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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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동산 입구의 매표소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누구든 넋을 잃게 만드는 신이 빚은 미모의 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한 번쯤은 뒤돌아보게 하는 훈훈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흘긋흘긋 보며 지나가는 시선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한산하네.”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듯 내뱉은 민우의 말에 채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3월이 제일 한가하다고 그랬잖아.”
답해주듯 던진 말에 민우는 잠시 말없이 채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민우의 시선에 채원이 표정으로 묻자, 민우는 피하듯 시선을 돌리며 불퉁하게 물었다.
“자주 와봤어요?”
속내가 명백한 질문에 채원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보여줬다.
○○월드 3월 혼잡 예상도.
“검색은 폼이냐?”
눈앞에 보이는 핸드폰 화면과 웃음기 가득한 채원의 말에 민우는 곧 앓는 소리를 뱉으며 달아오른 제 얼굴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길마님~”
부끄러워하는 민우를 두고 재밌어하던 채원은 멀리서 들려오는 자신을 부르는 듯한 호칭에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파 속을 걸어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채원의 시선이 닿자 그는 곧 손까지 흔들어대며 해맑게 채원에게로 달려왔고, 채원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멈칫거렸다.
“길마님~ 오랜만이에요! 국보급 외모는 여전하시… 옆에는… 설마 제로 형?”
하지만 이내 요란을 떨며 물었고, 민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데… 누구…?”
“와! 나 풍이야!”
“풍이?”
“응! 와하하, 형도 미남이었네!”
첫 만남에 반가워하고 신기해하던 두 사람 사이에 시큰둥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미남 다 얼어 죽었다.”
살을 에는 냉랭한 채원의 반응에 질풍과 민우 둘 다 말을 잃었다.
“그야… 길마님 눈엔… 누구나 오징어처럼 보이겠죠….”
“…….”
“…….”
“나도… 제로 형도… 왕광 형들도… 율이도….”
“내 새낀 아니야, 내 새낀 세상 이뻐. 사랑스러움의 결정체지. 세상 그렇게 사랑스러운 생물체는 있을 수가 없어!”
하지만 질풍의 말에 반박하듯 채원은 성을 내며 율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궁금해지네… 율이가….”
“막내? 이쁘고 귀엽지~ 소동물 같기도 하고.”
호들갑을 떠는 채원의 모습에 민우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민우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질풍도 채원도 아니었다. 민우의 어깨 뒤에서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모두는 다 같이 뒤를 돌아봤고, 두세 걸음 뒤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새카만 긴 생머리의 여성이 보였다.
“헬로우 에브리원.”
익숙한 인사말.
“세츠…?”
얼굴은 모르지만, 그녀가 건네는 익숙한 인사말에 민우가 의아한 듯 되묻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도착 이후로 니지, 집사, 도련, KING Husband, 광인한 남자가 차례차례 도착했다. 그렇게 속속들이 도착하는 길드원들을 바라보던 채원은 아까부터 풀리지 않는 의문 한 가지를 던졌다.
“정확한 위치도 안 알려줬는데, 어떻게 다들 이렇게 잘 찾아오지?”
모두의 시선이 채원에게 향했고,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100미터 밖에서부터 후광이 보여요.’라고.
“율이랑 노아는 아직인 건가?”
꽤 눈에 익은 인원들이 모인 가운데, 도착한 이들을 세어보던 채원이 넌지시 물었고, 채원의 물음에 덩달아 모두를 훑어보던 태렴이 답했다.
“그런 것 같아요.”
두 사람의 대화에 모두 서로의 얼굴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하던 생각을 왕광풍이 입 밖으로 내주었다.
“그나저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이네.”
이건 KING Husband.
“뉴 페이스는 제로 형이 다인 듯?”
이건 질풍.
“1차 정모 때의 아쉬움을 풀어줄 인원인데?”
이건 광인한 남자.
대화의 랠리를 이어 가는 세 사람의 모습 뒤로 눈에 띄는 인파의 움직임이 일었다. 그리고 그 인파의 중심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권율이라는 사람을 모르는 타인들이 보기에는 율보다는 율의 옆에서 걷고 있는 장신의 사내가 단연 돋보일 것이다. 그 증거로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멈춰 서거나 뒤돌아서서 홀린 듯 시언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은 인파 속에 섞여오는 한시언이라는 사람보다는, 그 옆에 있는 권율이라는 사람에게 시선을 모았다.
시언과 걸어오던 율은 멀지 않은 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보조개가 파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에 반응한 듯 채원이 황홀한 얼굴로 두 팔을 벌리고, 율을 부르며 달려왔다.
“내 새~”
“비켜요!”
“비켜욧!”
“끽?”
하지만 채원은 뒤에서 밀치는 힘에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며 넘어졌고, 채원을 밀쳐낸 두 사람인 세츠나와 니지는 한달음에 달려 율을 맞이했다.
어느덧 율의 근처에 모인 길드원들은 채원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밀쳐진 덕에 바닥에 쓰러진 채원은 허망하게 그들을 바라보다 저에게 내밀어지는 누군가의 손에 삐걱삐걱 시선을 움직였다.
“…….”
채원의 눈앞에는 제게 손을 내민 민우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멍하니 민우를 올려다보던 채원은 미간을 슬쩍 구기고는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서둘러 율에게 달려갔고, 민우는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채원의 뒤를 따랐다.
“우리 막내~ 못 본 사이에 뭔가 더 뽀송뽀송해졌는데?”
“살이 좀 붙은 것 같기도 하고?”
채원을 밀치고 한달음에 달려 율에게 다가온 세츠나가 율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뱉은 말에 니지도 거들고 나섰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에 율이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자 달려오던 채원이 심장을 움켜쥐고 휘청거렸다.
“큽… 내 새끼 웃는 거 봐… 심멎.”
채원을 포함, 율의 주변에서 유난을 떠는 길드원들을 말없이 바라보던 시언은 무리 속에 섞여 있는 생소한 얼굴 하나에 그를 뚫어지라 쳐다보다 말을 건넸다.
“혹시… 제로?”
율에게 쏠려 있던 관심이 중저음의 물음 하나에 몽땅 두 사람에게 쏠렸다. 정신없이 관심 세례를 받던 율도 그제야 민우를 발견했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민우를 바라봤다. 난데없는 시선 폭격에 잠시 당황한 민우는 시언과 율을 번갈아 바라보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이 2차 정모 장소로 고른 곳은 놀이동산이었다. 제안한 것은 질풍이었는데,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미치도록 놀아보자는 취지였다. 결국, 만장일치로 장소가 발탁되고, 3월이 제일 한가하다는 채원의 주장으로 정모 날짜를 잡았다.
“첫 번째는 역시 신드바드지!”
“에이… 화끈한 거부터 해요!”
“안 돼! 신드바드를 타줘야 시작! 이라는 느낌이 있다고!”
“경로우대 해드려라, 경로우대.”
입장하자마자 첫 번째로 탈 기구를 두고 채원과 질풍의 팽팽한 경쟁을 붙었다. 채원은 무조건 처음은 신드바드를 타야 한다는 주의였고, 질풍은 제가 타고 싶은 놀이기구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둘 사이를 가르고 들려온 태렴의 목소리에 여론은 채원의 손을 들어줬다.
채원의 요구대로 신드바드를 타러 걸음을 옮긴 모두는 한산한 놀이동산 덕에 대기 없이 바로 기구를 탈 수 있었다. 시작부터 율의 옆에 앉겠다고 못 박은 채원은 한 줄에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기구에 만족하며 어려움 없이 율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구가 움직이자 당연하다는 듯 시언 쪽으로 몸을 기울인 율이 시언과 어트렉션을 즐기는 사이 채원의 입은 서운함으로 닷 발은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제 화끈한 거 타요!”
“화끈한 게 뭔데….”
신드바드를 타고 나와서 다음 기구를 추천하는 질풍의 행동에 율과의 오붓한 시간에 실패해 풀이 죽은 채원이 시큰둥하게 묻자 질풍은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레볼루션 타러 가요!”
그리고 뚱하게 질풍의 말을 듣던 채원은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뭣?”
사색이 된 채원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모두는 레볼루션을 타기 위해 2층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동안 굳어 있던 채원은 기구의 입구에 도착하자 더듬더듬하며 말을 꺼냈다.
“위… 위험하지 않을까?”
“뭐가요?”
채원의 말에 질풍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되묻자, 채원은 허둥지둥거리다 퍼뜩 제 뒤에 서 있는 율을 가리켰다.
“아니… 이런 건… 그, 그래! 율이, 율이 괜찮니? 무섭지 않겠어?”
“네? 네! 전 기대돼요!”
“어… 그러니….”
하지만 율은 예상외로 너무 해맑게 답했고, 채원은 다시 안절부절못하다 이번엔 제 앞에 서 있는 세츠나와 니지를 가리켰다.
“그… 저… 세, 세츠랑 니지는?”
“개잼.”
“꿀잼.”
하지만 그녀들은 쿨했다. 사색이 되었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세상 무너진 얼굴로 넋이 나간 채 서 있는 채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우가 넌지시 물었다.
“솔직히 말 해봐요.”
“뭐… 뭘?”
“형이 무서운 거죠?”
“뭣? 그, 그럴 리가… 하하, 이상한 말을 하네.”
흙빛으로 변했던 얼굴이 이번엔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어색한 웃음과 함께 국어책 읽듯 대답한 채원이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기 시작하자, 모두의 눈이 먹잇감을 감지한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결국, 그들이 신나서 탑승한 기구는 연신 누군가의 비명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흑… 흐윽…… 읏….”
고운 얼굴에서 연신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진주알 같은 눈물이 손과 무릎을 적셨다. 주체 못 하는 슬픔에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이 눈가를 스쳤고, 몽글몽글 샘솟던 눈물방울이 개화하는 꽃처럼 피어올라 흩어졌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모두는 감당 못 할 충격에 빠져들었다. 처음 본 채원의 우는 모습이 너무 가련하고, 또 청초해서…… 그래서 한 번 더 태웠다.
“이 악마 새끼들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이 기구의 소음에 섞여 주변을 왕왕 울렸다.
결국, 타고 싶지 않던 레볼루션을 억지로 한 번 더 타고 나온 채원은 눈물 콧물이 흥건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모두를 노려봤다.
“흡… 너희들이 사람이야?”
“아니, 길마님 우는 게 너무 예뻐서….”
“가학심을 자극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빽 질러진 채원의 고함에 세츠나와 니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대답에 채원은 자신의 몸을 부둥켜안고, 질렸다는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모두를 훑어봤다.
“가, 가학이라니…? 너희는… 너희는 동심이 부족해!”
이어 분노한 채원은 동심을 키워야 한다며 모두를 끌고 아일랜드로 향했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얌전히 어드벤처를 벗어나 아일랜드로 향하는 다리 위로 나온 모두는 불어오는 칼바람에 어깨를 움츠리고 옷깃을 여미기에 바빴다.
선두로 달리듯이 다리를 건너가던 왕광풍은 다리 끝에 보이는 가판대를 보더니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가 가판대 앞에 섰다. 그리고 이것저것 살펴보다 가판대 직원의 손에 들린 장난감에 눈을 빛냈다.
게임에서도 둘이 모여 앉아 사냥보다는 수다를 많이 떠는 세츠나와 니지는 얼굴을 맞대고도 무슨 할 얘기들이 그리 많은지 연신 수다 삼매경이었다. 그런 그녀들의 수다를 멈추게 한 건 다리 끝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왕광풍,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허리에 손까지 얹고, 나란히 서서는 업신여기는 표정으로 세츠나와 니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들의 행동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들이 다리를 마저 건너기 위해 왕광풍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사건은 일어났다.
“하지 마! 하지 마, 이씨!”
“화장, 화장! 머리!”
수문장처럼 다리의 끝에서 진을 치고 세츠나와 니지를 기다리던 왕광풍은 가판대에서 산 비눗방울 장난감을 두 사람에게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낄낄거리며 이상한 몸짓까지 섞어 연신 쏘아댄 비눗방울들이 세츠와 니지의 얼굴과 머리에 닿아 속수무책으로 터지고 있었다.
“하지 마! 성질 뻗쳐서 정말!”
“미친자들아!”
연신 자신들의 화장과 드라이한 머리를 사수하기 위해 피해 뛰어다니던 그녀들의 외침이 다리 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멀리서 다섯 명의 아비규환을 지켜보던 시언은 슬슬 멈추지 않으면 꽤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하지 말라며 세 사람이 쏘아대는 비눗방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세츠가 가판대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진열된 장난감 검을 엑스칼리버처럼 뽑아 들었다. 이어, 긴 머리를 칼바람에 휘날리며 미친년처럼 세 사람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찰지게 타격하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시원하게 뻗어 나가고, 혼비백산한 세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다니기 시작했다.
“악! 누나!”
이건 KING Husband.
“아파, 아파!”
이건 광인한 남자.
“잘못했어요! 잘못…!”
이건 질풍.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길드원들의 눈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가판대 직원이 달려 나와 세츠나를 말리는 모습이 보였다.
“손님! 검은 찌르는 거예요!”
라고 외치며.
직원이 세츠나를 말리기 시작하자, 구경하던 길드원들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겨우겨우 날뛰는 그녀를 말리고, 엑스칼리버에 매타작을 당하고 널브러진 왕광풍을 일으켜 세우는 사이, 채원은 조용히 가판대 직원에게 세츠나가 지불하지 않은 엑스칼리버의 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사태를 정리하고, 세츠나와 니지가 화장과 머리를 손본다며 화장실에 간 사이, 근처에 모여 있던 길드원들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우는 시늉을 하는 왕광풍을 떨떠름하게 내려다봤다.
“흑흑, 세츠 누나 너무 폭력적이에요.”
이건 KING Husband.
“엉엉, 현피 뜨는 줄 알았다고요.”
이건 질풍.
“으엉, 동심이라고는 1도 없는 인간 같으니.”
이건 광인한 남자.
채원이 말한 기구를 타기 위해 지하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길드원들은 싸하게 밀려오는 불안한 기운을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고 지하에 도착해 기구의 실체를 본 후, 입을 쩍 벌리고야 말았다.
전방에 커다란 삐에로의 얼굴이 보였다. 그 삐에로의 커다랗고 하얀 이가 입구인 듯 바닥에 설치된 레일이 입속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주변은 동화에 나올 법한 구조물과 장식품들이 즐비했고, 빨간색 기차가 레일 위에서 탑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애들이 타는 거 아니에요?”
다들 황당함에 모두가 굳어 있는 사이, 태렴이 주변을 가리키며 채원에게 물었다.
“너희가 애들이지.”
하지만 채원은 덤덤하게 말하며 율이를 데리고 기차에 올랐다. 앗, 하는 사이 채원에게 율이를 빼앗긴 시언은 그 뒷자리에 민우와 함께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란히 앉은 장신의 두 남자는 왠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취학 아동들이 좋아할 만한 동화의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놀이기구를 타면서 시언은 제 앞자리에 앉은 율의 머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고, 민우는 그런 율의 옆에서 기뻐 보이는 채원을 바라보며 웃었다.
기구가 끝나고 출구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길드원들의 대다수가 툴툴거렸다. 어린이용 기구를 타고 나온 게 영 맘에 들지 않는 듯 똥 씹은 표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율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던 채원은 만족스러웠는지, 더욱 짙은 후광을 발하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후광을 발하던 채원은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는 느낌에 뒤를 돌았다. 채원의 뒤에는 또다시 칼바람에 긴 머리를 휘날리는 세츠나가 서 있었다.
“…….”
왠지 흉흉해 보이는 세츠나의 모습에 채원은 절로 뒷걸음질 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잔뜩 치켜세워진 세츠나의 눈이 채원을 올려다보자 히익, 하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주변엔 긴장감이 맴돌며 세츠나와 채원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불쑥, 채원의 앞으로 세츠나의 손이 뻗어 들어왔다. 채원은 세츠나가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고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채원의 눈앞에 들이밀어 진 건 엄지를 치켜세운 손이었다.
“길마님 배우신 분.”
“으… 응?”
“한 번 더 타죠.”
이어진 세츠나의 말에 호기심 어렸던 모두의 얼굴은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듯 뜨악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감동으로 얼룩져 울먹거리는 채원을 빼고.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팔짱을 끼고, 기구를 한 번 더 타러 향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중, 갑작스레 시언이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시언의 웃음소리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도 한데, 길드원들 누구도 시언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의 뒤를 쫄랑쫄랑 쫓아가기 시작한 율의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과 함께 앞서 걷는 세 사람의 뒤를 따를 뿐.
율의 행동에 동화되어 기구를 한 번 더 타고 나온 길드원들은 다음 놀이기구는 무엇을 탈 것인지를 논하기 시작했다. 그런 길드원 사이에 껴있던 율은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에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와플을 팔고 있는 가판대가 보였다. 한참 와플을 바라보던 율은 제 옆에 서 있는 시언의 소매를 주욱, 당기며 시언을 불렀다.
“형.”
율의 행동에 시언을 포함한 모든 형이 율을 바라봤다. 하지만 율의 시선은 시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을 잡아끄는 율의 행동에 시언이 시선을 내리며 표정으로 묻자 율은 손을 뻗어 와플 가게를 가리켰다.
그러자 시언을 포함한 모든 길드원의 시선이 율의 손끝을 따라 와플 가게로 향했다. 잠시 와플 가게를 바라보던 시언이 다시 율을 보며 물었다.
“먹고 싶어?”
다정한 물음에 율은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율의 요구에 길드원들은 모두 와플을 하나씩 사서 벤치에 앉았다. 채원과 율이 한 벤치에 앉고 민우와 시언은 벤치의 앞에 섰다. 옆 벤치들엔 태렴과 이우, 세츠나와 니지, 왕광풍이 짝을 지어 앉았다.
한참 수다를 꽃피우며 와플을 먹어 치우던 중, 왕광풍의 앞에 비둘기 몇 마리가 날아와 주변을 배회했다. 그 모습에 질풍이 와플의 모퉁이를 조금 잘라 비둘기들에게 던져주었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몇 마리의 비둘기가 더 날아와 몰려들었다. 숫자가 늘어나자 왕광도 와플을 떼어내 바닥에 뿌렸다.
어느덧 꽤 많은 수의 비둘기들이 왕광풍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중엔 참새들도 섞여들었다. 세 명은 일사불란하게 와플을 떼어내 바닥에 뿌렸다.
어느덧 비둘기의 대군이 탄생해 있었다. 그리고 이 학습 능력 없는 비글 세 마리는 그 비둘기의 대군을 이끌고 세츠나와 니지에게 달려들었고, 그 모습에 놀라 괴성을 지르던 그녀들이 냅다 던진 와플에 장렬하게 얻어맞았다.
물론, 세 명을 모두 맞추기 위해 옆 벤치에 앉은 이우의 와플까지 뺏어서 던진 덕에 이우는 텅 비어 버린 제 손을 허망하게 내려다보게 되었지만.
나온 김에 아일랜드에 있는 놀이기구를 섭렵하고 다시 어드벤처로 되돌아온 그들은 그대로 4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원하는 놀이기구의 입구를 찾아 입장했다.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이 놀이기구의 탑승 정원은 8명이었다. 그들은 적당하게 팀을 나누고, 차례차례 기구에 올랐다.
민우, 채원, 니지, 세츠나가 한 줄. 그 뒷자리엔 시언과 율만이 앉게 되었다. 채원은 율의 옆에 앉고 싶다고 징징댔지만, 민우에게 붙잡혀 억지로 그의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구가 출발하고, 민우는 더욱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 놀이기구는 레일 위를 달리는 지프차를 타고, 내부와 외부를 들락날락하며 움직이는 형식이었는데, 외부로 나올 때면 꽤 높은 위치에 설치된 길을 달리기 때문에 차가 바깥쪽으로 기울거나 흔들거리면 꽤 아찔한 느낌을 주게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민우의 옆에 앉은 채원이 야단법석을 부려댔다.
“끄악! 높아!”
외부로 나와 들썩거리는 차체가 기울며 아찔하게 보이는 높이에 채원이 요란을 떨며 옆 사람에게 엉겨 붙었다. 물론, 민우가 아닌 니지에게. 그러면 니지는 자신에게 들러 붙어오는 채원에게 질색하며 그를 밀어내기 바빴다.
“왜 이래요! 사랑에 빠지겠네!”
라고 외치며. 자신이 아닌 니지에게 자꾸 달라붙으려 하는 채원을 바라보던 민우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이 모든 걸 뒷좌석에서 지켜보던 시언과 율은 재미난 광경에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기구가 끝나고, 출구로 나오는 길에 모니터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모니터 안엔 마지막 내리막길에서 찍힌 듯한 사진이 보였다.
아예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민우와 바람결에 올백 머리를 한 채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 니지, 칼바람을 맞은 듯 사방으로 흩날리는 머리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세츠나와 감흥 없는 얼굴로 앉아 있는 시언, 마냥 신나 보이는 율까지.
그리고 바람결에 흩날리는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살짝 내리깐 눈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채원은 여전히 국보급의 신이 빚은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전체적인 사진마저도 포커스는 채원에게 맞춰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와, 우리 이거 현상해요!”
사진을 구경하던 율이 시언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마냥 들떠 보이는 율의 말에 채원이 쏜살같이 달려나가 직원에게 현상 요청을 했고, 곧 6장의 사진을 현상해 모두의 손에 들려주었다.
자신들의 다음으로 타고 나오는 왕광풍과 태렴, 이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던 모두는 1층에서 한창 퍼레이드 준비를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시작하기 전에 얼른 내려가서 좋은 자리 맡아두죠.”
그리고 넌지시 던지는 민우의 말에 모두는 태렴 일행과 합류한 후, 서둘러 1층으로 향했다. 확실히 날을 잘 고른 건지 퍼레이드를 보려는 인원도 그리 많지 않아서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은 손쉽게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얼른 퍼레이드가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율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시언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래?”
“목이 말라서… 근처에 물 먹을 만한 데가 없을까요?”
여전히 두리번거리며 답한 율의 말에 모두가 덩달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실 거리랑 주전부리 좀 사 올까? 퍼레이드 시작하기 전에 얼른 사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함께 주변을 살피던 KING Husband의 말에 모두의 행동이 일제히 멈췄다.
“그러자, 내 새끼 목마르다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좀 출출하기도 하고.”
KING Husband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뱉은 채원의 말에 민우도 동의하듯 말을 보탰고, 민우의 말에 채원이 사색이 된 얼굴로 버럭버럭 외쳤다.
“뭣? 우리 밥도 안 먹었나? 내 새끼 굶겼어!”
그리고 우사인 볼트보다 빠르게 근처 상점으로 달렸다. 혼자 폭주해 달려 나가는 채원의 뒤를 민우가 허겁지겁 따랐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시언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세츠랑 니지는 율이랑 여기서 자리 지키고 있어. 나머지는 나랑 같이 가고.”
시언의 말에 알았다는 듯 세츠나와 니지가 손을 흔들었고, 나머지는 군말 없이 시언의 뒤를 따라 채원이 향한 상점으로 향했다. 왠지 자신의 말에 길드원들이 대규모 이동을 하는 것 같아, 율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율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니지가 가방 안에서 물이 담긴 보틀을 꺼내 율에게 내밀었다. 해맑게 웃으며 물을 건네는 니지의 행동에 율과 세츠나, 둘 다 말을 잃었다. 오지 않는 길드원들을 기다리던 세 명의 눈에 멀리서 퍼레이드 행렬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오, 시작하나 봐.”
“이 인간들 왜 안 와.”
“와….”
퍼레이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니지와 율을 두고, 세츠나는 길드원들이 서 있는 상점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율은 니지가 건네주는 물을 먹은 후였고, 저 위치에서도 퍼레이드는 잘 보일 테니 별다른 걱정은 없겠다고 생각한 세츠나가 시선을 돌렸을 때, 웬 남자 두 명이 저와 율 사이에 버젓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키 큰 놈 하나, 키 작은 놈 하나.
“뭐야?”
날카롭게 지른 세츠나의 목소리에 눈앞을 가로막은 남자 중 한 명이 흘끗, 뒤를 돌아보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이번엔 니지가 자신들의 앞에 선 남자들의 등을 툭툭 쳤다. 그러자 남자들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뒤를 돌았다.
“뭐!”
걸걸한 목소리가 적반하장으로 되묻고 나섰다. 그 행태에 기가 막힌지, 니지도 미간을 와작 구긴 채 물었다.
“그건 우리가 할 말이죠. 뭐 하는 거예요?”
“퍼레이드 보려는 게 안 보여?”
자신들을 무시하듯 건들건들하고, 비아냥거리는 듯한 남자들의 말투에 세츠나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우리 서 있는 거 안보여요? 냅다 끼어들어서 뭐하시는 거냐고요.”
“우리가 언제 끼어들었어? 우리 원래 여기에 서 있었어.”
“뭔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지랄… 난리예요?”
제 성질에 못 이겨 육두문자를 내뱉고, 얼버무린 세츠나의 말에 두 남자는 오히려 그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지랄? 넌 뭔데 대뜸 욕지거리야? 불만 있으면 너희가 다른 데 가면 될 것 아니야!”
“아가씨가 뭔가 오해한 모양인데, 이 앞에 서 있는 게 우리 일행이야. 우리 일행이 우리 자리를 맡아주고 있는 거였어!”
이어 쏘아붙인 남자의 말에 세츠나와 니지는 두 남자의 일행이라는 사람을 바라봤다.
“…….”
“…….”
있는 건 율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시선을 눈치라도 챈 건지 두 남자는 멀뚱히 서 있는 율을 끌어와 자신들의 사이에 세우고 짓누르듯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 키 작은 놈이 율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제 딴에는 속삭였다고 했겠지만, 세츠나와 니지의 귀에도 다 들릴 정도였다.
“야, 좋은 말할 때 일행인 척해라.”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당연하듯 늘어놓고, 율에게 강요하는 두 남자의 작태에 절로 성질머리가 튀어나왔다.
“이 씨바… 윤회하고 싶나.”
“뭐?”
“뭐?”
이를 갈 듯 내뱉은 세츠나의 말에 두 남자가 흉흉한 기세로 노려보며 되물었다. 그리고 그중 키 크고 삐쩍 마른 놈이 한발 앞서 나오며 세츠나를 위협하듯 말했다.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뭐! 이 키 큰 멸치 같은 새끼야.”
“뭐?”
세츠나의 말에 멸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한 멸치 대신, 옆에 서 있던 키 작은 놈이 한발 앞서 나오며 언성을 높였다.
“네년이 지금 뭐라고 했냐?”
세츠나에게 년 운운하며 튀어나온 키 작은 남자의 행태에 이번엔 니지가 한발 앞서며 말했다.
“뭐야, 이 키 작은 두꺼비는.”
니지의 말에 두꺼비의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두꺼비는 니지에게 함부로 덤빌 수가 없었다. 두꺼비의 키는 세츠나보다 조금 큰 수준이었는데, 세츠나의 키가 163인 걸 생각하면 끽해봐야 165 정도 되어 보였다. 하지만 니지의 키는 172.
찍어 누르듯 내려다보는 그녀의 포스에 눌려 두꺼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댔다. 그런 두 남자의 행동에 세츠나와 니지가 한발 내디디며 거리를 다시 좁혔다.
“새끼들이 지식이 없으면 개념이라도 있고, 개념이 없으면 매너라도 있어야지?”
“어휴, 언니 저놈들 꼬락서니를 봐. 애당초 지식이란 걸 담을 뇌가 있었겠어?”
그리고 신랄하게 내뱉은 세츠나의 말에 니지가 비아냥거리며 거들고 나서자 세츠나가 한심하단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봤다.
“그러네. 내가 너무 과대평가했네.”
“쟤들한테 머리는 그냥 머리카락 심는 화분일 뿐이지.”
“비료는 충분하겠네. 입으로 똥을 싸고 있으니.”
“그래서 그런가? 머리통이 남들보다 커 보이는 게?”
“쑥쑥 자랐네. 쑥쑥.”
“면적이 넓으니 머리카락이 풍성하겠네. 탈모는 걱정 없겠다.”
“탈모가 와도 놀리기 아까운 훌륭한 자연환경 아니냐.”
“오, 면적이 넓어서 뭘 심든 풍작이겠네.”
“존나, 벼농사 지으면 가을마다 천연 금발이다.”
“탈색에 염색 비용 굳었네.”
막힘없이 대화의 랠리를 이어가던 세츠나와 니지 사이로 경쾌한 박수가 울려 퍼졌다. 어느샌가 퍼레이드보단 그녀들을 구경하던 주변 사람들도 박수 소리의 근원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그 근원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멸치와 두꺼비 사이에 끼어있던 포메라니안이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갑작스레 자신들의 사이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한 율의 행동에 잠시 당황했던 멸치와 두꺼비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서둘러 율의 손을 막았다.
“하하, 이 자식은 왜 갑자기 박수를….”
“하하, 그러게. 하하하.”
멸치와 두꺼비는 국어책 읽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눈치를 살폈다.
“누나들 아는 분이세요?”
하지만 멸치와 두꺼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 사이에 끼어있던 율이 해맑게 웃으며 세츠나와 니지에게 물었고, 의문을 담은 네 명의 시선이 동시에 율에게 향했다. 말보단 표정으로 묻는 시선들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율은 난감한 듯 눈썹을 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모르는 분들이라… 누나들하고 아는 사이인 줄 알았어요.”
“이런 멸치 몰라.”
“저런 두꺼비 몰라.”
이어진 그녀들의 대찬 부정에 율이 놀랍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럼 이분들이 말씀하시는 일행은 누구인 거예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율의 말에 잠시 멍했던 세츠나와 니지는 참을 수 없는 비소를 떠올리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게~ 대체 누굴 말하는 걸까?”
“공상의 일행을 가지셨나?”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니지와 대화를 주고받던 세츠나는 무언가를 크게 깨달은 듯 과도한 리액션으로 율의 양옆에 서 있는 멸치와 두꺼비를 가리켰다.
“설마! 우리 막내보고 일행이라고 한 건 아니겠지?”
“엑! 그럴 리가?”
세츠나의 말에 동조하듯 니지도 과도한 리액션을 선보인 후, 말도 안 된다는 듯 제 입가를 틀어막고 멸치와 두꺼비를 바라봤다. 그리고 주변 사람 모두 들으라는 듯 두 사람이 입을 한데 모아 크게 소리쳤다.
“우리 막내인데?”
그녀들의 말에 주변은 찬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 왠지 퍼레이드 행렬까지 멈춰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삽시간에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아 버린 멸치와 두꺼비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분위기에 억눌린 멸치가 외쳐선 안 될 말을 외쳐버리고 말았다.
“내, 내가 누군지 알아? 너희!”
버럭 내지른 멸치의 외침에 두꺼비까지 콧김을 뿜을 것 같은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세츠나와 니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세상 한심한 것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멸치와 두꺼비가 불안함을 느껴 갈 때쯤, 니지가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어멋! 여기 이분이 누군지 아시는 분?”
……침묵.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침묵이 이어지고, 주변을 훑어보던 니지가 과도한 리액션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외쳤다.
“어멋! 아무도 모르시는데?”
그녀의 말에 주변에서 산발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터진 웃음은 곧 전염되듯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퍼레이드 행렬 중에서도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결국, 얼굴이 벌게진 멸치와 두꺼비가 율에게 어깨동무하고 있던 팔을 풀고 신경질적으로 율을 밀쳐냈다. 앗, 하는 사이 밀쳐진 율은 비틀거리며 한두 걸음 걷는가 싶더니 대번에 바닥에 쓰러져 옆으로 대굴대굴 굴렀다.
율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지켜보던 모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왜 앞으로 밀었는데 옆으로 구르니? 그리고 모두가 율의 행동을 이해하기도 전에 쏟아져 날아온 음식 세례가 멸치와 두꺼비의 얼굴을 장식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츄러스에 소세지, 구슬 아이스크림, 구운 옥수수 등 다양하게 날아든 먹음직한 먹거리가 공중을 수놓으며 멸치와 두꺼비의 얼굴에 찰진 소리와 함께 안착했다. 그리고 여전히 손에 다양한 먹거리를 든 시커먼 사내들의 등장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멸치와 두꺼비를 처단하기 시작했고, 모두는 퍼레이드보다 짜릿한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율아.”
아비규환 속에 여전히 바닥을 굴러다니던 율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내밀어지는 손을 바라보며 시선을 올렸다. 시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시언의 등장에 울먹거리며 냉큼 몸을 일으킨 율은 시언의 허리춤을 껴안듯 매달렸다. 율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한 시언은 서둘러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언이 겁먹었을 율을 위해 다정하게 그를 위로하는 동안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세츠나와 니지는 멍하니 서 있다 감동받은 얼굴로 열정적인 박수를 보냈다.
내숭이란 스킬을 몸에 익힌 막내를 위해.
***
“난 내 새끼랑 탈 거야.”
기구의 순서를 기다리며 또다시 율과 기구를 타겠다고 떼 아닌 떼를 쓰는 채원의 행동에 민우는 낮은 한숨을 흘리며 포기한 듯 말했다.
“…그래요 그럼. 노아네랑 같이 타면 되겠네.”
민우의 말에 채원은 신이 난 듯 율을 끌어안고 난리를 부렸지만, 시언과 민우의 표정은 영 탐탁지 않아 보였다.
“난 이우랑 둘이 탈게.”
그리고 이어진 태렴의 말에 모두 별 반응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외적으로는 평소와 다를 게 없이 서로를 대하기 때문에 모두가 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사이좋은 두 사람이었다.
“누나들은 우리랑 타자!”
신나서 외친 질풍의 말에 세츠나와 니지는 끔찍하단 표정으로 마구 손사래를 쳤다.
“미쳤냐!”
“꺼져! 우리도 둘이 탈 거야!”
전심전력으로 거절을 하는 그녀들의 행동에 질풍은 잠시 시무룩해졌지만, 왕광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이채가 감돌았다. 그리고 차례가 된 세츠나와 니지가 기구에 오르는 순간, 왕광풍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고, 아우성치는 그녀들의 맘도 모른 채 열기구 모양의 기구는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라 유유히 출발해 버렸다. 괴성이 오가며 천천히 멀어져 가는 열기구를 바라보며 다들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저기서 한두 명 정도는 추락하는 거 아닐까.’
세츠나 일행 다음으로 태렴과 이우가 기구에 오르고, 차례를 기다리던 시언 일행도 열기구에 올랐다. 그리고 열기구가 공중에 올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채원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아 기구의 모퉁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모두는 그런 채원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민우는 난감해 보이는 시언과 율에게 신경 쓰지 말라며 손사래를 쳐주었고, 채원의 옆에 덩달아 쭈그리고 앉았다. 그런 민우의 행동을 바라보던 시언과 율은 열기구의 한쪽 끝으로 다가가 섰다.
겨울의 짧은 해가 사라지고, 어둠이 깔린 시간에 걸맞게 놀이공원 내부는 사방을 밝힌 불빛들이 천장과 바닥을 빼곡히 채우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재밌었어?”
한창 주변 구경에 넋이 빠져 정신없이 구경하던 율은 옆에서 넌지시 물어오는 물음에 시선을 돌렸다. 시언이 다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에 율이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놀이공원에 온 거,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래?”
“네, 형은요?”
대답과 함께 되물어오는 율의 질문에 시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간을 역행해 가며 되돌아봐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놀이공원에 왔던 때가 상당히 오래전인 것 같았다. 아마도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나도. 게다가 국내에선 처음인 것 같은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중얼거리듯 말한 시언의 답에 율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응? 응.”
놀라 묻는 자신의 말에도 대수롭지 않은 시언의 반응에 율은 멍하니 시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조금 더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다음에 또 와요.”
“응?”
“저랑 또 와요.”
그리고 이어진 율의 말에 시언은 웃으며 그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채원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민우는 창백하게 변한 채원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낮은 한숨을 흘렸다.
“높은데 무서워하면서 이건 뭐하러 타.”
“무, 무서워하긴 누가….”
채원의 얼굴은 누가 봐도 눈치챌 만큼 창백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오기를 부리는 모습에 민우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지금 일어나지도 못하잖아요.”
“…….”
채원은 민우의 말에 이렇다 할 반박도 하지 못하고, 다시 구석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채원의 행동에 민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에 덩달아 채원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지만, 말없이 몸을 일으킨 민우는 채원의 뒤에 서서 열기구의 난간을 쥐고 모퉁이에 서서 그를 가두듯이 내려다봤다.
“우선은 좀 일어나 봐요.”
“뭐?”
“계속 그러고 있으면 탄 의미가 없잖아요.”
“내 새끼랑 탄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해.”
“그 형 새끼는 형 신경도 안 쓰는데요?”
고개를 까딱이며 던진 민우의 말에 채원은 슬그머니 뒤돌아봤다. 율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언과 찰싹 붙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
그 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뚱해진 마음에 민우를 노려보자 민우는 낮은 한숨을 흘리며 손을 내밀었다.
“어두워서 마냥 무섭진 않을 거예요. 나름 볼만하니까 일어나 봐요.”
달래듯 건네진 말에 채원은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아까부터 연신 뒤를 돌아보며 민우와 채원을 흘끗거리는 율의 행동에 시언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시언의 시선을 모르는지, 율은 여전히 뒤쪽의 두 사람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율아?”
의아한 마음에 율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순식간에 고개를 돌리며 가까워진 율의 얼굴이 재빠르게 자신의 볼에 입술을 찍고는 떨어져 나갔다.
“…….”
갑작스러운 율의 행동에 놀란 시언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우는 율의 빨갛게 달아오른 귓가를 바라보다 급하게 시선을 돌려 등 뒤에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보이는 건 민우의 등뿐이라 알게 모르게 안심을 한 시언은 여전히 딴청을 피우고 있는 율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순식간에 뻗어 나간 시언의 큰 손이 딴청을 피우는 율의 뒷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돌리게 했다. 앗, 하는 사이 끌려온 율은 그대로 포개어지는 시언의 입술에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악!”
뒤에서 질러진 고함 같은 비명만 없었으면.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급하게 입술을 떼어내고 뒤를 돌아봤을 때, 보이는 건 당황한 민우의 얼굴과 경악으로 가득 찬 채원의 얼굴이었다.
“두, 두 사람… 무… 뭐?!”
희게 뜬 눈으로 경악을 담아 묻는 말과 벌벌 떨리는 손끝이 시언과 율을 향했다.
“…….”
“…….”
하지만 한껏 당황한 채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기어이 채원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크흡… 내, 내 새끼가… 이… 이게 무슨!”
그리고 또다시 옥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당황한 모두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이를 악문 채원이 시언에게 달려들었고, 네 명이 탄 열기구 안은 금세 아비규환에 빠졌다.
고성이 오가며 날뛰는 사정도 모른 채, 길드원들이 탄 열기구는 유유히 정해진 루트를 평화롭게 돌 뿐이었다.
***
“길마님은 왜 저래?”
하얗게 불태운 얼굴로 민우에게 부축 당해 기구에서 내리는 채원의 모습에 먼저 도착해 있던 질풍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왠지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는 네 사람을 훑어보던 태렴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물었다.
“싸우기라도 했어?”
날카로운 태렴의 말에 넋이 나간 채원을 제외한 모두가 흠칫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싸웠다’라고 한다면 그래 보일 수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실상은 한 명에 의해 한 명이 추락사할 뻔했다는 것이지만.
결국, 시간상 열기구를 마지막으로 해산한 길드원들은 헤어지는 순간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해 비틀거리는 채원이 민우에게 부축 당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고, 그 뒷모습을 편치 않은 심정으로 지켜보던 시언과 율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