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4화 (4/132)

#4

그러니까 이 400만 원은 다음 달 강사비라는 거지.

그는 빠르게 주제 파악을 마쳤다. 고은서가 준 정보와 바닥을 보이는 잔고가 두뇌 활성화에 도움이 됐다.

당연한 소리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이 몸의 주인을 쫄쫄 굶으며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때 고은교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이 400만 원을 그냥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고은교’가 다음 달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400만 원을 손해 배상해 줘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수업 준비를 하면 돼.’

교양 수업이니까…… 보기에 그럴듯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예전에 위탁 강의를 나갔었다는 가이드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었다.

통신 관련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없는 이상 게이트에서는 휴대 전화가 불통이다. 따라서 이능력자들 대부분은 취침 시간이 되면 할 일이 없었다. 규모가 큰 게이트가 아니면 통신이 필요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고는 했다.

그때 듣기로 이 위탁 강의라는 것은 아주 쉽다고 했다. 현장의 경험을 위주로 수업하면서 간단한 게이트 안전 수칙을 알려 주는 정도라고. 그러면서도 부수입은 쏠쏠하다고 했지.

그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수업을 하다니, 그런 건 생각도 해 본 적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하기로 결정했으니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대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당연하지만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기억 날 턱이 없었다. 애초에 모르는 거다. 따라서 임시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새로 발급 받았다.

“하…….”

하루 종일 사투한 끝에, 한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고은교 강사가 맡은 ‘이능력의 이해’라는 이름의 교양 과목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시간이었다.

아무리 대충 강의하는 시늉만 내려고 했다지만 이대로라면 절대적으로 준비 시간이 부족했다.

골똘히 생각하는 시선이 달력과 시계를 오갔다.

당장 다음 주 월요일이 개강이었다. 그러니까, ‘이능력의 이해’는 하필 월요일 1교시였다. 대체 누가 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가 막힌 시간표 선정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빠르게 교수 시간표를 몇 번이고 훑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고은교가 맡은 위탁 강의는 이것 하나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다.

일주일 2회, 1시간씩 진행하는 필수 교양 수업. 특수과 학생들은 졸업하려면 반드시 이 과목을 이수해야만 한다.

‘대체 그 에스퍼가 누구길래 이런 대단한 연애를 하는 걸까…….’

그 에스퍼랑 연애만 안 했다면 강의 준비를 할 필요도, 신용 카드가 끊길 위험도 없었을 텐데. 괜히 고은교를 한 번 탓해 보았다.

하도 오래 모니터를 봐서 뻣뻣해진 목을 쭉 늘리며 스트레칭을 하는데, 무심코 방 사면에 빼곡히 붙여져 있는 연예인 사진이 보인다.

‘……설마.’

저 사진이 연예인이 아니라…….

에스퍼인 건가?

그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센터 가이드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열었다.

‘my’ 옵션에서는 자신의 기본 정보뿐 아니라 자신이 담당하는 에스퍼 목록을 볼 수 있었다. 사진과 성명, 등급까지.

워낙 정신이 없어서 에스퍼 목록을 확인할 생각을 못했다. ‘고은교’의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해 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는 게 정확하다.

그가 장이주였을 때는 이 ‘my’ 옵션의 에스퍼 목록에는 길고 긴 스크롤이 있었다. 스무 명이 넘는 에스퍼들이 그의 ‘my’에 있었으며, ‘my’에 없는 에스퍼들의 가이딩 요청도 수두룩이었다.

그에 반해 현재 고은교의 담당 에스퍼는 단 둘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렵지 않게 그중 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몸에서 눈을 뜬 뒤 방에 들어올 때마다 계속 본 얼굴이니 못 알아보려 해도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얼굴이다.

“허.”

자기가 담당하는 에스퍼를……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도 있나?

그가 장이주였을 때는 이런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전부 비지니스 관계였다는 뜻이다. 애초에 다 대 일인 관계에 사랑이니 뭐니 대단히 애틋한 관계 따위가 형성될 여지는 없었다.

자신으로써는 이렇게, 단둘만 덩그러니 있는 ‘my’ 목록은 처음이었다.

물론…… 가능성은 있다. 에스퍼와 가이드란 얼마든지 특별해질 수 있는 관계다. 실적 내기를 원하는 가이드들은 대부분 센터에서 정해 주는 에스퍼들 중 매칭률이 가장 높은 에스퍼를 골라 열 명 내외로 가이딩을 해 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닌 가이드도 있었다.

이능력자가 많은 만큼 그 경우의 수도 굉장히 다양했다.

제 취향에 맞는 에스퍼 몇 명만, 혹은 가이드는 그만두었지만 과거에 인연이 이어진 에스퍼들에게 정이 들어 그들에게만 가이딩을 해 주는 경우……. 드물게는 연인이라도 되는 듯, 세상이 정해 준 운명이라는 양 단 하나의 에스퍼만 곁에 두고 보살피며 아끼는 가이드도 분명 있었다.

‘……적어도 쌍방은 맞는 거겠지?’

이상하리만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미간을 문지르며 가이드 전용 애플리케이션, ‘my’에 떠올라 있는 에스퍼 ‘우시현’과 방의 모든 벽에 붙어 거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강의 계획서.’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강의 계획서는 아무리 노려보아도 바뀌지 않았다.

‘이게 맞는 건가?’

분명 대학을 졸업하긴 했으니 강의 계획서를 본 기억은 나는데, 이게 옳은 건지 도통 모르겠다.

보통 강의 계획서가 이렇게…… 단출했던가.

일요일 새벽 두 시, 강의 계획서와 더 눈싸움을 해 봤자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16주차까지 표로 정리되어 있는 강의 계획서를 훑어보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은 강의 언어가 한글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강의 계획서의 대부분이 팀티칭, 그러니까 팀플 과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과목 개요, 에스퍼와 가이드(이하 이능력자)의 교감과 이해 능력을 키우도록 함.

교과목 목표, 이능력자의 자질을 이해할 수 있다.

주교재 및 참고 자료, pdf 파일.

다른 강의 계획서와 비교했을 때 지나치리만큼 간단하게 쓰여 있는 강의 계획서였다. 고은서가 전화상으로 너 같은 무능력자가 무슨 교수를 하느냐며 쏘아붙였던 말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확인차 강의 게시판에 업로드 되어 있는 pdf 파일을 찾아보았다.

그 pdf 파일이란…….

논문과 참고서적의 제목, 저자만 쭉 나열되어 있는 참고문헌 목록이었다.

처음에는 파일을 잘못 찾았거나 아직 강의 게시판에 업로드를 해 두지 않은 줄 알고 컴퓨터 내부 파일집까지 샅샅이 뒤졌다. 상식적으로 저게 강의용 ppt일 리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제대로 된 ppt 파일은 찾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를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몸의 주인, 고은교는 그 어떤 강의 자료도 만들지 않았다는 결론이 났다.

‘이래도…… 괜찮나?’

팀 과제로만 수업을 꾸리면 딱히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하지만 이제 와 의문이 든다 해서 당장 이걸 바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교수가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현장 가이드였다.

역시 위탁 강의는 대충 해도 되는 모양이지…….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내일 프레젠테이션으로 사용할 ppt를 간단하게 만들었다.

“하아…….”

됐어. 강의 걱정은 그만두자.

그것보다는 고은교가 사귀는 에스퍼에게 자신이 ‘진짜’ 고은교가 아니라는 걸 들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는 것이 현명할지도 몰랐다. 담당하는 에스퍼가 열 명쯤 되면 원래 가이드 성격이 어떤지 알게 뭐냐, 싶겠지만…… 단 둘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그들은 단번에 고은교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고은교인 척을 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다른 사람임을 밝혀야 할까?

미친 사람 취급 받으면 어떡하지?

“…….”

그런 걱정으로 인해 새벽에 잠이 들었다.

강의 첫째 날 아침에는 비가 왔다. 몇 시간 자지 못했지만, 지난밤 셀 수 없는 걱정들은 가라앉고 강의가 잘될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안일한 생각이었던 것을 인정한다.

현장 이능력자들은 잔뼈가 굵을수록 당황하지 않는다. 게이트 안에서 당황한다는 것은 바로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릴 것!’ 게이트에 익숙한 이능력자들은 신입이 들어오면 언제나 침착하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그 역시 강심장을 가진 현장 가이드 이능력자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강의실을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

아침부터 길을 헤맬까 봐 30분이나 일찍 한국대에 도착해서, 운 좋게 강의실까지 잘 찾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볍게 떨리는 정도였다. 하지만 9시가 지나도 강의실은 채워지지 않았다.

수강생이 80명이 넘는데, 아무리 OT날에는 학생들이 수업에 잘 안 들어온다 하더라도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강의 시간을 헷갈렸을까 봐 밖으로 나가 강의실의 명패까지 확인해 봤다.

하지만 친절하게도 강의실 문 옆, 강의 시간표를 간략히 적어 둔 명패에는 오늘 시간표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첫 번째 칸에는 <1교시, 이능력의 이해>라고 적힌 명패가 꽂혀 있었고 말이다.

분명 오늘이 첫 강의 날이 맞는데.

“저, 교수님?”

강의실 안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남학생 한 명 빼고는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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