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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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압적인 정사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렴은 현재 본인이 처한 상황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번 이우와의 만남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일방적으로 그를 무시하기 시작한 지 며칠. 앵무새처럼 자신만 불러대며 사과를 해대는 이우의 행동에 의문을 품은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늘어가자 더는 방치할 수가 없어졌다. 그 외에도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 만남을 제안한 건 태렴 쪽이었다. 그랬는데 왜 또 이우의 작업실에 오게 된 건지 골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트인 곳에서는 맘 편히 나눌 수 없는 얘기였기에 조용한 곳을 찾았을 뿐인데, 이우의 차에 태워져 이우의 작업실로 실려 와 버린 것이었다.
저항하고, 거부해 볼 틈도 없이 끌려와, 탐탁지 않은 공간에 또다시 발을 들여야 한다는 점이 불편했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태렴의 모습을 빤히 보던 이우는 그의 등을 떠밀며 작업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영 불편한 표정으로 작업실에 서 있던 태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우를 경계하듯 뒷걸음질 쳤다. 그런 태렴의 행동에 발을 멈춘 이우가 태렴을 빤히 바라봤다. 미동조차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뭐라도 드실래요?”
하지만 이우는 멈춰 선 채 말을 건넸다. 태평한 물음에 태렴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차갑게 답한 태렴의 말에 이우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 작업실 한쪽에 있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멀뚱히 서 있는 태렴에게 작업실 중앙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서서 이야기할 순 없으니 앉으세요.”
이우의 말에 태렴은 이우의 손끝이 향하고 있는 곳을 바라봤다. 등받이에 모포를 걸쳐둔 익숙한 나무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의자를 바라본 태렴은 대번에 미간을 구기고 이우의 반대편 벽에 다가가 기대어 섰다.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게 최대한 문 쪽으로 붙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렴의 행동에 낮은 한숨을 흘린 이우는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의 행동에 태렴이 움찔거리며 눈을 부릅떴지만, 이우는 그저 손에 든 카메라를 만지작대기만 할 뿐이었다.
“뭐하냐?”
이우의 행동을 미심쩍게 보던 태렴이 넌지시 물었다. 이우는 시선을 들어 태렴을 훑어본 뒤 다시 카메라로 시선을 내렸다.
“말씀하세요.”
대화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이는 이우의 행동에 태렴은 한껏 얼굴을 구겼다. 일방적으로 무시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낯짝만 보고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넌 설마 사진을 찍는 사람들한테 언제나 그런 짓을 해?”
“그런 짓이요?”
시종일관 카메라에서 떨어지지 않던 이우의 시선이 태렴을 향했다.
“어떤 짓이요?”
적나라한 질문에 이번엔 태렴이 이우의 시선을 피했다. 시선이 자신을 벗어나자 이우는 미련 없이 눈을 내리며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전 인물은 안 찍어요.”
“그럼 나한테 그런 짓을 한 이유는?”
“…….”
“너…. 게이야? 혹시 남자를 좋아하고 그래?”
“아니요.”
“그럼 대체….”
말끝을 흘리는 태렴의 행동에 이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둘 사이를 맴도는 어색한 침묵 끝에 이우가 카메라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도련님.”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태렴이 한쪽 눈썹을 세우며 표정으로 물었다.
“누드 사진 찍게 해주세요.”
자신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뱉은 이우의 말에 태렴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말도 나오지 않는 듯 이우를 멍하니 바라보던 태렴은 미간을 와작 구기며 벽에 기대어 있는 몸을 세웠다.
“너, 미쳤냐?”
“아니요.”
태렴은 앳된 얼굴과는 다르게 꽤 단단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발음도 언제나 또박또박 명확해서 들을 때마다 더욱 깔끔한 인상을 준다고 이우는 생각했었다. 그런 태렴의 목소리에 더욱 무게감이 실렸다.
“내가 지금 너한테 사진 찍혀 주러 왔어?”
“…….”
“상황 파악이 안 돼? 아니면 상황 파악을 못 해?”
“…….”
“야!”
몰아붙여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이우를 무섭게 일갈하던 태렴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태렴을 빤히 바라보던 이우는 손을 들어 태렴을 가리켰다.
“벗어주세요.”
“허….”
도대체가 대화가 통하질 않았다. 속내도 알 수가 없었다. 최이우가 아닌 집사일 때는 상당히 죽도 잘 맞고, 말도 잘 통하는 상대라 관계를 헝클어뜨리고 싶지 않아서 대화를 해보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더는 태렴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관계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이 한 톨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다.
말없이 이우를 노려보던 태렴은 그대로 걸음을 옮겨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는 행동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하지만 가벼운 금속성 음을 낸 문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당황한 태렴이 거칠게 문고리를 돌리며 문을 당기고, 밀고, 두드려 봤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 열기에 열중해 있던 태렴은 이우가 제 등 뒤로 선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문고리를 잡은 태렴의 손을 억지로 떼어낼 때까지. 이우의 손에 잡혀 작업실 중앙으로 끌려오다시피 한 태렴은 거칠게 몸부림치며 이우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당장 열어!”
하지만 이우는 태렴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미약하게 갸웃거릴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결국, 태렴은 참지 못하고 세워져 있던 나무 의자를 힘껏 걷어 차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 벽에 처박힌 의자를 잠시 바라보던 이우가 말없이 의자 근처로 걸어가 의자와 함께 날아간 모포를 주워 태렴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 행동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벗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참지 못한 태렴이 이우의 손에 들린 모포를 뺏어 던지고 그의 멱살을 쥐었다.
“미친놈 아냐, 이거?”
“…….”
“내가 이러려고 널 만나러 온 줄 알아?”
“…….”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슨 말이요?”
“나한테 했던 그 일에 대한 해명과 사과!”
“사과하면 벗어주실 건가요?”
“뭐?”
“죄송해요. 이제 벗어주세요.”
“너… 무슨 이중인격, 뭐 그런 거라도 있어?”
“없습니다.”
“그럼 지금 제정신이라고?”
“네.”
“…됐으니 문 열어. 이 이상 너랑은 상종을 못 하겠다.”
“싫습니다.”
“열어!”
“제가 사과하면 벗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하셨잖아요.”
“그런 말 한 적 없어.”
“도련님이야말로 거짓말쟁이시네요.”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마.”
“…….”
“열어. 가게.”
끝나지 않던 승강이를 벌이던 태렴은 밀치듯 멱살을 놓고, 다시 한번 문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이우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태렴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통 읽을 수 없는 이우의 행동에 당황한 태렴이 앗, 하는 사이 이우의 손에 입고 있던 셔츠가 뜯어져 나갔다.
“?”
이우의 행동에 경악한 태렴이 채 떨어져 나가지 못한 옷가지를 쥐고 이우의 몸을 밀쳐냈다. 하지만 이우는 끈질기게 태렴의 팔을 쥐고 놓아 주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황당함에 고함을 내지르며 잡힌 팔을 빼어내려 애썼지만, 이우는 이렇다 할 변명과 핑계도 없이 우악스럽게 태렴의 팔을 잡고만 있었다. 결국, 어떤 반응도, 대꾸도 해주지 않는 이우를 상대로 혼자 난리를 치다 지쳐버린 태렴은 잔뜩 찢어진 제 옷가지를 추스르며 낮은 욕설을 뱉었다.
“시발, 이 꼴로 어떻게 가라고….”
조용히 읊조리는 태렴의 말을 듣던 이우는 웬일인지 손쉽게 태렴의 팔을 놓아 주었다. 옥죄어 오던 악력이 사라지자 태렴이 놀란 듯 이우를 바라봤고, 이우는 테이블 옆 서랍에서 티셔츠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태렴은 놀란 듯 두 눈을 홉떴지만, 이내 당연하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우의 손에 들린 티셔츠는 태렴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벗고, 사진을 찍으시면 드릴게요.”
“뭐?”
갈수록 한술 더 떠가는 상황에 태렴은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아슬아슬하던 멘탈이 아예 궤도 밖으로 나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멍하니 이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던 태렴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미간을 짚었다.
“넌 누드 사진에 미친 거야?”
“…….”
“아니면 남자 알몸을 못 봐서 안달인 거냐?”
“인물 사진에 관심 없다고….”
“시발, 찍어! 찍어 이 새끼야!”
자신의 물음에 답하는 고저 없는 목소리를 듣던 태렴은 그의 말을 끊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넝마 같은 제 셔츠를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옷을 모두 벗고 전라의 상태로 작업실 중앙에 선 태렴은 말없이 이우를 노려봤다.
“뭐해? 빨리 찍어.”
“모포는….”
“이 상황에 모포가 무슨 소용이야!”
“…….”
“네 면상 보는 게, 벗고 있는 거보다 더 짜증 나니까 빨리 끝내!”
차갑게 말하며 태렴은 제가 던져 놓은 의자를 끌어와 앉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제지하는 이우에 의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의자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
이쪽이라고 가리키는 곳은 이우의 뒤에 있는 테이블이었다. 의아하고 어이없는 기분에 잠시 이우를 노려보던 태렴은 한마디 해줄까도 했지만, 경험상 그와 제대로 된 대화가 성립될 리가 없다는 걸 알기에 묵묵히 걸음을 옮겨 테이블로 다가갔다.
“위에 앉아 주세요.”
웬만큼은 예상했지만 그래도 황당한 요구에 눈살을 찌푸린 태렴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테이블 위에 올라앉았다. 태렴이 자리를 잡고 앉자, 이우가 그의 옆구리 통해 등으로 손을 뻗어 자세를 잡아주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타인의 손길에 태렴의 어깨가 움츠러들자, 이우는 앉아 있는 태렴의 허벅지를 쥐고, 그의 어깨를 눌러 자세를 펴게 했다. 어깨를 만지는 손길보다, 허벅지를 강하게 쥐고 있는 뜨거운 손바닥의 열기가 전해져, 태렴은 거칠게 이우의 손을 쳐냈다.
꽤 날카로운 마찰음에 묵묵히 태렴의 자세를 잡아주던 이우가 눈을 들어 시선을 맞춰왔다. 감정을 담지 않은 듯한 맨질맨질한 눈동자에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태렴은 이우의 어깨를 밀어내며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빨리 찍어.”
낮은 한숨을 내쉰 이우는 카메라를 들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처음으로 순순히 말을 듣는 이우의 행동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태렴은 부러 시선을 돌리진 않았다. 서로가 인지조차 하지 못할 찰나의 침묵이 지나고, 이우는 손에 들린 카메라의 포커스에 태렴을 담았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셔터를 누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궁금증에 진 태렴이 시선을 돌리자, 포커스를 통해 태렴을 바라보던 이우가 카메라를 내렸다.
“다리, 벌려주세요.”
다시 시작된 무리한 요구에 태렴이 이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다리를 벌려주었다. 조금 붉어진 뺨으로 고집스레 자신을 바라보며 다리를 벌리는 태렴의 행동에 이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요구에 따라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우는 도통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이우의 행동에 태렴이 의아한 듯 미간을 좁히고 그를 훑었다.
“안 찍어?”
짜증을 한껏 담은 태렴의 말에 이우는 카메라를 들어 올려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한참을 두 사람 사이엔 일정한 셔터 소리만이 오갔다. 이우는 집중한 듯 사진만을 찍어댔고, 태렴은 시선을 돌린 채 단 한 번도 카메라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셔터 소리만 가득하던 실내에 어느덧 셔터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실내가 조용해지자, 태렴이 이우를 바라봤다. 이우는 시선을 내린 채 제가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이우를 바라보며 태렴이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끝났어?”
“아니요.”
하지만 고개조차 들지 않고 건조하게 답하는 이우의 태도에 테이블에 어중간하게 걸터앉은 태렴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고, 그 소리에 이우가 눈을 들었다.
화를 삭이는 얼굴로 테이블에 기대듯 걸터앉아 있는 태렴의 자세를 바라보던 이우는 한걸음에 다가와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의 허리를 잡아 테이블 위로 올려 앉게 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는지, 태렴은 제 허리를 잡은 이우의 손을 쳐냈다.
매서운 마찰음이 울렸지만, 이우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렴은 전라의 상태로 이우와 가까이 붙어 있는 게 불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벌어져 있던 다리를 모으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떨어져.”
덤으로 퉁명하게 내뱉은 말에 이우의 시선이 태렴을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전신을 기는 듯한 눈빛이 온몸에 와 닿자 태렴은 질겁하며 그를 피해 테이블에서 내려오려 했다. 이우는 그런 태렴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테이블에 강제로 눕히고, 놀라 버둥거리는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무… 뭐?!”
난데없는 이우의 행동에 놀란 태렴이 소리쳤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쓸어 오는 이우의 손길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허벅지를 쓸던 손은 그대로 골반을 타고 올라와 허리를 매만졌고, 생소한 감각에 진저리를 친 태렴은 망설임 없이 이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뻑, 하는 경쾌한 타격음이 실내를 울렸지만, 이우는 잠시 비틀거렸을 뿐 손을 멈추거나 태렴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에 발끈한 태렴이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지만, 이번엔 이우의 손에 막히고 말았다.
태렴의 주먹을 막아낸 이우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태렴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고, 앗, 하는 사이 태렴의 양손은 이우의 한 손에 모아 잡힌 채 머리 위로 끌어 올려졌다.
“뭐 하자는 거야! 안 풀어?”
두 눈을 부릅뜨고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상황에 태렴이 거세게 저항을 하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우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그대로 태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우의 행동에 태렴이 잔뜩 질린 얼굴을 하고 긴장을 하자, 목덜미를 핥고 내려가는 미끈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미친!”
명백하게 자신의 목덜미를 핥고 있었다. 태렴은 두 눈을 부릅뜨며 있는 힘껏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항할 수 있는 두 손이 결박된 상태라 몸을 뒤트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이우의 아래서 이리저리 몸을 뒤틀던 태렴은 허공에 버둥거리던 발을 접어 무릎으로 이우의 옆구리를 찍어 버렸다.
“큿.”
고통에 찬 억눌린 숨소리가 들린다 싶었다. 하지만 뒤이어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 버리는 이우의 행동에 태렴도 억눌린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윽!”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화끈한 통증에 시근덕거리던 태렴이 다시 한번 무릎을 드는데 손목을 옥죄던 감각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몸이 뒤집혔다. 부지불식간에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된 태렴은 상황 판단을 위해 잠시 눈을 굴렸다. 하지만 곧 자신의 엉덩이를 세게 쥐어오는 손길에 놀라며 급하게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뭐하는-!”
하지만 뻗어온 이우의 손이 태렴의 목을 잡고 그대로 테이블 위로 찍어 눌렀다. 그 덕에 끝맺지 못한 뒷말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이우의 행동에 태렴은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다행인 건 몸이 뒤집히며 양손이 자유로워졌다는 거였다.
태렴은 제 목을 잡은 이우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마구잡이로 잡아 뜯고, 할퀴어봤지만, 자신의 행동에 이우의 손에는 오히려 힘이 실려 가고 있었다. 억눌린 채 의미 없는 저항을 하던 태렴은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에 몸을 굳혔다. 버클을 풀고, 퍼스너를 내리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하체에 더욱 밀착해 오는 이우의 몸에 사고가 정지해버렸다.
그의 행동에 대한 결론과 해답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릴 수가 없었다. 홀딱 벗은 남자의 뒤에서 또 다른 남자가 앞섶을 풀어헤친다는 행동의 해석을 어떻게 내려야 한단 말인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배회하며 불안한 듯 흔들리던 눈동자가 제 몸을 훑기 시작한 이우의 손길에 단번에 얼어붙었다. 등줄기를 따라 눅눅하고 음습한 기운이 내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무언가가 제 엉덩이에 닿았다. 상상 못 할 곳에 닿아온 뜨겁고 단단한 것이 무엇인지 인지해 볼 새도 없었다.
“아아악!”
우악스럽게 입구를 넓히며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선득한 고통에 태렴은 저도 모르게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하체를 비집고 침입해 오려는 살덩이의 느낌은 끈질기게 자신의 다리 사이를 떠나지 않았다.
연신 몸부림치는 태렴과 풀어주지도 않은 뻑뻑한 공간에 전희도 없이 밀어 넣는 침입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좁은 입구에 빠듯하게 밀어 넣어 봐도 선단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이우는 결합부를 살폈다.
“미친 새끼야, 뭐 하는 거야!”
태렴은 본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우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판단할 여유조차 없었다. 들어오는 곳이 아닌 곳에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틀어 밀어내며 연신 소리를 쳐댔다.
삽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이우는 태렴의 목을 놓고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단단히 고정된 허리 아래로 끔찍한 이물감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몸을 열기 시작했다.
“그만… 악, 아악!”
눈앞에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끔찍하게 흐르는 고통 속에서 본능적으로 도망가기 위해 잡을 것도 없는 테이블 위를 허우적거렸지만, 이우와 테이블 사이에 갇힌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어서 막무가내로 삽입을 해대는 이우의 성기를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불에 달군 쇠막대기가 억지로 쑤셔 넣어지는 기분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고통과 뜨거움이 말할 수 없는 곳을 달궜고, 곧 살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것이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생경한 소음이 주는 선득한 고통에 태렴이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 고통에 허덕였지만, 상처 자리에서 새어 나온 피는 이우의 성기를 적시며 삽입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었다. 꾸역꾸역 억지로 밀어 넣어지던 성기가 태렴의 피를 윤활제 삼아 단번에 뿌리까지 박아 넣어졌다.
“!”
숨도 쉴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태렴은 등 뒤에서 낮게 흐르는 숨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잠시 잠깐 놓았던 정신에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드문드문 끼어들었다. 그 소리는 먼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부드러운 손길이 등줄기를 훑어 올라가 목덜미를 건드리고, 머리를 헤집었다. 뒤이어 따듯한 체온이 등 뒤를 감싸듯 느껴지고, 자신을 부르는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도련님.”
까무룩 꺼져 있던 정신이 단숨에 수면 위로 부상하며 내동댕이쳐졌다. 놀라 눈을 뜬 태렴은 저를 등 뒤에서 찍어 누르고 있는 이우의 체중과 제 내부를 꽉 채운 이물감을 느꼈다.
“읏….”
놀라 몸을 뒤틀자, 저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잠깐의 기절을 겪고 깨어났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 속에 덩그러니 던져진 태렴이 정신을 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제 뒤에 붙어 있던 이우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들지 않은 곳에 준비도 없이 밀고 들어온 살덩이가 드나들기 시작하고, 찢어진 상처 자리가 따갑게 쓸리는 감각에 태렴은 소름이 돋은 어깨를 움츠리며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그, 그만… 해! 아웃… 그만, 악!”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에서 허리까지 붙잡힌 채, 이우의 움직임에 하염없이 흔들리던 태렴이 짧은 손톱을 세워 연신 테이블 위를 긁어댔다. 공허한 두 손이 잡을 곳이 없어 불가피하게 세운 손톱이 속절없이 상해가는 것도 몰랐다.
질척이는 음란한 소리가 결합부를 타고 끈적끈적하게 흘러나왔다. 물기를 머금은 소리가 거슬리게 귓가를 맴돌며 다리 사이를 적셔왔지만, 이우의 손아귀에 잡힌 태렴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끔찍한 고통과 비릿하게 풍기는 피 냄새에 섞여드는 불쾌한 소리만이 작업실의 공기를 달구며 두 사람에게 달라붙었다.
“하지…! 읏, 흐윽… 아, 그만…!”
화를 내고, 몸부림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욕설을 퍼부어 봐도 제 뒤에 붙어 연신 허리를 움직여 대는 이우의 입에서는 가쁜 숨소리에 섞인 억눌린 신음이 간혹 터져 나올 뿐,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사정없이 드나드는 이우의 성기에 여전히 고통만을 느끼는 태렴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잔뜩 소리친 목은 어느새 잔뜩 쉬어서 색색거리는 새된 숨소리만을 뱉어냈고, 몸부림치던 몸도 지쳤는지 테이블 위에 축 늘어져 힘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이우는 그런 태렴의 등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날개뼈 부근을 매만졌다. 물기를 머금은 피부가 손바닥 안에 달라붙어 오는 것만 같았다.
“…….”
잠시 그렇게 태렴의 몸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이우는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제 아래를 들쑤시던 행동이 잠잠해지자 반쯤 정신이 나가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던 태렴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이우의 행동에 또 한 번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악-!”
천천히 허리를 멈춘 이우는 태렴을 붙잡고, 결합해 있는 상태 그대로 그의 몸을 뒤집었다.
빡빡한 내부의 내벽들이 성기에 붙어 그대로 쓸려 비틀어지는 감각에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목구멍 안쪽으로 끓던 울음이 고여 숨을 막았다.
숨을 쉬지 못해 몸을 비틀며 입을 크게 벌리는 태렴의 상태에 이우는 천천히 손을 뻗어 잔뜩 죽어 있는 태렴의 성기를 쥐었다. 하지만 아무리 만져주고, 쥐어 봐도 그의 성기는 힘을 얻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우는 그대로 태렴의 입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태렴의 입안과 혓바닥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하고 질척한 소리가 이우의 손가락을 타고 늘어졌다. 목구멍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혓바닥을 찍어 누르자 터지듯 숨을 내뱉은 태렴이 격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기침과 함께 들썩이는 태렴을 내려다보던 이우는 제 손가락에 가득 휘감긴 태렴의 타액을 핥으며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이우의 아래에 갇혀 흔들리는 태렴의 입에서는 소리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숨들이 간간이 새어 나왔다. 힘없이 늘어진 몸은 이우가 취하는 대로 움직였고,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은 온통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흔들리기만 하는 태렴의 상태를 바라보던 이우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이우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어깨를 잡아 내리며 허리를 깊게 쳐올렸다.
한순간에 결합이 깊어지며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한 번 더 태렴의 감각을 지배했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다고 믿었던 몸이 격하게 뒤틀리며 튀어 올랐다.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까무러친 태렴은 입을 크게 벌리고 헉헉대다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하,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울음 때문에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애원하듯 더듬더듬 내뱉은 태렴의 말에 이우는 움직임을 멈추고, 태렴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의 손에 가려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우는 태렴의 손을 잡아 떼어내고 테이블 위에 잡아 눌렀다. 엉망으로 흐트러져 울고 있는 태렴의 얼굴이 전부 드러났다. 그는 절망적인 얼굴로 이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발 그만… 나한테 왜 그래… 왜….”
“…왜?”
태렴의 말에 이우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태렴은 안도나 의아함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후, 이우는 다시 기계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 태렴은 저를 탐하는 이우의 손길과 몸짓을 느끼며 정신의 끈을 놓아 버렸다.
눈물이 잔뜩 엉겨 붙은 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얼마의 시간이 지난 건지 이우가 몇 번이나 자신을 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깨어난 태렴은 저를 감싸고 있는 모포를 바라보다 시선을 올렸다.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은 이우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말끔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이우는 잠이 든 것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테이블을 내려온 태렴은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아 앓는 소리를 삼켜야만 했다. 동시에 내부에서 흘러나온 이우의 정액이 다리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
말없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바라보던 태렴은 몸에 둘러진 모포를 벗어 다리 사이를 급하게 닦아냈다.
“일어나셨어요.”
열중해 있는 태렴의 뒤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태렴이 창백해진 얼굴로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태렴의 행동을 말없이 바라보던 이우의 시선이 태렴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이 와 닿자, 태렴은 서둘러 모포로 몸을 가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이우의 시선에 작은 불신과 불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렴은 서둘러 헐벗은 몸을 가려줄 자신의 옷가지를 찾기 시작했다. 너덜너덜해진 셔츠를 입고서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태렴의 눈동자가 멈춘 곳은 테이블 아래였다. 아무렇게나 벗어서 던져둔 옷가지들이 테이블 아래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 위치에 널린 옷가지들이 난감했다.
표정을 전부 드러낸 탓인지, 태렴을 바라보던 이우의 시선이 테이블 아래로 향했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청바지와 셔츠. 아마도 태렴의 것일 게 뻔했다. 옷가지와 태렴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우가 테이블에서 내려오자, 태렴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우는 허리를 굽혀 태렴의 옷가지를 주워 들 뿐이었다.
이우의 행동을 경계하면서 지켜보던 태렴은 주워 든 옷가지를 저에게 내미는 이우의 손을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섣불리 손을 뻗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이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옷가지를 든 손을 살짝 흔들었다.
“필요 없으신가요?”
필요 없을 리가! 목구멍까지 터져 나온 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태렴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옷가지를 건네받기도 전에 이우에게 붙잡혀 테이블에 엎어졌다.
“야!”
급변한 상황에 몇 시간 전의 악몽이 오버랩됐다. 온몸이 차게 식는 기분과 창백해진 얼굴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태렴의 등을 팔꿈치로 찍어 누른 이우는 태렴의 몸을 덮고 있는 모포를 걷어냈다.
맨살에 와 닿는 공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쳐봤지만,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복부에 조금만 힘을 줘도 안쪽 어딘가가 저리는 통에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는데, 이우의 손가락이 예고도 없이 내부로 침입해 들어왔다.
정사의 여운이 남아 있는 듯 부어서 아직 부드러운 곳에 또다시 무언가가 침입하자, 태렴은 억눌린 숨을 삼키며 붙잡을 곳 없는 테이블 위에서 바르작거렸다.
“싫… 그만해!”
비명처럼 질러진 소리가 잔뜩 갈라지며 엉망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우는 멈추지 않고 태렴의 엉덩이 사이를 난폭하게 헤집었다.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얼얼하던 곳을 헤집는 손길을 따라 날카로운 고통이 되살아났다.
“이우야…!”
애원하듯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조금 전보단 조심스러워진 손길로 내벽을 훑기 시작했다. 벌벌 떨리는 태렴의 등을 달래듯 쓰다듬으며 손가락을 빼낸 이우는 입구 또한 조심조심 문지르기 시작했다.
뜯어지며 상처가 난 상처 자리를 건드릴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통증이 전신을 내달렸다. 태렴은 몇 번이고 숨을 죽이며 몸을 움츠려야 했다.
얼마 후, 은밀한 곳을 어루만지던 이우의 손이 깨끗하게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벗겨졌던 모포도 다시 몸 위로 덮어졌다.
“…?”
테이블 위에서 다시 시작될 공포에 떨고 있던 태렴은 내부를 빠져나간 손가락과 함께 도로 덮어진 모포에 이우를 바라봤다. 이우는 티슈를 뽑아 제 손가락을 닦고 있었다. 자신에겐 관심조차 없다는 듯 시선 한 번 돌리지 않는 이우를 경계하듯 바라보던 태렴이 천천히 테이블을 짚고 몸을 일으키자 이우가 시선을 돌려 태렴을 바라봐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거리며 후다닥 뒷걸음질 친 태렴이 모포 자락을 여미며 이우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우는 태렴의 옷가지와 제 티셔츠를 함께 태렴에게 건넬 뿐이었다.
“약을 발라드린 것뿐이에요.”
옷가지와 함께 건조하게 건네진 말에 태렴이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와작 구겼다.
“너… 나 싫어했냐?”
“네?”
씹어뱉듯 던진 태렴의 말에 이우는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쳤다. 놀란 듯,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듯 크게 뜬 눈으로 되묻는 이우의 얼굴을 뚫어지라 노려보던 태렴이 그의 손에 들린 옷가지를 낚아채 서둘러 꿰입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이우는 여전히 놀란 얼굴로 태렴의 말을 곱씹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옷을 다 입은 태렴이 미련 없이 문으로 향하자 이우는 급하게 쫓아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잠…!”
하지만 불에 댄 듯 놀라며 자신의 손을 쳐내고, 경계하듯 몸을 움츠리는 태렴을 보며 이 이상 그의 몸에 손을 댄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가득한 적의를 읽으며 이우는 스스로 태렴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도련….”
“부르지 마.”
“…싫어하지 않습니다.”
“…뭐?”
“…….”
“그럼 왜 이런 짓을 하는데?”
“그건….”
말을 잇지 못하고 무언가를 고민하듯 입을 다물어 버린 이우의 행동에 태렴은 그가 입을 열어주길 잠시 기다려 주었지만, 쓸데없이 길어지기만 하는 침묵에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동시에 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답을 주려는 것보다는 떠나려는 자신을 잡으려는 듯 급하게 잡는 그의 목소리에 태렴이 뒤를 돌아 이우를 바라봤다.
“명확한 답도 내려주지 않는데, 백날 싫어하지 않는다고 해봤자 믿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저는….”
“날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네 행동은 도저히 호감을 얻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
“호감은 됐습니다. 좋아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바라지 않으니까요.”
자신의 말을 끊으면서까지 너무나 단호하게 뱉어진 이우의 말에 태렴은 어이가 없었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자신의 호감을 얻은 것엔 관심이 없단다. 정말이지 더는 말을 섞을 가치도 없었다. 태렴은 질렸다는 눈으로 이우를 노려보다 몸을 돌려 문고리를 쥐었다.
철컥-
은연중에 또다시 문이 열리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있었지만, 걱정과 달리 문은 가볍게 열렸고, 태렴은 이우를 홀로 남겨 놓은 채 그의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
[무지개 요정 : 도련아 요즘 집사 왜 안 들어 오냐?]
[도련 : 몰라요]
[무지개 요정 : ??]
[도련 : ?]
[귓속말] [무지개 요정 : 너희 진짜 싸우기라도 했어?]
[귓속말] [도련 : 그런 거 아니에요]
[귓속말] [도련 : 암튼 걔가 안 들어오는 이유를 제가 어떻게 알아요 영 궁금하시면 길마님이 직접 연락해보세요]
[귓속말] [무지개 요정 : 어? 어... 그래...]
요정과의 대화를 끝낸 태렴은 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숨기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흘째, 이우는 도통 게임에 접속하질 않았다. 연신 저를 부르짖던 집사가 어느 날부터 전혀 접속하지 않으니, 모두는 은연중에 자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 이우에 관한 것을 저와 연결하고, 저에게 묻는 것인지 불쾌했지만, 저와 상관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게임에서조차 그가 계속 귀찮게 군다면 길드를 옮기거나 게임을 접을 생각까지도 하던 태렴에게 그의 부재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가 게임에 접속을 한다 해도 전처럼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부재가 나날이 길어지고, 길드원들의 걱정 어린 말들이 들려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귀 기울이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무지개 요정 : 집사 연락도 안 되던데...진짜 무슨 일이 있나?]
[KING Husband : 연락도 안 돼요?!]
[무지개 요정 : 응...]
[제로사이드 : 도련이 하고도 연락 안 되는 거?]
[도련 : 몰라 내가 왜 나와]
[노아 : 둘이 제일 친했잖아?]
[무지개 요정 : 그래..그러지 말고 도련이가 연락 좀 해봐]
[도련 : 겜 접으려나 보죠ㅡㅡ]
[광인한 남자 : 쟈가워...]
[노아 :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얼마 전까지 집사가 주구장창 너만 불러대던 것도 그렇고]
[도련 : 없어]
[무지개 요정 : 없으면 연락 좀 해라 만일 접으려는 거여도 이렇게 말없이 가는 건 아니지]
[도련 : 길마님이 해봐요 그냥]
[무지개 요정 : 연락이 안 되는걸...]
[도련 : 그럼 제가 해도 마찬가지겠죠]
[무지개 요정 : 큰 기대 안 하니까 한번 해 줘라...그래도 집사랑 제일 친했던 사람이 너였으니까]
[도련 : ...]
[도련 : 알았어요]
키보드에서 손을 떼어낸 태렴은 영 탐탁지 않은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자신이 뭐가 아쉬워서 먼저 그 자식에게 연락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냥 연락이 안 되더라며 거짓말을 할까, 하다가 그래도 한 번쯤은 진짜로 전화를 걸어봐야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겠다, 싶어 곧바로 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은 끊이지 않고 한참을 이어졌다. 도통 받을 생각이 없는지, 하염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연결음에 태렴이 그만 전화를 끊으려는데, 작은 소음과 함께 통화가 연결됐다.
“…….”
그가 전화를 받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기에 태렴은 전화기를 든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부자연스러운 침묵 속에 서로의 숨소리만이 넘나들고, 말이 없는 상대방의 행동이 불편해질 즈음.
「네.」
잔뜩 가라앉은 이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 하나로 유추 가능한 그의 상태들을 떠올리던 태렴은 고개를 내저었다.
“게임 들어와.”
「…….」
전후 사정없이 본론만 던지는 태렴의 말에도 이우는 되묻지 않았다.
“게임 접을 거면 접속해서 길드원들한테 알리고 가.”
「…….」
“너 때문에 어수선하니까 와서 정리해. 나까지 엮여서 귀찮게 만들지 말고.”
「도련님….」
“…….”
「만나요.」
“…….”
「도련….」
“너 진짜 또라이 아니냐?”
「…….」
“내가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너를 왜 또 만나?”
「…….」
“그리고 어차피 넌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거 아니었어?”
내 호감은 필요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면서. 라며 덧붙인 태렴의 말에 이우는 짧은 침묵을 고수하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됐어. 난 너랑 더 할 얘기도 없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아.”
「전화 주셨잖아요.」
“뭐?”
「지금 저한테 전화 주셨잖아요.」
할 얘기도 없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지만 전화는 주셨잖아요. 라는 듯한 이우의 말에 태렴이 짧게 혀를 찼다.
“그래. 그러니까 다시는 너한테 연락할 일 없게 게임 들어와.”
「…안 들어가면 또 연락해 주실 건가요?」
“아니.”
「……형, 만나요….」
“꺼져.”
「잘못했어요…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만나주세요….」
“싫어.”
「형….」
“만나면? 내가 널 반 죽일 때까지 패도 되냐?”
「맞을게요.」
“허… 미친 새끼.”
「형….」
“넌 대체 나와 어쩌고 싶은 거야?”
「그건….」
“그래… 전화로 떠들 얘기는 아니지. 대신, 장소는 내가 골라.”
「네.」
태렴이 이우를 만나기 위해 고른 곳은 번화가에 있는 카페였다. 수십 석의 테이블과 수백 명의 사람이 오가는. 하지만 두 사람은 대화의 특성상 조금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그래도 부러 창가 자리를 고집하긴 했지만 말이다.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 시원한 거.”
“주문하고 올게요.”
시키지 않아도 직접 주문을 하러 카운터로 향하는 이우를 바라보던 태렴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제 앞에서는 감정의 한 방울도 내비치지 않으려는 무표정인 주제에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에게 주문하는 이우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웃고 있었다.
황당함에 헛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우는 자신과 둘이 있을 때만 표정을 지우곤 했다. 무감각한 듯, 무관심한 듯, 어딘지 초연한 얼굴. 게다가 말투까지 무미건조하게 변해버린다.
주문을 끝내고 진동벨을 들고 돌아온 이우는 자신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태렴의 시선을 의아하게 바라봤지만, 무표정한 얼굴엔 작은 변화조차 일지 않았다.
음료 외에도 이것저것 디저트가 잔뜩 늘어진 테이블 위를 바라보던 태렴이 황당한 눈을 들어 이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우를 잠시 흘겨보던 태렴은 제 앞에 놓인 커피의 빨대를 입에 물었다. 아직은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얼음이 잘랑거리는 커피는 에어컨을 켜놓은 실내만큼 시원하게 느껴졌다.
“형….”
이우는 저에겐 관심조차 없다는 듯 창밖만 내다보는 태렴을 넌지시 불렀다. 부름과 함께 태렴의 시선이 이우를 향했다. 시선 속에 담긴 경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우는 눈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말이….”
“?”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뭐?”
“제가… 그때 형에게 하려던 말이요.”
“…….”
더듬더듬 내뱉은 이우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태렴은 알 수 있었다. 호감을 바라지 않는다던 이우의 말.
“저는 그냥….”
“…….”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
이우가 하는 말은 언제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태렴의 기준으로 그는 항상 어딘가 핀치가 어긋난 것 같은 언어를 구사했다.
“바랄 수 없으니까… 드리고 싶어서.”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태렴은 횡설수설하는 이우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덕분에 말문이 막힌 이우는 난감한 듯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제 모든 걸 형한테 드리고 싶었어요.”
“뭐를?”
“뭐든지요.”
이우의 말에 태렴은 더욱 기가 막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지, 곱게 포장한 선물을 받은 게 아니었다.
“뭐든지 주고 싶었다고? 그래서 네 멋대로 쑤셔 박았어? 네가 나한테 한 건, 그저 강매 아니냐?”
“그건….”
“게다가 내 의지는?”
“네?”
“네가 준다고 하면 그게 어떤 것이든, 어떤 행위든 나는 그냥 받아들여야만 해?”
“네?”
화가 났지만, 언성을 높이지 않고, 조곤조곤 되묻는 태렴의 말에 이우는 짐짓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건, 상호의 관계가 아니지 않아? 너에 의한 일방적인 관계인 거지. 네 욕심만 채우는 관계. 나를 존중하지 않는.”
“…….”
쉬지 않고 쏟아내는 태렴의 말에 이우는 멍한 얼굴을 했다.
“받아들이는 사람도 의지라는 게 있어. 준다고 무작정 받아야 하는 게,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 나 또한 그런 관계는 받고 싶지 않아, 갖고 싶지도 않아!”
“…….”
“네가 나한테 한 건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넌, 나한테 폭력을 주고 싶었던 거야?”
“그건…!”
“그 행위엔 필수적으로 내 동의가 있었어야 했어. 아니면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가볍게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아, 아닙니다!”
“뭐가 됐든 네 행동은 정당화되지 않아. 내 몸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아도, 네가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은 물을 거야.”
“네….”
“진심으로 사과부터 해.”
“정말… 죄송합니다.”
“…….”
“죄송합니다… 도련님.”
“왜 주고 싶었던 건데?”
“네?”
“호감을 바라지 않는다면서 네 모든 것은 내게 주고 싶었다며. 왜 주고 싶었던 거냐고.”
“…그건.”
“그건 내게 호감을 얻고 싶다는 거 아냐?”
“…….”
거리낌 없는 태렴의 질문에 이우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생각에 잠기거나, 감정을 되짚어가는 얼굴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들킨 듯, 조금 초조하고 난감해 보였다.
“맞아?”
재차 묻는 태렴의 목소리는 전과 달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우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태렴과 눈을 맞췄다.
“호감…보다는 좀 더 무게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런데 너는 내 호감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건 무슨 뜻이었어?”
“주제넘으니까요.”
“뭐?”
“제가 형에게 드리고 싶어 하는 것과는 별개로… 형에게 받는 건, 생각해 볼 수도 없을 만큼 주제넘으니까….”
“그래, 주제넘었네.”
“죄송합니다.”
“너 말이야.”
“네.”
“남들한테 언제나 이래? 주제넘으니까 제 모든 걸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억지로? 그랬으면 감방에 여러 번 다녀왔을 것 같은데? 가족들이나 지인들 보기 부끄럽지 않아?”
“없습니다.”
“뭐?”
“감방에 다녀온 적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뭐?”
“어려서부터 혼자였으니까요.”
“…….”
이우의 덤덤한 답에 태렴은 말을 잃고 말았다. 동정의 여지는 없지만, 꼭 제가 말실수를 한 것만 같은 찝찝함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가정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냐며 비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비난이었다. 동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준다는 행위에 익숙지 않아 일방적인 애정을 밀어붙인 결과라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궁금한 것은 대충 해결했으니,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는 생각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던 태렴은 문득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자리를 뜨려는 자신을 보며 당황한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지금과는 다르게, 항상 제 앞에서 포커페이스인 이유.
“한 가지만 더 묻자.”
“?”
“네 표정은 왜 그래?”
“네?”
“다른 사람들 대할 때는 잘 웃잖아? 아까 주문할 때도 그랬고, 저번에 정모 할 때도 그랬고. 근데 나랑 둘만 있으면….”
태렴은 말을 끝맺는 대신, 손을 들어 이우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의 포커페이스, 얼굴 근육을 하나도 쓰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 이우는 태렴이 가리키는 제 얼굴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못 해요.”
“뭐?”
“형 앞에서는 포장할 여유가 없으니까요….”
초연하게 대답하는 이우의 말에 태렴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럼 그 존재 자체로 집사 같던 모습은 평소에 포장하고 있는 모습이었단 말인가. 지금 자신에게 보여주는 이 모습이 진짜 모습이고? 황당함에 다리가 풀린 태렴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대외적으로 내보이는 얼굴도 제 앞에서만큼은 포장할 여유가 없다는 이우를 멍하니 바라보던 태렴은 문득 테이블 위에 종류별로 늘어져 있는 디저트들에 시선이 갔다. 이것들도 아마, 모든 것을 주고 싶다는 이우의 의사 표현이었을 것이다.
“넌 언제나 말이 부족해.”
***
“꽤 추워졌다.”
숨을 뱉으며 말하는 태렴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뿌옇게 흩어졌다.
“네. 그렇네요.”
1월 한파 속을 걷는 태렴의 뒤를 이우가 따라 걸었다. 그때의 여름 이후로도 두 사람은 여전히 함께했다. 태렴이 이우와 함께 있는 이유는 그저 단순한 변덕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다 받아보면, 그의 것을 모두 빼앗아 보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지는 관계.
“오늘도 사진 찍어도 되나요?”
“일일이 묻지 마. 찍지 말라고 해도 찍을 거잖아.”
“하지만 말이 부족하다고 하셨잖아요.”
모든 것을 제게 주면서도 모든 것을 제게 맞추려는 이우를 보며 태렴은 낮은 한숨을 흘렸다. 모든 걸 제게 맞춰 주는 이우였지만, 사진에 대한 것만은 꽤 확고한 고집을 보였다.
“그나저나, 너 요즘 계속 내 사진만 찍는 것 같은데, 괜찮아?”
“좋으니까요.”
“인물 사진은 안 찍는다더니.”
“인물이 아니라 형이니까요.”
“말은 잘한다.”
“말이 부족하다고….”
“닥쳐.”
“…….”
태렴과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걷던 이우는 문득 앞서 걷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멈췄다. 태렴이 제게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걸 바랄 수도 없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옆에 있다 보면 욕심이란 게 불쑥불쑥 솟아오른다. 허락이 있지 않으면 함부로 닿을 수도 없는 상대방에게, 확신을 주지 않는 상대방에게, 가끔은 마음을 확답받고 싶다는 욕심이.
“형.”
넌지시 부르는 음성에 앞서 걷던 태렴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뒤돌아 물었다.
“왜?”
“…아니에요.”
“싱겁긴.”
주제넘어서 바라지도 못했던 마음을 요구하면 이번엔 간신히 유지한 옆자리조차 잃을지도 몰랐다. 마음을 흘러넘쳐 바닥에 고인 감정은 저를 좋아해달라고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지만, 이우는 그 감정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고인 감정이 썩어,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마음 전체를 오염시켜도 참고, 참고, 또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리는 이우를 바라보던 태렴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엇을 고민하는지 눈에 빤히 보였다. 요즘 들어 그는 종종 무언가를 갈구하는 얼굴로 저를 보곤 했으니까.
하지만 태렴은 이우가 먼저 물어온다고 해도 답을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의 마음이 텅 비었을 때, 모든 것을 제게 내어주었을 때, 그때가 비로소 자신이 최이우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이기 때문이었다.
“가자, 추워.”
“…네.”
태렴은 초조해하며 전전긍긍하는 이우를 조금 더 즐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