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매칭률이 가장 높은 에스퍼에게만 느낄 수 있다는 ‘그’ 감각.
누군가는 시공간이 느려진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귓가에 종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이성이 마비되고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기는 느낌이라 절대 못 알아볼 수가 없다고도 했다.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그 주장을 처음 들었을 때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가이딩이 가이딩이지 무슨 운명의 에스퍼냐. 네가 말하는 건 그냥 첫눈에 반했을 때 생기는 기현상 같은 게 아니냐고 의문했다.
하지만 한번 겪어보고 나자 그것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이런 건…… 장이주였을 때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사실 이것은 보통 에스퍼가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에게 느끼는 현상으로, 에스퍼가 가이드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자주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가이드들에게도 알음알음 퍼져 있는 소문이 있었다. ‘그’ 감각은, 가이드에게도 일생에 딱 한 번 찾아온다고 했다.
‘……지구상에 태어난 에스퍼 중 가장 매칭률이 높은 에스퍼와 만났을 때.’
운명이 알려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바보 천치나 마찬가지라고도 했지. 하지만 그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능력자의 수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았으니까 우연히 마주치는 건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고.
그는 저도 모르게 이승우를 여러 번 힐긋거렸다.
이승우는 우시현과 달리 다정해 보였고 잘 웃는 듯했다. 시종일관 부드러운 태도지만 아까 박경호를 제지했을 때도 그렇고, 팀원끼리 앉은 모습을 봤을 때 자연스럽게 그가 모임을 주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는 그가 주인이 된 이 몸, ‘고은교’의 외형은 다소 신경질적이고 왜소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리고…… 리더십 있고 다정한 이승우는 이런 고은교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이승우가 고은교에게 잘 대해 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는 가만히 고은교와 이승우가 함께 서 있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고은교의 몸으로 들어와서 다행인가.’
그러지 못했다면 이 감각을 알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셈이 된다. 그는 멍하니 장이주였던 시절을 떠올리다, 자신의 에스퍼를 만난 가이드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지난 생에 이 특별한 감각을 느꼈다면 그렇게 온종일 일만 하다가 허무하게 죽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조금 아쉽다.
그런데 왜 고은교는 이승우가 아니라 우시현을 좋아했을까. 좋아함을 넘어 숭배하는 느낌에 가까웠던 고은교의 방을 떠올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동안, 남선재가 쭈뼛대며 다가왔다.
“교수님, 여기…… 명단이요.”
착한 남선재. 그는 반사적으로 남선재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포스트잇을 받았다. 노트 구석을 찢어 대충 제출한 대부분의 명단과 비교되는 깔끔한 명단이었다. 그는 가지런한 글씨체로 이름과 학번이 적힌 포스트잇을 출석부 위에다 붙였다.
“고마워요. 가 봐도 좋아요.”
하지만 남선재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는 대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의 앞을 떠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남선재를 빤히 쳐다보자 남선재가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 교수님.”
“응?”
“혹시……. 수업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그 말에는 강의실에 남은 학생들의 시선이 쏠리지 않을 수가 없었음을 이해한다. 그 역시 상당히 당황했지만, 감정의 동요를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능력자의 이해’ 과목은 특수과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다 보니 학생들 전원이 에스퍼 아니면 가이드였다. 그리고 남선재는 가이드보다는 에스퍼처럼 보였고 말이다.
이 ‘에스퍼처럼 보인다’는 뜻은 일반인보다 외모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에스퍼 중에서도 못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외모의 기준이란 제각기 다 다른 법이니까, 어떤 사람 눈에는 수수해 보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 눈에는 별로일 수도 있고 그런 거지.
하지만 에스퍼는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 입장, 다시 말해 가이드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꽃과 같은 입장이다. 따라서 자신의 외모를 가꾸려 애쓴다거나 가이드에게 치근거리는 사람은 대부분이 에스퍼다.
그리고 자신도, ‘고은교’도 둘 다 가이드였으니 남선재의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시에 멀리서 우시현과 이승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유 모를 긴장감이 들었지만, 그는 남선재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 해서 그와 어떤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 이건 자신의 몸이 아니고, 고은교가 ‘my’에 단 두 명의 에스퍼만 넣은 것에는 고은교만의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는 이 몸, 즉 ‘고은교’의 몸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고은교에게 가이딩이 풍부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뽑아낼수록 더욱 가이딩 기운이 넘치던 장이주의 몸과는 달랐다. 물론 그때 가이딩을 했던 솜씨가 없어지지는 않았겠지만, 가이딩을 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좀 부족해졌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교수로서 학생을 건드린다는 건…… 아니, 이 경우에는 학생이 교수를 건드리는 거겠지만, 아무튼 물의를 빚을 건수를 굳이 제 손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고 남선재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남선재가 어리둥절해 하더니 갑자기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다.
“아니, 그러니까, 정말 말 그대로 시간이 있으시냐는 뜻이었어요! 저희가 오늘 개강 총회를 하는데, 제가 학생회라서, 그, 학과장 교수님도 그렇고 다른 교수님들이 고 교수님을 정말 너무 보고 싶어 하셔서요. 그래서…….”
횡설수설하는 새빨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경계 태세로 굳어졌던 심리가 느슨해진다. 그는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 지었다. 그에 남선재는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자연히 더듬거리던 그의 말투가 또박또박해졌다.
“이메일을 보냈는데 확인해 주지 않으셔서……. 전화를 드릴걸 그랬나 봐요.”
그러고는 쑥스러운 듯 남선재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이메일이요.”
“네에.”
이메일……. 이메일을 확인해야 된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정확히는 ‘고은교’의 이메일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한 것에 가까웠다.
과제 같은 건 모두 이메일로 받을 테니 지금부터라도 고은교의 이메일에 접속하는 버릇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위탁 강사도 개강 총회 같은 곳에 참석하나?’
생각이 끝나기 전에 남선재가 이어 말했다.
“총회가 끝나고 저희, 이 앞 술집 ‘컨디션 오브제’에서 파티를 하거든요. 다 같이 모여서 술 먹는 자리인데 교수님들이 꼭 참석하셔야…… 아니, 참석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
“선재 군, 말을 끝맺을 때는 분명하게 하도록 해요.”
그의 지시에 남선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선재는 저도 모르게 고은교가 내리는 지시를 따라 말을 시정했다.
“그, 총회에 참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마 총회가 끝난 뒤 뒤풀이에 참여해 주겠다는 말을 당황해서 총회에 참석하시라는 말로 한 듯했다. 남선재의 얼굴이 금세 다시 홧홧해졌다. 그가 자신의 말을 정정하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고은교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그래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아, 네.”
“그런데 나는 총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는 남선재의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고은교가 있는 집 자식이 맞다면, 집안에 연을 대기 위해서거나 뭐……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부르려는 거겠지. 아니면 개강 총회에 위탁 강사들이 참여하는 게 관례라거나.
그도 아니면 고은교의 ‘my’에 에스퍼가 몇 없다는 걸 알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필수 교양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에스퍼였고, 가이드는 언제나 부족한 법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위탁 강사는 센터에 제법 경력을 쌓은 현장 가이드들이 나오는 법이었다. 위탁 강사를 커넥션 삼아 학생들의 취업을 장려하려 했나 본데, 이런 식의 커넥션은 옳지 못하다. 차라리 이왕 만만치 않은 배경을 가진 고은교의 몸으로 들어온 것, 이런 식의 커넥션을 그의 선에서 모르는 척 정리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었다.
“아, 그렇지만, 저…….”
당황하며 고은교에게 무엇인가 말하려던 남선재는 그러다 말고 입을 꾹 닫았다. 그러고는 포기한 듯 순순히 말했다.
“네, 교수님. 알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봬요.”
“잘 가요.”
남선재는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남선재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그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마자 흠칫 놀랐다. 남선재가 고은교에게 말을 건 순간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시선을 알고 있었는데…… 남선재와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그만 잊고 있었다.
형형한 두 쌍의 눈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우시현과 이승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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