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
누군가 괴롭힘을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우시현이나 이승우일 것 같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물론 교수인 그를 괴롭히는 움직임은 전문적이라기보다는 장난처럼 유치했고, 그렇다 보니 별 타격은 없었지만……. 쓸모없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점에서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 수준이 어떻다고 평하고 싶지는 않았다.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학생들은 고은교가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았고, 발표 수준은 악질이라고 느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으며, 리딩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성적은 그들이 노력한 만큼 나갈 것이다.
중간고사는 거의 절반이 백지였다. 하지만 기말고사 수준을 떨어트려 주지는 않았다. 그러자 대부분이 답안지를 백지로 냈다.
이러면 F를 받아도 할 말 없는 것 아닌가.
‘재수강이나 먹어라.’
어떤 교수는 학생들의 시험 답안을 매기는 게 보통 골치가 아니어서 조교가 몇이나 필요하다는데, 자신은 아니었다. 채점은 순식간에 끝났다.
입맛이 씁쓸했다.
그는 연구실 안에서 채점된 답안을 기준으로 학교 홈페이지에서 성적표를 하나하나 입력하면서 학생들이 다음 수업은 제대로 듣기를 바랐다. 이대로라면 재수강을 하더라도 좋은 점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성적표 입력을 마무리할 때쯤에는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중얼거리며 시계를 보았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다.
연구실 조명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날이 어두워진 것뿐이었다.
그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북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당연한 순서처럼 잊고 있었던 오른쪽 발목의 통증이 재발하였다. 한 번 탈이 났던 관절은 날이 흐려질 때마다 아파왔다.
그는 저린 발목을 주무르며 비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우산이 있었나? 그럴 리가.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는 듣지 못했다. 이곳에서 지하철을 타려면 적어도 십오 분은 걸어가야 했다. 빌어먹을 한국대 캠퍼스는 너무 넓었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갈 수 없는 거리였다. 저린 다리를 절뚝이며 비까지 맞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산을 사와야지.
그는 빠르게 노트북을 종료하고 휴대 전화와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캠퍼스 안, 기숙사동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일회용 우산을 살 생각이었다.
시간도 늦었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어서 6시였는데도 불구하고 밖이 밤처럼 캄캄했다. 기숙사동이 어디였더라 기억을 짚어가며 부지런히 걷는데, 거친 빗방울이 뺨에 점점이 튀었다. 초여름 비 치고는 사나운 전조였다.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금세 비는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아!”
축제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에는 온갖 전단지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중 하나를 밟고 미끄러졌다. 넘어진 충격 때문인지, 저리던 오른쪽 발목이 이제는 숫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욕실에서 미끄러졌을 때 심하게 다쳤던 건가? 머리만 치료할 게 아니라 발목도 제대로 치료했어야 했던 건데. 그때는 이 몸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래도 정신이 없었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자신에게 우산을 씌웠다.
저도 모르게 남선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시의 적절하게 그를 구해 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고맙…….”
“조심하셔야죠.”
“…….”
“교수님.”
미친 듯이 짓쳐들던 빗방울들이 묘하게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검은 머리칼의 남자는 그의 머리 위에서 손도 내밀지 않은 채 허리를 굽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선재는 갈색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남학생이었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는 결코 남선재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키며 이승우를 올려다보았다.
“우산이 없으실까 봐 걱정되어서요.”
“…….”
걱정이라고?
그 말에는 이가 악물렸다. 이승우 때문이 아니라 전단지를 잘못 밟고 미끄러졌는데도, 이승우가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뒤에서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수치심 섞인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승우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음에도 도와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신이 어디까지 괴로워하는지 보고 싶어 이승우가 이 모든 것을 조장한 것 같다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래, 이 끔찍한 날씨마저…….
그날, 우시현과 이승우를 의심하는 고은교를 말렸던 건 남선재였다. 그 애는 우시현과 이승우가 아닌 다른 학생이 고은교에게 무슨 짓을 할 건지 떠벌리는 걸 듣고 달려왔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우시현과 이승우도 고은교를 구하기 위해 그 자리에 왔던 것일 거라고. 고은교가 판넬과 양동이, 그 안에 가득 담긴 페인트에 얻어맞고 엉망이 되기 전에 말이다.
한마디로 그들을 옹호하는 발언이었다.
우습지. 그들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한 걸음걸이였는데. 마치 고은교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남선재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그걸 알고 나니 남선재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는 것조차 의심되었다. 그럼 남선재도 평소에 그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이야기고, ‘다른 학생’이 그에 대해 험담하는 것을 듣는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남선재는 그 학생이 누구인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쯤 되자 남선재가 감싸려는 게 익명의 그 학생인지, 아니면 우시현과 이승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그는 높은 확률로 자신에게 물건을 떨어트리려 한 ‘다른 학생’의 정체가 그들일 거라 생각했고 최소한 그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명령’했을 거라 생각했다.
학생회라고 했으니 동기끼리 어울리지 않는 게 더욱 어렵겠지만, 그는 그쯤에서 남선재를 향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요즈음 얌전하게 구시잖아요. 떨어지는 보상도 없는데……. 그래서 교수님이 왜 이러는지 궁금해지더라고.”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젖은 머리카락 끝으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속눈썹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대충 훔쳐내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런데도 축축하고 비린 빗방울들이 사정없이 빗발쳐 귀밑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알아듣게 말하세요.”
머리가 푹 젖고 얼굴은 추위와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주제에 신경질을 내는 고은교를, 어둠 속에 감춰져 있는 보석처럼 묘하게 빛을 내는 고은교를, 이승우는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좋아.”
돌연 이승우가 이를 드러냈다. 인적 없는 곳에서, 사방이 캄캄한 대학교 부지 안에서 그는 고은교에게 좀 더 허리를 굽혔다. 마치 귓가에 입술이 닿을 것처럼.
그러나 결코 피부와 피부가 맞닿지는 않았다.
“말해 봐, 은교야. 뭘 가지고 싶어서 그래? 우시현은 이미 가졌잖아. 남선재? 이번에는 남선재를 가지고 싶어?”
“…….”
“언제까지 헤프게 굴래?”
눈꺼풀이 떨렸다. 추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찰방찰방 물이 고여 드는 바닥에서 일어나려 하자 무도한 손이 그대로 어깨를 붙잡고 내려앉혔다.
바닥에 고인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그는 당황해서 이승우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그저 손등 위로 맞잡혀질 뿐이다.
고은교는 한순간 이승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한 대 맞거나, 최소한 더러운 것에 손댄 듯 자신의 손을 뿌리칠 것이라 여겼으나 이승우는 그러지 않았다. 행여나 고은교가 자신의 아래에서 벗어날까 봐 그런 듯했다. 아니면 자신이 그를 압제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거나.
언제까지 헤프게 굴 거냐고?
기분이 나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분노가 숨결을 통해 흘러나왔다. 씨근거리는 숨소리를 억누르려 노력하며 고은교가 날을 바짝 세웠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알 만한 분이, 마음대로 대화를 끊고 가시려고 하면 안 되죠.”
이승우는 그들이 퍽이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이게 대화야?”
“이렇게 대화하는 게 어울려 보이는데.”
그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이승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럼에도 이승우의 표정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캄캄한 빗속에서 가끔 우르릉 치는 번개에 우산 아래가 한 번씩 밝아질 뿐이다. 이 안에서 유일한 온기를 가진 건 이승우의 손뿐이었다.
그 사실이 몸서리쳐지게 끔찍했다.
이승우에게서 손을 떼어 내자, 이승우 역시 언제 고은교의 어깨를 짚었냐는 듯 자신의 손을 떼어 냈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지?”
“글쎄…….”
“아니라고 말하면 믿어 주기나 할 건가?”
“…….”
그러자 이승우의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고은교는 그 눈웃음에서 명백한 대답을 읽어 냈다.
빌어먹을.
고은교가 되어 처음 겪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이것 역시 그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오른쪽 발목 통증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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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irst order
모든 것이 휩쓸린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과 가장 가벼운 것이 뒤섞여 무게감 없이 날린다. 먼지처럼. 날개도 없이 날아오르다 이대로 사바세계를 벗어나 우주의 어딘가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다.
호흡하는 법은 잊었다. 코로, 폐로, 입으로 들이마시던 공기의 느낌이 어땠는지 까마득하다. 심장이 어떻게 뛰었더라. 사그라지는 의식 속에서 홀연히 생각한다.
고통은 없다.
떠오를 때, 그는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몸을 올올이 묶어 두던 붉은 실들이 스르륵 소리도 없이 풀린다. 그를 지상에 묶어 두기 위해 존재했던 인연들은 모두 땅으로 떨어졌다.
완전히 풀려나면 나는 사라질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인력으로는, 도무지 인력으로는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미련이 있었는가? 그는 생각한다.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해방이자 소멸이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다. 무엇도 남기기를 바라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 무엇인가 그의 발목을 콱 쥔다.
안 돼.
그는 멍하니 생각한다.
생각과 동시에 둥실 떠올라 흩어지던 것들이 급속도로 다시 되돌아온다. 풀려나갔던 실들은 제자리로, 깃털처럼 가벼워졌던 몸은 삽시간에 무거워진다. 중력보다 무거워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허공중에 멈춰 있던 그는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겨진다.
상실했던 감각 중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청각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청이 찢어지는 것처럼 시끄러운 바람 소리가 귀를 스쳤다.
추락하고 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활공하는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운석이 대기권을 통과하여 땅으로 도달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그는 추락하고 있다. 살려 달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다음으로 돌아온 감각은 지긋지긋한 통점이다.
아프다. 뼈가 불타는 것 같다.
너무 빠르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감각이 다 돌아오지 않은 건지 전신을 비틀며 소리를 질러도 귓가에는 바람 소리뿐이다. 바람 소리가 너무 커서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 그러나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계속된다. 시간은 연속이므로.
완전히 떨어지면 돼. 그러면 끝날 것이다.
끝. 끝이라니. 마침내 끝을 코앞에 두자…… 두렵다. 이렇게 오래,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데 완전히 추락해서 바닥에 부딪히게 되면 극심한 아픔이 전신을 관통할 것이다. 틀림없이 온몸이 산산조각 나겠지. 영혼조차 남지 않고 형체는 파편이 되어 으스러지리라.
끝을 조금만이라도 미룰 수 있다면 더 고통스러워도 좋으련만. 그러나 끝은 언젠가 오기 마련이다.
쿵.
이건 무슨 소리지?
“헉…….”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비스듬한 흰색 타일 바닥이었다. 그 옆에는 끈적하게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이 있다. 그는 반사적으로 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이 닿자마자 눈앞이 핑 돌고 머리가 얼얼했다. 끔찍하게 아팠다.
겁이 나서 더는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만 했는데도 영 눈앞이 어지럽고 숨이 가빴다. 눈가를 찡그린 채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들숨 날숨을 천천히 반복하여 쉬자 눈앞이 조금씩 돌아왔다.
한쪽으로 나동그라지며 벗겨진 것처럼 보이는 욕실 슬리퍼가 눈에 띈다. 찌그러진 선반과 매끈거리는 욕실 바닥에 차례로 시선이 닿는다.
설마, 씻고 나오다 미끄러져서 머리를 박은 건가?
그러고 보니 머리뿐만 아니라 팔꿈치와 오른쪽 발목이 욱신거리는 것 같다.
그런 멍청한 짓은 거의 하지 않는데, 어쩌다 그랬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심지어 이 욕실은 낯선 곳이다. 최소한 그의 집은 아니었다.
친구 집인지, 아니면 몇 번 만나다 관둔 애인의 집인지 가늠해 보던 그가 천천히 욕실 바닥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그는 어떤 인간관계든 오래 유지할 줄 몰랐다. 설사 친구의 집이라고 한들 왜 사람이 욕실에서 나오지 않는데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봤을 때 사고가 일어난 지 꽤 오래 지난 것 같은데.
핏자국을 한참 뚫어져라 쳐다보다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 낯선 남자가 있다.
그는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욕실 안으로 누가 들어오는 걸 보지 못 했는데, 저 남자는 누구지?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화들짝 놀라 몸을 트는 순간 거울 속의 남자가 똑같이 몸을 돌린다.
“……어?”
그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저도 모르게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그 남자도 똑같이 행동했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남자의 머리 한쪽이 짙은 색으로 엉켜 눌어붙어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거울 앞에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지금 이게…….”
나라고?
눈썹을 크게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서는데, 거울 속의 남자 역시 그를 낯설고 두려운 것처럼 쳐다보며 한 걸음 멀어진다. 이제 보니 목소리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시험 삼아 목 안을 울리며 헛기침을 해 본 그의 표정이 멍해진다. 거울 속의 남자도 그처럼 똑같이 멍한 얼굴을 했다.
“이게 무슨…….”
혼잣말을 하는 목소리가 너무 낯설다. 눈을 꾹 감았다 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망한 얼굴로 낯선 욕실을 홱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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