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욕실 안은 한기가 돌았다. 이렇게 추운 곳에 몇 시간만 있어도 감기에 걸릴 것 같은데, 마른 바닥에는 피가 웅덩이져 고여 말라붙어 있었으니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선 그는 욕실에서 나왔다.
어색하게 어정거리던 걸음이 방 안의 풍경을 보고 우뚝 멈췄다.
‘맙소사.’
방은 혼자 살기에 조금 커 보였다. 사방 벽면에는 반들반들하게 코팅된 사진들이 붙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어 눈이 어지러웠다.
빈틈 하나 없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사진들에는 집착적인 증세마저 엿보였다. 연예인의 화보집을 잘라낸 걸까? 아니면 연예인 기획사에서 제작한 굿즈를 사서 붙인 걸까? 어느 쪽이든 흔치 않은 취향이었다.
그는 이 몸의 주인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발바닥에 온기가 스민다. 욕실 바닥에 오래 쓰러져 있어 경직되었던 몸의 근육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방의 독특한 풍경을 찬찬히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방을 장식하는 사진 중 가장 큰 것에 멈췄다. 그는 그 어떤 사진보다 잘 보이는 연예인의 얼굴을 골똘히 응시했다.
거만하게 턱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 무척 잘생긴 얼굴.
‘아이돌인가?’
벽지 위에 연예인 화보를 오려 붙이는 건 고등학생 시절 유난히 아이돌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이 몸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은 이렇게 생겼구나. 그는 검고 짙은 눈썹과 그 아래에서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제 그는 최대한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넘어지면서 제대로 부딪친 건지 오른쪽 발목이 묘하게 지끈거렸다.
침대 끄트머리에 살짝 앉은 그는 그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 근처에서 완충이 되어 화면이 점멸하는 휴대 전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홈 버튼을 누르자 곧 잠금 화면이 뜬다.
그는 머뭇거리다 검지와 엄지를 번갈아 지문 인식 패턴에 대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 전화 화면이 환하게 밝아진다.
역시 자신…… 그러니까 이 몸의 휴대 전화가 맞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익숙한 애플리케이션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휴대 전화에 센터 가이드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깔지 않으면 센터에서 가이드 복무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약 이 몸의 주인이 가이드라면 분명 이 앱을 사용할 거라 생각했다.
센터 어플에는 로그인 되어 있는 사람의 기본 정보가 등록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애플리케이션을 눌렀다. 그러자 띠리링 하는 소리와 함께 센터 어플이 켜진다.
[이능력자들은 국가를 수호하고 노약자의 안위를 첫 번째로 생각합니다.]
익숙한 로딩 화면이 지나갔다. 옵션 메뉴를 누르자, 조그만 사진과 함께 이름과 나이, 기본 정보가 주르륵 떴다.
이름, 고은교. 나이 서른둘. B급 가이드.
서른두 살? 서른두 살이라고?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방을 둘러보자 거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수십 명의 남자와 곧장 눈이 마주친다. 단지 사진일 뿐인데도 풍기는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서른이 넘었어도 유별나게 굴 수 있지.’
그러고 보니 고은교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 같다. 아니, 틀림없이 들어봤다. 중급 이상의 가이드의 이름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기 마련이니까.
그의 본래 이름은 장이주.
상급 가이드 중에서도 흔치 않은 S급 가이드로, 담당하는 에스퍼가 스무 명이 넘는 워커홀릭이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서류 업무부터 가이딩까지 모두 도맡은 것은 물론 먹고 자는 시간을 쪼개 어떻게든 현장 업무와 내근직 업무를 해냈다. 현장 가이드와 일반 가이드가 따로 있는 시대에 자신처럼 두 가지 일을 병행해 가며 고속 승진 하는 가이드는 드물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집안 내력으로 온갖 합병증을 앓으며 약과 치료를 병행하며 관리해야 하는, 빈말로도 건강한 축에 들지 못하는 처지에 일 욕심이 과했던 것이다.
그건 마치 짤막한 신문 기사처럼 날 법한 일이었다. 「그는 최근 A급 게이트를 걸고 진행하는 큰 프로젝트에 매달리며 꼬박 한 달 동안 10시간 미만으로 수면을 취했고, 결국 과로로 사망했다」 같이.
자다가 죽었으니 큰 고통 없이 갔던 것 같다. 하지만 열심을 다해 산 것에 비해 끝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갑자기 이렇게…… 다른 몸에서 되살아나게 된 건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새 몸에 들어와 좋은 점은 아프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실 ‘아프지 않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욕실에서 거하게 넘어진 여파로 뒷머리가 깨진 것은 물론 접질린 발목이며 팔꿈치가 움직일 때마다 아려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침대에 몸을 가만히 누이고 있으면 괜찮았다. 움직이지 않으면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고통받아온 그의 기준에서 이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이 정도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처지를 복기했다.
고은교……. B급 가이드치고 이런 저런 말이 많은 편이라고 했던가.
소문으로는 모 대기업의 사생아 출신이라 아주 무례하며 막 나가는 스타일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가 진짜 대기업 회장의 사생아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만만찮은 뒷배를 업고 난동을 부리는 탓에 센터 총괄 국장이 골치를 꽤 썩였던 것이 떠올랐다.
다만 고은교는 일반 가이드였다. 그 역시 승진을 위해 일반 가이드로서 서류 업무도 병행 했다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현장 가이드였다. 가이딩을 할 때만 센터를 방문하는 고은교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건너 건너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세상에는 그런 배짱 좋은 가이드도 있어야지, 가볍게 우스갯소리로 말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그가 아는 고은교의 전부였다.
‘그 정도면 가이드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소문대로라면 고은교는…… 그 대단하신 집안 덕에 오냐오냐 키워졌을 것이다. 국장조차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니 선배를 존중하지 않고 후배는 무시한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가이드라는 직업에 애착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가이드를 하려 했을까.
에스퍼와 가이드는 반드시 재능이 발현해야만 할 수 있는 후천적 소질이 필수인 직업군이었다. 다른 직업에 비해 이점이 많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그쯤 해서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싶었다.
어쨌든, 고은교가 가진 것 중에서 이 몸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그렇게 보기 좋지도 않고 썩 튼튼하지도 않았지만 발음하다 혀를 씹을 것 같은 어려운 이름의 불치병이 걸려 있지도 않다. 번거롭게 하루에 열두 번씩 약을 챙겨 먹을 필요도 없고 아프지도 않으니 아주 편안했다. 고행 같던 삶이 숨만 쉬어도 행복해졌다. 그래서일까, 전에 없이 머릿속에 온갖 잡생각이 떠돌아다녔다.
운 나쁘게 머리를 부딪쳐 죽은 몸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뭐 어떠냐는 낙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푹신한 침대 위에 어색하게 누워서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러다 벽에 붙어 있는 남자와 또 눈이 마주쳤다.
“…….”
고은교는 무슨 생각으로 자기 방에 이런 짓을 한 걸까.
‘……다 떼 버리고 싶은데, 참아야겠지.’
어쨌거나 사람은 누구나 하나쯤은 전력을 기울이며 좋아하는 것이 있는 법이었고, 고은교의 경우는 그게 사람인 모양이었다.
이 몸의 주인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지금 상태랑 비슷하게 보존만 해 두자.
몸이든, 방이든.
대충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나저나 아직도 뒷머리가 얼얼했다. 후두부를 얼마나 강하게 부딪혔으면 그런 건가 싶었다. 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던 그는 현기증이 완전히 가시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고은교의 휴대 전화를 챙기고, 침실을 뒤져 지갑을 찾아냈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원래의 자신은 아플수록 일에 집중하며 통증을 잊겠다는 식으로 막 살았다. 아무리 현상 유지를 위함이라지만 이제 와서 몸을 깨어질까 부서질까 소중히 다루는 꼴이 조금 우습긴 했다.
‘여기가…….’
지도를 보니 서울 강남 한복판이었다. 이 집도 본인 명의이려나? 어쩌면 고은교가 대기업 회장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강남 팰리스 타워답게 병원은 바로 인근에 있었다. 차를 타거나 할 필요 없이 걸어서도 충분히 이동 가능했다.
병원에 들어서자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네.”
그는 병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병원에서 옛 향수 같은 것을 느끼다니,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그는 병원 로비 의자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병원의 로비 벽면에는 얇은 벽걸이형 TV가 있었다. TV에서는 뉴스가 나왔다.
죽기 직전까지 어떻게든 따내려고 발악을 했던 A급 게이트에 대한 브리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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