퍼부었다. 갑작스러운 민우의 행동에 적잖이 놀란 듯 바르작대던 채원은 곧 응하듯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침대 위에서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이성은 브레이크를 거는데 본능은 멈추지 않고 민우의 행동에 응해주고 있었다. 맨정신에 이게 무슨 짓인가, 차라리 아까 술이라도 먹을걸, 두 캔 다 내가 먹을걸 하는 후회가 채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가서 원샷을 하고 와야 하나 생각했지만, 집요하게 달라붙는 민우 때문에 침대 밖으로 손가락 하나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질척하게 살을 훑는 소리와 함께 민우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간 곳엔 한 장 한 장, 옷이 벗겨지고 있었다. 맨살 닿는 타인의 온기가 낯설어 몸을 뒤틀자, 민우의 손이 어깨를 누르며 도망가지 못하게 채원을 침대 위로 찍어 눌렀다.

은밀하게 훑는 손길이 허리를 쓸고 내려와 골반을 스치고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놀란 채원이 급하게 민우를 밀어내며 다리를 오므렸지만, 우악스럽게 한쪽 다리를 들어낸 민우는 채원의 다리 사이에 파고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잠, 읏….”

당황함에 터져 나온 단말마와 붉게 달아오른 열기가 두 뺨으로 퍼져나갔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민우의 손길이 골반을 타고 내려가 더욱 안쪽으로 향하자 채원이 불에 댄 듯 놀라며 그의 어깨를 퍽퍽 쳐댔다.

채원의 방해에 민우는 열기가 잔뜩 몰린 얼굴로 채원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얼굴에 채원은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낯선 민우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채원은 본능적으로 민우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민우는 사냥감을 몰아붙이듯 채원의 위에 올라타, 목과 쇄골을 지분거렸다.

귓가에 퍼지는 질척한 소리에 발끝부터 타고 오른 열기가 아랫배로 뭉쳐 들었다. 민우의 아래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된 채원은 가까스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아… 읏, 잠, 흐읏.”

점차 달아오르는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열락에 빠져 서서히 반응을 보였다. 달아오른 열기가 출구를 찾지 못해 온몸을 배회하며 돌아다녔고, 그에 상응하듯 억눌린 신음이 종종 채원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쾌락에 반응하며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는 채원의 성기가 민우의 복부를 치대자 민우는 사납게 입매를 비틀었다. 순하지 않은, 난폭하게 휘몰아치는 욕망이 단순히 몸을 맞대고 있는 것만으론 충족되지 않았다.

달뜨게 하는 열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채원을 바라보던 민우는 채원의 다리 사이, 그 안에 자리한 은밀한 곳으로 향했다. 둔덕 사이를 파고든 민우의 손이 천천히 입구 주변을 손으로 덧그리며 주름을 훑자, 헐떡이던 채원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민우의 긴 손가락이 내부로 침입해 들어왔다.

놀란 채원이 몸을 들썩였지만, 내부를 움직이며 서서히 자리를 넓히는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불쾌하고, 묘한 감각에 채원이 고개를 꺾으며 밭은 숨을 헐떡이자 조금 넓혀진 내부에 또 하나의 손가락이 침입해 들어왔다.

“시, 싫… 아윽… 그만….”

쾌감과는 다른 선득한 이물감이 들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저를 가둬두던 구속이 풀리고, 목과 쇄골을 훑던 민우의 입술도 떨어져 나갔다. 아래를 유린하며 내부를 넓히는 두 개의 손가락이 주는 이물감에 채원은 침대 시트를 더욱 세게 쥐었다. 이어 세 번째 손가락이 들어 왔을 때는 고통을 동반했다.

“아파, 잠, 잠깐!”

“형, 괜찮아요?

몸을 뒤틀며 민우의 팔을 붙들자, 저를 걱정하는 민우의 달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쾌락에 달아올랐던 열기가 고통으로 인해 걷히자, 코앞에 있는 민우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욕망과 열기에 점철되어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저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내부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 그만… 아, 싫… 읏응….”

그제야 조금 이성적으로 돌아온 머리가 민우의 행동을 자각했고,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에서 도망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침대 헤드 쪽으로 몸을 물리자, 커다란 짐승처럼 번뜩인 그의 눈이 채원을 더욱 옭아맸다. 그리고 앗, 하는 사이 반쯤 서 있던 성기가 민우에게 잡혔다.

“읏…!”

민감한 곳을 감싸 쥐는 타인의 체온에 절로 몸이 반응했다. 움츠렸던 몸이 심하게 튀어 올라, 내부에 침입한 민우의 손가락이 빠져나갈 뻔했다. 반쯤은 빠졌다가, 다시 밀고 들어오는 생경한 감각에 반쯤 서 있던 성기가 민우의 손안에 완전히 힘을 얻었다.

순식간에 최고조를 찍은 열기와 흥분에 채원이 민우의 목에 매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배출되지 않은 달뜬 열기를 민우가 어떻게든 해주길 바랐다. 무아지경으로 그에게 매달린 게 민우를 부추기고 있다는 건 알 수 없었다.

“아, 앗… 읏….”

예상치 못한 채원의 행동에 민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귓가에 닿아오는 채원의 달뜬 숨소리와 억눌린 신음이 이성의 끈을 앗아가 버렸다. 민우는 손안에서 부피를 키워 가는 채원의 성기를 훑으며 내부를 질척하게 휘젓던 손가락이 단숨에 빼냈다.

내부를 가득 채웠던 것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채원은 허리를 떨었다. 채원에게 전희가 부족하다는 걸 알지만, 민우는 더 기다리지 못했다.

손가락과 다른, 묵직한 무언가가 닿아오는 느낌에 채원이 붉게 달아오른 눈을 떴다. 제가 매달려 있는 단단한 어깨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어 그가 제 허리를 쥔다 했더니, 몸을 가르고 침입해오는 살덩이와 생경한 고통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졌다.

“아악-! 윽… 으읏, 읏.”

귓가에서 내질러진 비명과 고통에 찬 신음에 놀란 민우가 제 성기를 밀어 넣던 허리를 멈췄다. 목에 둘렀던 팔이 풀리고, 채원이 그대로 시트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한껏 위축된 내부가 빈틈없이 제 것과 맞물렸다.

“형, 읏….”

한껏 위축된 내부가 고통을 동반했다. 힘없이 늘어져 밭은 숨을 내뱉는 채원을 바라보던 민우는 재차 채원의 성기를 쥐었다. 사정의 직전까지 갔던 성기는 다시 힘을 잃은 채였다. 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채원의 성기를 훑었다. 하지만 채원은 그 손길마저 거부하며 민우의 어깨를 밀어내고 있었다.

반쯤 들어가 있는 제 성기를 강하게 죄어오는 채원의 내부가 고통에 수축하여 더욱 빠듯해졌다. 민우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채원에게 입을 맞췄다.

고통에 악물린 치열을 훑고, 입술을 빨아들이자 미미한 자극에 달뜬 숨을 뱉어내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좁은 틈을 벌리고, 입안으로 가르고 들어간 민우의 혀가 채원의 입안을 정신없이 유린했다. 타액이 넘나드는 소리가 두 사람의 입 사이로 질척하게 흘렀다.

허리를 멈추고, 진득한 키스를 이어가며 채원의 성기를 훑어주자, 고통과 긴장이 풀려 가는지 풀 죽어 있던 성기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잔뜩 굳어있던 내부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민우는 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가며 자신의 성기를 채원의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제대로 풀어주지 않은 곳으로 커다란 성기를 받아내는 채원의 억눌린 숨소리와 고통에 찬 신음이 종종 터져 나왔지만, 민우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길을 열고 있었다.

“하아….”

진득하게 이어지던 키스를 끝내고, 상체를 일으킨 민우는 완전하게 자신을 담아낸 채원의 내부를 느끼며 그의 얼굴 옆으로 손을 뻗어 자세를 지탱했다. 열락에 취해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원의 모습이 보였다. 고통과 열기에 잠식돼 온통 젖은 눈동자와 붉게 변한 눈가가 야하게 보였다.

채원의 몸을 열고 들어온 민우와 제 몸을 열어 민우를 받아들인 채원. 둘 다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열기는 맞닿은 곳을 통해 온도를 더했고, 취한 듯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후끈하게 달아오른 방 안에 또 다른 열기를 덧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우는 제 아래 잔뜩 흐트러진 채 누워 있는 채원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붉게 변한 그의 눈가를 쓸었다. 멍한 눈동자가 떨리듯 움직여 민우를 향했고, 민우는 자신을 향하는 채원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선단을 남기고 빠져나간 성기가 길들지 않은 좁은 통로를 다시금 가르고 침입해 들어왔다. 처음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득한 고통에 채원이 도리질을 치며 민우의 어깨를 쥐었다.

느릿느릿 몇 번을 그렇게 드나들며 내벽이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길을 들인 민우는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생각 같아선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난폭하게 그를 탐하고 싶지만, 또 그만큼이나 그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조금씩 버겁지 않을 정도로 속도를 높여가는데도 제 아래 갇힌 채원은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미약하게 제 어깨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만… 해, 그만… 아….”

애원하듯 쥐어짠 목소리에 민우는 제 어깨를 쥐고 있는 채원의 손을 떼어 내어 침대 위에 찍어 눌렀다. 그 덕에 민우를 올려다보는 채원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지만, 민우는 애써 무시하며 그의 붉어진 눈가에 입을 맞췄다.

“읏… 흐읏…. 아, 아읏.”

점점 속도를 높여가는 민우의 행동에 채원은 연신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고통만을 동반했던 행위는 그가 드나들 때마다 생경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내부를 가득 채우는 타인의 살덩이를 밀어내보려는 듯 몸을 허덕여 봐도 도망갈 곳 따윈 없었다. 억지로 그를 받아내는 곳은 이미 한계까지 벌어져 있는 듯했지만, 행위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민우의 성기는 부피를 더해가는 것만 같았다.

“민우야, 앗…. 처, 천천히, 제발….”

“…큿.”

애원하고 흐트러질수록 자신의 욕망을 부채질하기만 하는 채원을 바라보며 민우는 끊어져 버릴 것 같은 이성의 끈을 겨우 다잡고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그를 위해서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걸 알지만, 사정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허리는 제어가 들지 않았다.

억지로 자신을 받아내는 채원의 내부를 헤집던 민우의 성기가 채원의 내벽 어딘가를 쳐올렸다. 동시에 채원이 불에 댄 듯 놀라며 몸을 비틀었다.

“히익!”

그리고 오롯이 쾌락 때문에 신음을 내질렀다. 고통에 흐려졌던 채원의 눈이 크게 뜨이며 민우를 향했고, 덩달아 놀랐는지 움직임을 멈춘 민우의 눈도 채원을 향했다. 민우는 멍하니 채원을 내려다보다 같은 곳을 한 번 더 쳐올렸다.

“응읏, 으- 아, 앗.”

처음으로 고통이 아닌, 쾌락에 반응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온몸을 타고 오르는 전율에 격하게 몸을 뒤틀며 반응하는 채원의 상태에 몇 번이고 같은 곳은 쳐올리자 굳어 있던 내벽이 풀어지며 민우의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하지만 다르게 느껴지는 감각으로 서로 다른 신음을 뱉어냈다. 자지러질 듯 쾌락에 반응하며 무서울 정도로 치닫는 열락에 허덕이던 채원은 민우에게 잡힌 자신의 두 손을 빼내려 몸부림쳤다.

달뜬 열기에 노출된 감각이 두 손 안에 잡히길 바랐다. 허공을 향해 벌어진 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헤매다 자신의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민우는 채원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제 손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행동이 거절처럼 느껴져서였다.

연신 같은 곳을 찍어 올리며 저를 몰아붙이는 감각에 이성마저 마비되어 갔다. 쉴 새 없이 들이치는 쾌락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을 터트린 채원이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민우에게 애원하게 시작했다.

“소, 손… 아으… 놔 줘, 제발… 제, 흐으… 응읏, 읏.”

제 아래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제게 애원하는 채원의 처음 보는 모습에 민우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느슨해진 틈에 뿌리치듯 손을 빼낸 채원이 그대로 손을 뻗어 민우의 목에 매달렸다. 생각지도 못한 채원의 행동에 민우의 이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시간이고 시달린 채원은 제 안에 사정하고, 제 위로 쓰러진 민우의 무게감을 느끼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온통 지쳐버린 행위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어 저를 짓누르는 민우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있는데, 민우의 성기는 제 안에서 다시 빠듯하게 힘을 얻고 있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는 민우를 경악에 찬 눈으로 바라보자, 민우는 땀으로 잔뜩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제 다리를 잡아 벌리고 있었다.

“아, 안…!”

당황함에 놀라 소리쳐 봤지만, 민우는 잡아 벌린 채원의 한쪽 다리를 제 어깨에 얹으며 천천히 자신을 가두듯 손을 뻗어왔다. 하룻밤 사이로는 끝나지 않을 열기가 계속되려 하고 있었다.

***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느낌에 눈을 뜬 채원은 제대로 깨어나지 않는 정신으로 주변을 훑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보이는 자신의 방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시트에 닿아 있는 느낌과 등 뒤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이었다.

덮고 있는 이불을 들춰보자 나신으로 누워 있는 몸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누군가의 단단한 팔을 바라보는 순간 지난밤이 또렷하게 생각났다.

“읏….”

온몸을 타고 오르는 격통과 띄엄띄엄한 기억을 되짚어 볼 때, 상당히 시달린 것 같았다. 채원은 제 뒤에 찰싹 붙어 허리를 감고 있는 민우의 손을 풀어내고, 몸을 일으키려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내부에 남아 있는 이물감과 아직도 열려 있는 것 같은 감각. 처음엔 간밤에 자신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해대던 민우와의 정사가 남긴 여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운이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민우의 성기가 여전히 제 내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채원은 황당함과 민망함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움직여 그의 성기를 빼냈다.

한껏 벌려진 내부에서 이물질이 빠져나가는 선득한 느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던 채원은 주륵, 하고 내부를 타고 흘러나오는 무언가에 놀라 급하게 허벅지 사이를 손으로 훑었다. 불투명한 액체가 진득하니 손바닥 가득 묻어나왔다.

“…….”

제 손을 보며 굳어 있던 채원은 그제야 타액으로 엉망이 된 몸과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간밤의 격렬했던 정사를 나타내는 민망한 증거에 미간을 짚고 화를 삭이던 채원은 그대로 손을 들어 제 옆에서 엎드려 곤히 잠든 민우의 등짝을 내리쳐 버렸다.

자신이 밤새 몰아붙인 덕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채원의 등짝 스매싱으로 눈을 뜬 민우는 그를 욕실로 데려가 깨끗하게 씻겨주고, 빨래까지 해야만 했다.

세탁기에 이불을 넣어 돌리고, 거실로 나온 민우는 소파 위에 늘어지듯 누워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고 있는 채원의 다리 옆에 앉았다.

“응, 응… 미안 지현 씨. 나 오늘은 매장에 못 나갈 것 같아. 지현 씨도 그냥 하루 쉬어. 응, 응. 그럼.”

채원이 통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식지 않던 간밤의 열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너….”

그리고 그런 민우의 기분을 눈치라도 챈 듯 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내가 좋아하고 있다고 오해했던 상대방.”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적당한 사람이 지현 씨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맞아?”

민우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채원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말이야.”

“네….”

“나는 외모로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네?”

“보통 그러잖아. 외모가 잘나면 인생의 절반은 성공한 거라고.”

“아….”

“그런데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

“지현 씨는 내가 너무 예뻐서 징그럽대. 사람 같지 않다고.”

“네?”

“지현 씨가 특이케이스긴 하지. 날 보면서 징그럽다니.”

채원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민우는 웃을 수 없었다.

“대부분 날 보면 징그럽다는 생각은 안 하지. 이쁘다고 좋아하지.”

“그렇…죠.”

“그래서 나는 외모만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

“네?”

“근데 너도 내 외모에 반해서 날 좋아한다고 한 거였지?”

“아… 그게….”

“그런 사람 많아, 그래서 네가 그럴 때도 별 감흥 없었어. 그런데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을 긋거든. 내가 아니라 그쪽에서.”

“네?”

“바라보기만 하는 거지, 쇼윈도 속에 잘 꾸며진 마네킹처럼. 그래서 난 스스로 쇼윈도 사장이 된 거고.”

“…….”

“그런데 표면적으로 돌진해 온 건 네가 처음인 것 같아. 아주 쇼윈도고 뭐고, 다 깨부숴 놨어.”

“아, 그… 죄송해요.”

“괜찮아. 나름 신선하더라.”

“신선….”

“그거 알아?”

“네?”

“네가 그렇게 신경 쓰던 지현 씨는 유부녀라는 거.”

“네?”

자신의 말에 얼이 빠진 민우가 패닉에 빠지는 걸 바라보며 채원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제 인생에 저돌적으로 돌진해 온 3살 연하의 남자가 일방적으로 퍼부어주는 관심과 애정에 탐이 나고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한 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자신에게 쏟아부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꽤 기분 좋은 변화였다. 채원은 여전히 끙끙대는 민우의 허벅지 위에, 보란 듯이 제 다리를 올렸다. 놀란 민우가 굳어버리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런데 너 종종 카페에 안 오던 이유는 뭐였어? 바쁜 일이라도 있었어?”

“!”

채원의 질문에 잔뜩 굳어 있던 민우의 등이 눈에 띌 만큼 움찔거렸다. 그리고 슬금슬금 채원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고, 채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야.”

무섭게 부르는 목소리에 어깨를 떤 민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저… 밀당을 좀….”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답에 채원은 넋이 나갔다. 그리고 붉게 물들어 가는 민우의 귓바퀴를 바라보며 덩달아 창피해지는 기분에 그의 어깨를 발로 퍽퍽 차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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