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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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러 갈까?-
-아니요…-
보낸 톡에 한참 걸려 도착한 답을 바라보며 시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에 묻은 몸이 한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간결한 거절의 단어만이 남은 핸드폰을 쥔 채로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19살이 된 율은 얼마 전부터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는 중이었다. 처음엔 배웅도 마중도 전부 자신의 몫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율이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게 되었다. 수업 중인 율을 배려해 톡으로 보내놓는 자신의 물음에 며칠째 도착하는 답은 같았다.
그렇다고 부러 왜 그러냐고 묻지 못하는 것은 게임에서는 평소와 같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냥 공부하는 데 집중을 하고 싶은가 보다 했던 것이 날이 갈수록 의문과 의혹을 품게 했다.
[길드] [광인한 남자 : 오전에 막내가 없으니까 썰렁하다...]
[길드] [무지개 요정 : 학원 다니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길드] [노아 : 오후엔 잘 들어오잖아]
[길드] [니지 : 그래도 외로운 건 외로운 거...ㅠㅠ]
[길드] [도련 : 동당 거리던 길드의 마스코트는 어디에...]
[길드] [세츠나 : 제일 생산적일 일을 하는 막내에게 왈가왈부하지 맙시다]
[길드] [KING Husband : 연애놀음에 빠져있는 누나는 제일 생산적이지 않지!]
[길드] [세츠나 : 내 연애에 왈가왈부하지 마라!]
그 외에도 길드에 변화가 있다면 세츠나에게 게임 애인이 생긴 것이었다. 파티매칭에서 종종 만났던 타 길드의 유저와 좋은 사이로 발전한 듯했다.
[길드] [광인한 남자 : 우우!! 그 남자하고 사냥 다니느라 우리는 뒷전이면서!!]
[길드] [KING Husband : 맞아 이젠 우리하고 놀아주지도 않더라!]
[길드] [광인한 남자 : 대단한 사랑꾼 가트니라고!]
[길드] [세츠나 : 닥추어!]
율의 얘기에서 순식간에 주제가 바뀌어버리는 길드원들의 티키타카를 바라보던 시언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주말엔 꼬박꼬박 접속하던 율이었는데, 이제는 주말까지 학원 친구들을 만난다며 나가기 시작했다. 율의 행동으로 길드원들은 슬슬 불안에 빠져들었다. 혹시라도 율이 게임을 접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형 저 오늘도 학원 사람들하고 만나기로 해서요… 게임은 오후에나 접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말 오전, 어김없이 도착한 율의 톡을 바라보던 시언은 창문으로 다가가 골목을 내려다봤다. 막 옆집에서 나온 율이 자신의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집을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언이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돌렸다. 역시 자신보단 제 또래와 있는 게 좋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율이 자발적으로 인맥을 늘리고, 자신이 없어도 잘 지낼 수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게 속에 담아둔 말들이 늘어만 갈 때쯤, 볼일이 있어 외출했던 시언은 신호에 걸려 정차해 있던 동안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길을 걷고 있는 율을 보았다.
학원의 친구들인 듯한 사람들과 즐거운 듯 웃고 떠드는 율의 옆에는 웬 여자 하나가 익숙한 듯 팔짱을 끼고 치대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보며 시언은 황당함에 말을 잃었지만, 곧 파란불로 바뀐 신호 때문에 액셀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한 시언은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둑어둑하게 거실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묻혀 눈을 감자 거리에서 봤던 율의 모습이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과 즐거워하던 모습. 그리고 그런 율과 가까워 보이던 여자.
생각만으로도 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잔뜩 구겨지는 기분을 따라 덩달아 구겨지는 얼굴을 숨길 수 없었다. 평온하게 돌아온 인생에 안주해서 평범하게 살고 싶어진 걸까? 남자의 연인이 아닌 여자의 연인으로서? 그래서 자신에게서 벗어날 준비를 하려는 걸까?
만일 율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려고 한다면 그걸 막을 방도가 자신에겐 있었던가? 다른 사람의 곁에 있는 율을 보며 그를 상처 입히지 않고, 참고 물러날 수 있을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속에서 반년쯤 전에 내렸던 자신의 결정이 틀렸던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웃든 울든 평생 도망가지 못하게 그 사건을 빌미로 옭아매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흉흉한 생각만이 가득 차오르는 머릿속을 유영하는데, 짧은 전자음과 함께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응이 늦어진 머리가 느릿느릿 움직여 현관 쪽을 바라보자, 집안에 들어서던 율이 어두운 실내와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있는 시언을 보고 놀라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시언을 불렀다.
“형.”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부르는 율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자, 율은 저항 없이 안겨 왔다.
“…….”
말없이 율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복부에 얼굴을 묻자 한 번 더 율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형?”
근심을 가득 담은 목소리에 팔을 더욱 조이자, 잠시 멈칫한 율이 저의 목을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 있었어요?”
물어도 시언은 답이 없었다. 흔하지 않은 시언의 반응에 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아까 역에서 형 차를 본 것 같은데….”
“나도 너 봤어.”
“아, 역시 형이었어요?”
“응.”
“혹시나 했는데도, 형 차를 보고 나니까 너무 보고 싶어져서… 그래서 예정보다 빨리 왔어요.”
속삭이듯 얘기하는 율의 말에 시언이 시선을 들었다. 겨우 자신을 바라봐주는 시언의 얼굴에 율이 해사하게 웃었다. 율의 말과 미소 한 번에 모든 걱정과 불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언은 그대로 율을 끌어당겨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며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시언의 행동에 율은 놀란 듯했지만, 저항 없이 그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언제 이렇게 권율이라는 사람에게 목을 매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가 자신의 손안에서 언제 빠져나가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건 이제 관계의 유지를 위한 칼자루는 자신이 아닌 율이 쥐게 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
[길드] [질풍 : 근데 누나는 왜 그 사람이랑 같은 길드에 안 들어?]
[길드] [세츠나 : 뭐?]
[길드] [질풍 : 아니 보통 계속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거잖아?]
[길드] [도련 : 그러게? 상대방을 우리 길드로 데려오거나 네가 그 길드로 가거나 하려고 하지 않나?]
[길드] [광인한 남자 : 워!! 그러다 누나 진짜 가면 어째요!]
[길드] [KING Husband : 안 그래도 사랑꾼인데!!]
[길드] [세츠나 : 훗 사랑꾼인 건 인정하지만 우리 길드에는 절대 데려오고 싶지 않아]
[길드] [무지개 요정 : 헐? 왜?]
[길드] [제로사이드 : 우리가 북흐러워?!]
[길드] [세츠나 : 친정에선 편하게 있고 싶으니까!!]
[길드] [질풍 : ??]
[길드] [질풍 : 잌ㅋㅋㅋㅋㅋ]
[길드] [집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광인한 남자 : 뭐얔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무지개 요정 : 친정ㅋㅋㅋ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왜 뿌듯하냨ㅋㅋㅋㅋ]
[길드] [제로사이드 : 우리 호적정리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님?ㅋㅋㅋㅋ]
[길드] [니지 : 미쳨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KING Husband : 하긴ㅋㅋㅋㅋㅋ 길드에서의 누나를 본다면 그 분 백퍼 도망각]
[길드] [세츠나 : 닥추어]
[길드] [욕정벌레 : 그래도 전 언니를 뺏긴 것 같아서 섭섭해요]
[길드] [니지 : 맞아 그건 그래... 이제 나랑 사냥도 안 가줌..]
[길드] [KING Husband : 사랑꾼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길드] [질풍 : 헤어져! 헤어져!!]
[길드] [광인한 남자 : 커플 지옥 솔로 천국!!]
[길드] [세츠나 : 훗 나 다음 주말에 만나보기로 함]
[길드] [욕정벌레 : 헐...]
[길드] [KING Husband : 안 돼!! 리얼충은 안 돼!!!]
[길드] [광인한 남자 : 온라인은 온라인으로 끝내라!!!!]
[길드] [질풍 : 불허한다!!!]
[길드] [세츠나 : -ㅛ-]
[길드] [세츠나 : 이놈 쉐키들 버릇없는 쉐키들 쉐킷쉐킷하게 만들어줄까 보다]
[길드] [도련 : 뭔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원들의 정신없는 대화를 바라보던 시언은 율에게 보낸 톡에 막 답장이 온 걸 보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데리러 갈까?-
-아니요.-
언제나 같은 물음에 언제나 같은 답. 율은 자신의 배웅도 마중도 마다하고, 학원에 있을 때는 연락조차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었다. 지난밤 자신이 보고 싶었다며 먼저 안겨 오던, 권율 본인도 인지 못 할 사소한 행동으로 자신을 위로했던 그 아이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시언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주말, 길드원들에게 수많은 야유와 응원을 받고 데이트를 다녀왔던 세츠나의 애정전선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길드원들이 눈치채기 시작한 건 그녀가 다시 길드원들과 사냥을 가는 횟수를 늘렸기 때문이었다. 은근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태도 변화에 친한 여성 길드원들이 애인과의 사이를 넌지시 물었지만, 그녀는 얼버무리는 듯한 탐탁지 않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길드원 노아 님이 접속하였습니다.]
[길드] [세츠나 : 하잉]
늦은 시간 가판대에 물건을 등록해 놓는다는 걸 잊은 시언이 다시 게임에 접속했을 때, 단 한 명의 길드원이 자신을 반겨주었다.
[길드] [노아 : 아직 있었어?]
[길드] [세츠나 : 응? 응... 좀...]
[길드] [노아 : 무슨 일 있어?]
[길드] [세츠나 : 아니야 ㅋㅋㅋ]
[길드] [노아 : 그래]
세츠나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글록으로 향한 시언은 가판대를 열고 판매할 물품들을 등록했다. 그리고 게임을 끄려다 여전히 접속 중인 세츠나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길드] [노아 : 그러고 보니 애인이랑은 어떻게 됐어?]
[길드] [세츠나 : 아...]
[길드] [노아 : ?]
[길드] [세츠나 : 나 헤어지려고]
[길드] [노아 : 왜? 사이좋았잖아?]
[길드] [노아 : 만나보니까 별로였어?]
[길드] [세츠나 : 뭐야 ㅋㅋㅋㅋ 내가 그런 속물로 보이나 ㅋㅋㅋ]
[길드] [노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세츠나 : ... 오빠에겐 내가 속물이었군... 크흡...]
[길드] [노아 : 농담이고 ㅋㅋㅋ]
[길드] [세츠나 : 농담 아닌 거 같은데?ㅋㅋㅋ]
[길드] [노아 : 됐고 ㅋㅋㅋㅋ 갑자기 왜?]
[길드] [세츠나 : 갑자기... 는 아닌 게... 이미지가 다르다고나 할까..]
[길드] [노아 : 이미지?]
[길드] [세츠나 : 현실하고 캐릭터의 갭이라고 할까...]
[길드] [세츠나 :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알겠더라고 난 현실의 그 사람이 좋은 게 아니라... 캐릭터인 그 사람이 좋았던 거라고]
[길드] [노아 : ??]
[길드] [노아 : 차이점이 있어??]
[길드] [세츠나 : 있지...]
[길드] [세츠나 : 게임과 현실에서 보이는 모습은 다르잖아 예를 들면 난 노아라는 캐릭터는 잘 알지만 현실의 한시언 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는 것처럼]
[길드] [세츠나 : 한시언 보다 노아가 더 좋았던 거다 라는 거지]
[길드] [세츠나 : 그래도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갈수록 캐릭터에 현실 모습이 덧씌워지는 거야 차라리 만나지 말 걸 하는 생각마저 들더라...]
주절주절 늘어놓는 세츠나의 말에 시언은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묵직한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어쩌면 율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의 한시언이 아닌 게임 캐릭터인 노아를 좋아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자신을 피하는 듯하면서도 게임에서의 그는 여느 때와 같았으니까. 세츠나의 말로 날을 홀딱 새다시피 한 시언은 처음으로 율에게 배웅의 여부를 묻는 톡을 보내지 못했다. 멍한 정신이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
기다려도 오지 않은 시언의 톡을 기다리던 율은 축 처진 어깨로 집을 나섰다. 시언의 집 앞에서 한참 동안 걸음을 떼지 못하던 율은 시간에 쫓겨 머뭇머뭇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가기 싫은 걸음을 억지로 옮기는 듯했다.
“율아~”
오늘도 역시나 엉겨오는 여자의 행동에 율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팔짱을 끼며 몸을 바짝 붙여오는 그녀를 피하듯 몸을 뒤로 물리며 팔을 빼내 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율의 팔을 더욱 끌어안을 뿐이었다.
“오늘도 그 오빠 안 와?”
기대 가득한 목소리에 율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안 와요….”
처음 율이 학원에 다니기 시작할 때는 시언이 차로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시언의 눈에 띄는 외모와 그가 몰고 다니는 외제 차가 뭇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모양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율에게 접근하며 시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나 마나 시언은 관심조차 주지 않을 테지만 율은 그 사람들이 시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자체가 싫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보여주기 싫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이후, 시언의 배웅과 마중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아마 시언도 자신의 행동을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항상 배웅과 마중의 여부를 묻는 톡을 주었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톡이 오지 않았다.
항상 시언에 대해 신경이 쓰여 수업시간에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 덕에 언제나 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성적도 엉망이었다. 결국, 뒤처지는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 주말까지 할애해 보충을 듣거나 학원 친구들과 스터디를 해야만 했다.
자신의 이런 한심한 모습을 시언에게 들키고 싶진 않았다. 시언을 신경 쓰는 사람들 때문에 그가 학원에 오는 게 싫다는 것도, 시언에 대한 것만 신경 쓰느라 떨어지기만 하는 성적도.
시언에게는 사소한 것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시언의 앞에서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오늘도 역시나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 수업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달라붙는 사람들이 귀찮다고 느끼며 건물에서 내려온 율은 도로 갓길에 차를 대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시언의 모습을 보았다.
차에 기대어 시계를 들여다보던 시언은 눈앞에서 꺅꺅대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수업이 끝난 건지 무더기로 건물에서 내려오던 인파 속에 몇몇 아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시언의 눈에는 놀란 듯 잔뜩 굳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율밖에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율에게 팔짱을 끼고 붙어 나오는 여자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놀란 듯 시언을 바라보던 율은 제 옆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던 시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그런 율의 태도에 시언은 단번에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다음 순간 벌어진 일에 이번엔 율의 미간이 와작 구겨지고 말았다. 제 옆에 붙어 있던 여자가 단숨에 시언에게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반가운 듯 시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시언은 깔끔하게 무시하며 율을 바라봤다. 율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그런 자신과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율이 형… 맞으시죠? 전에 몇 번 뵀었는데, 요즘은 통 안 오시더라고요.”
관심조차 아니, 시선조차 주지 않는데도 주절주절 늘어놓는 여자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시언이 차체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여자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저, 율이랑 친하거든요~ 율이한테 제 얘기 들어본 적 없으세요?”
“율아, 타.”
여자가 뭐라고 하든 신경도 쓰지 않던 시언이 자신을 향해 턱짓하자, 율이 걸음을 옮겨 시언의 차로 다가갔다. 그들이 곧 떠나려고 한다는 걸 느낀 여자는 서둘러 시언의 팔을 붙들었다. 동시에 율의 걸음도 우뚝 멈췄다.
“에이~ 가시려고요? 그러지 말고 저희랑 같이 놀아요!”
콧소리까지 섞어 가며 자신의 팔에 매달리는 여자의 행동에 시언이 매섭게 팔을 뿌리쳤다. 연신 매달리던 여자는 그제야 무안한 듯 시언의 눈치를 보며 한두 걸음 물러섰고, 말없이 운전석에 오르는 시언의 모습을 바라보며 율도 서둘러 조수석에 올랐다. 남겨진 학원의 무리를 뒤로하고 미끄러지듯 출발한 시언의 차는 금세 도로의 차들 속으로 섞여들었다.
차 안엔 온통 침묵만이 가득했다. 시언은 지금 입을 열면 율에게 심하게 화를 낼 것만 같아 부러 말을 삼갔다.
“오지 마세요….”
조용하던 내부의 침묵도 잠시, 조용조용 울려 퍼진 율의 말에 시언은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충동을 참아내고, 기가 찬 표정으로 조수석을 바라보자, 잔뜩 고개를 숙인 율의 옆모습이 보였다. 황당함에 터져 나오는 헛숨을 내뱉자 그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시언은 부술 듯이 핸들을 쥐고, 더욱 속력을 올렸다.
난폭하게 주차된 차의 바퀴 아래로 스키드 자국이 선명했다. 시언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가려는 율의 팔뚝을 쥐고, 그대로 자신의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신을 내던지듯 집 안으로 밀어 넣는 시언의 행동에 율은 신발을 신은 채로 신발장을 지나쳐 거실까지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등 뒤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덩달아 신발을 벗지 않은 시언이 다가왔다.
집 안에 들어선 시언은 화를 삭이듯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게 하는 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지 마세요, 학원에.”
어딘지 억눌린 듯한 말에 화를 삭인 것도 소용없이 잠시 멍해졌던 시언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미간을 구기며 위협적으로 율에게 다가왔다.
“왜?”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그에 율이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치고 들어온 시언의 말에 입을 열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 여자가 좋아?”
“?”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율은 정말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한 얼굴을 하자, 시언의 미간이 더욱 구겨지는 게 보였다.
“정곡?”
그리고 확인 사살하듯 한 번 더 묻는 말에 율은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소리쳤다.
“아니야!”
처음으로 시언의 앞에서 무언가를 던지며 화난 표정으로 소리치는 율의 모습을 보면서도 시언은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그럼 뭔데? 날 피하면서 그 여자랑은 더럽게 사이좋아 보이던데?”
한발 한발 다가오며 큰 키로 율을 찍어 누르듯 바라보는 시언의 위협적인 태도에도 율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큰 눈을 부릅뜨고 시언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살 만하니까 여자도 만나보고 싶고 그래?”
만나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비수를 꽂는 것 같은 시언의 말에 율의 얼굴이 일순 흐려졌다. 하지만 이내 격양된 얼굴로 발까지 굴러가며 소리쳤다.
“그럼 소개해드릴까요!”
“뭐?”
율의 말에 시언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헛웃음과 함께 “네 새로운 여자를 나에게 소개해주겠다고?” 하며 비아냥거리듯 되물었다. 결국, 율이 참지 못한 듯 시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형이 마음에 든대요, 소개해 달래!”
“?”
“그래서 형이 날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 게 싫었어요. 그 사람들이 형을 보는 게 싫었어! 싫다고!”
목이 터지라 소리치는 율의 말에 시언은 당황이나 황당함보다는 더 화가 나는 걸 느꼈다. 율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믿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걸 네가 왜 신경 쓰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는데요! 오지 말아요, 오지 말라고!”
“상관없잖아, 그런 거!”
“형한테는 상관없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에요!”
“왜? 무슨 상관인데? 남이 무슨 짓을 하든 난 관심조차 없는데!”
“알아요!”
“뭐?”
“알아도 싫은 걸 어떡해! 내가 한심해 보여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걸!”
“대체….”
이 아이가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싶었다. 둘이서 사람 많은 곳에 가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가면 주변의 이목을 끄는 건 언제나 있던 일이 아니었던가.
“형만 신경 쓰느라 성적이 형편없어요. 수업 중에 집중을 못 해서 진도도 못 따라가겠고… 내가 너무 한심해서 있는 시간을 전부 할애해서라도 공부하고 싶었어요. 주말엔 보충도 다녀보고, 학원 분들하고 스터디도 해보고… 그러다 보니 형하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줄어만 드는데, 형한테 관심 있다는 누나는 찰싹 붙어서 하루가 멀다고 형 얘기만 하고… 그래서 더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형은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하는데… 나는 고작 중졸이니까. 적어도 형 앞에서 부끄러워지고 싶지는 않았어요.”
구구절절 그간 있었던 일들과 심정을 토로하는 율의 잔뜩 억눌린 목소리에 시언은 황당한 듯 율을 바라봤다.
“…….”
“사실 학원 같은 거 다니고 싶지 않아요. 그냥 매일매일 형하고만 있고 싶고….”
분명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운 걸 참아내며 쏟아냈을 마지막 말에 시언의 기세도 누그러졌다. 쌓이고 쌓였던 말들과 감정들이 모래처럼 흘러내려 어디론가 떠내려간 것만 같았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쏟아부은 감정에 헐떡이며 양어깨를 들썩이는 율을 바라보던 시언은 넌지시 그를 불렀다.
“율아….”
“…….”
대답도 못 하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율의 동그란 머리를 바라보던 시언은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난 사실 네가 검정고시를 보는 게 탐탁지 않았어.”
“네?”
율이 고개를 들어 시언을 마주 봤다.
“유학을 다녀오고, 대학을 나오고, 돈이 많고. 내가 가지고 내세울 수 있는 건 그것뿐이잖아.”
“?”
“나는 평생 직업은 가지지 못해.”
“네?”
“우리 집은… 집안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길 원하지 않으셔서 세간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업계와 정계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집안이야.”
갑작스럽게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풀어 놓는 시언의 행동에 율은 꽤 당황한 얼굴을 내비쳤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4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그중에서 후계를 정하진 않으셨어.”
“…….”
“나는 유난스럽고, 극성스러운 어머니 밑에서 자랐어. 어머니는 내가 한씨 집안의 후계가 되길 원하셔서 난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치마폭에 둘러싸여서 자랐어. 난 꽤 유능하게 자랐던 것 같아. 그래서 어머니께 헛된 희망을 심어 드렸지.”
“…….”
“딱히 원하는 삶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그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당신의 치마폭을 휘두르며, 휘둘리며 아무 생각 없이 살았어.”
“…….”
“하지만 할아버지가 선택한 후계는 내가 아니었어. 유일하게 큰아버지의 자식이었던 두 남매만 할아버지가 직접 이름을 지어줄 만큼 애정을 가지고 계셨는데, 어머니는 눈앞에 거대하게 자라고 있는 나에게 눈이 멀어서 생각지 못하셨던 거겠지.”
“…….”
“하지만 어머니는 나 외에 한씨 집안의 후계를 용인하지 않으셨고, 날 더욱 몰아붙였지. 결국, 난 유학을 빌미로 10년 이상 국내에 들어오지 못했고, 어머니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쉬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군대를 핑계로 입국해서 우선 군대로 도망을 쳤지.”
“…….”
“어머니는 어떻게든 날 군대에 보내지 않으시려고 많은 손을 써두었지만, 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었어.”
“아….”
“그렇게 군대에 있는 동안 원하는 게 생겼어. 그래서 전역 후에 다시 할아버지를 찾아갔어. 자유를 달라고.”
“…….”
고저 없이 조곤조곤 얘기하는 시언의 말을 들으며 율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시언은 손을 뻗어 그런 율의 눈가를 풀어주듯 매만졌다.
“결국, 난 할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 자유를 얻을 수 있었어. 하지만 혹시나 어머니가 다시 헛된 희망을 품지 않게 한 가지를 약속해야만 했어. 어떤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않게 직업을 갖지 않겠다고.”
“…….”
“직업을 갖지만 않는다면 할아버지는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해주시겠다고 하셨어.”
“…….”
“그래서 난 세간에서 말하는 ‘돈 많은 백수’가 된 거야.”
“…….”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도 되었지.”
“형….”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에 시언은 율에게 한 발 더 다가서며 씁쓸한 듯 미소 지었다.
“언젠가 너는 ‘직업’을 갖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에게로 갈지도 모르지.”
“네?”
“그래서 네가 학벌을 높이려는 게 나한테는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해.”
“…….”
“하지만 네가 바라는 일들을 내 욕심으로 막아설 수는 없잖아. 네 미래에 내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 말을….”
“내 노력만으로는 우리 사이는 유지될 수 없을 테니까.”
“네?”
“우리 사이가 끝나지 않게 노력을 하겠다고 했지만, 어려울 것 같아.”
덤덤하게 말하는 시언의 태도에 율은 여전히 자신의 눈가를 쓸고 있는 시언의 손을 급하게 잡아 내렸다.
“무슨….”
“이제 내 노력만으로는 우리 사이는 계속 유지될 수 없어.”
“왜요?”
“앞으로 우리 관계를 결정하게 되는 건 네가 될 거야. 칼자루는 네가 쥐었어.”
“?”
“난 아마도 내 의지로는 널 떠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된 것 같으니까.”
딱히 본심을 숨기려던 건 아니기에 솔직하게 털어놓는 시언을 바라보며 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럼… 제가 바라면 평생… 제 옆에 있어 주실… 거예요?”
더듬더듬 묻는 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는 율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시언은 짧은 침묵을 끝내며 물었다.
“평생… 있게 해줄 거야?”
***
<게임을 통해 나를 알아간다>
[길드] [질풍 : ...]
[길드] [제로사이드 : ...]
[길드] [집사 : ...]
오늘도 쉼터에 채팅방을 띄우고 앉아 있는 한 캐릭터의 모습에 레인보우 힐 길드원들은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의 정체는 며칠 전 세츠나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그녀의 전 연인이었다.
[길드] [니지 : 채팅방 뭐야; 세츠 언니 오면 오늘 진짜 사달 나겠네]
[길드] [욕정벌레 : 언니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네;]
[길드] [질풍 : 얼마 전에도 서버 말로 누나한테 매달려서 누나가 학을 뗐었잖아... ]
[길드] [무지개 요정 : 그건 정말 보는 나도 창피했다...]
[길드] [도련 : ㅇㅇ;]
[길드원 세츠나님이 접속하였습니다.]
오늘도 한차례 불어 닥칠 폭풍을 예상하며 모두는 커플이라는 명사와 더욱 멀어질 세츠나의 앞날에 경의를 표했다.
***
“형, 합격했어요!”
“위험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어들어 오는 율의 모습에 놀란 시언이 습관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런 시언의 품 안으로 돌진하듯 뛰어든 율은 한껏 고양된 기분을 표출하는 얼굴로 시언을 올려다봤다.
뭔가를 바라는 듯한 그 얼굴에 시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이며 입 맞춰 주었다.
“축하해.”
우여곡절이 많긴 했지만, 무사히 검정고시에 합격한 율이었다. 도중부터 학원을 그만두고 시언이 과외를 시켜주긴 했지만 말이다. 커다란 문턱을 하나 넘은 것 같은 기분에 한껏 기뻐하는 율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언은 문득 생각난 듯 질문을 던졌다.
“생일 얼마 안 남았지?”
난데없는 시언의 질문에 율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은 8월 말인데, 자신의 생일은 10월 10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부러 꼬집어 말하고 싶진 않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갖고 싶은 거 있어?”
“…….”
“율아?”
“있어요.”
“뭔데?”
잠시 생각을 하다 대답한 듯한 공백은 신경도 쓰지 않고, 갖고 싶은 게 있다는 율의 말에만 귀 기울인 시언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 시언의 모습을 바라보던 율이 배시시 웃었다.
“형이요.”
“…뭐?”
예상 못 한 대답에 당황해하는 시언의 얼굴을 보며 율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전 매년 형을 달라고 할 거예요.”
“…….”
“그러니까 제 한시언을 잘 준비해주세요.”
당찬 율의 말에 시언은 얼이 빠진 듯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웃고 있는 율을 따라 소리 내어 웃었다. 율의 말뜻에 담긴 두 사람의 미래가 엿보였기에.
매년 한시언이라는 사람을 죽을 때까지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