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지만 원래의 내용, 즉, 시덥지 않은 내용일 것으로 분명해 보이는 교감-행동-행동발달을 17주 내내 질질 끌며 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고은교가 마지못해 넣은 것으로 보이는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 활동을 확대하여 조 과제로 내는 것이 합당한 건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일단 지루한 수업을 한 시간 내내 듣고 있는 것보다는 실습이 재미있는 게 진리였다.
이능력자의 행동 발달 따위는 한 시간 동안, 아니, 십 분이면 충분히 설명하고 끝낼 수 있었다. 실제로 이능력자에게 ‘가이딩’이란 본능에 따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굳이 ‘가이딩’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A부터 Z까지 자세히 가르쳐 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게이트 안전 수칙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으면 필요했지.
가이딩을 하다가 죽은 사람은 없지만, 게이트를 클리어 하다 죽은 사람은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모든 쓸모없는 과정은 삭제했고, 대신 현장에서 사용하는 게이트 실습 시뮬레이션을 이용하여 각 조별로 모의 전투를 진행한 뒤 그것을 리딩해 주는 것으로 학기의 과정을 채우기로 했다.
이건 그가 팀장이던 시절에도 밥 먹듯 했던 것이었다.
한 주 한 주 세부 목표 설정을 채우다 보니 너무 몰입해서 길어졌긴 했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그래도 학생들에게 맞추기 위해 난이도를 조정했다. 특수과 학생들은 1학년부터 게이트 관련 수업을 듣는다고 했으니 이것이 그들에게 너무 쉬운 내용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게이트 시뮬레이션’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 있기도 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이능력자들이 실제로 하는 일과라 4학년이기는 해도 ‘학생’들이 일주일 만에 해낼 수 있는 과제인가 의심스럽긴 했다.
그래도 뭐든 일단 부딪혀 보는 게 중요하니까 어떻게든 해낼 수는 있겠지.
당장은 힘들게 느껴지겠지만, 현장으로 나가 보면 이 수업이 얼마나 피와 살이 되는지 즉시 알게 될 것이다. 한 명이라도 보람을 느낀다면 이 수업의 의의는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 그는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30분 동안 그는 이능력자 기본 개괄, 가이딩 교감-행동-행동발달을 요약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수업부터 있을 발표 수업에 대한 첨언을 시작했다.
“장소는 나누어 준 팸플릿을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감사하게도 공용 센터와 중앙 센터에서 한국대 학생에게 12월 말까지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 장비 일체를 빌려 주기로 했습니다. 아침 아홉 시 이전, 밤 열 시 이후에는 사용할 수 없으니 이용 가능한 시간대에 학생증으로 예약을 잡고 이용하시면 됩니다.”
원래 고은교는 12월에만 모의 게이트 시설을 빌렸지만 지금부터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려면 그 기한을 변경해야 했다.
다행히 학교에서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 기기 설비를 사용하는 데 쓰일 지원비 일체가 나왔고, 센터 측에서도 순순히 고은교의 정정 메일에 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내 주었다.
문제는 지루하다는 표정으로나마 수업을 듣던 학생들의 표정이 바보처럼 바뀌었다는 것에 있었다.
“여러분은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숙지하고 있는 ‘게이트 기본 프로세스’를 잘 녹화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발표 수업이 있기 전, 여러분이 작성해야 하는 준비 리포트는 전원이 제출해야 하는 필수 리포트입니다. 준비 리포트에는 각 조가 왜 해당 게이트를 선택했는지, 보유 이능력자와 게이트 몬스터(Moster; 게이트에서 등장하는 괴수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 사이에 어떤 상성(相性)을 기대하고 리포트를 작성했는지, 해당 게이트의 S.M.T(S.M.T; start-point, mid-point, top-point의 약자로 게이트 시작-중간-끝, 즉 게이트 작전 전체를 이르는 말)를 정식 진행했을 때 목표 값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적혀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아직 현장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학생들이니 중요한 부분은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늘어놓을수록 학생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기는커녕 완전히 정신을 빼놓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전에 몬스터를 상대할 때 사용할 진형(陣形; 전투를 할 때 늘어선 모습)과 공격 방식에 대해 조원들과 충분히 논의해야겠지요. 게이트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 조에 보유 이능력자의 수가 적거나 등급이 낮다면 총기를 비롯한 무기 일체를 사용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니 반드시 주의하여서 사용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감점 대상입니다. 게이트 작전을 수행할 때 안전 수칙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또, 지정된 게이트에서 어떤 작전이 가장 효과적인지 찾아보는 것도 과제 점수에 포함되어 있으니 모의 전투를 하기 전에 조원들과 잘 상의 하도록 하세요.”
어차피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이 처음도 아닐 텐데, 왜들 저렇게 바보 같은 표정들일까.
계속해서 드는 의문 때문에 금세 피로해졌다.
“질문 있습니까?”
그는 자신이 늘어놓은 말들을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의 학생들을 마주보았다. 수업을 시작한 지 겨우 십 분이 지났을 뿐인데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학생들은 얼빠진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말을 단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해서인 것 같았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기분 탓이기를 바랐다.
“질문이 없으면, 끝으로…….”
수업을 마치려는데, 누군가 용감하게 손을 들었다. 이전 수업을 망쳐 놓았던 박경호는 아니었다.
“네.”
“그, 상성이 뭔가요?”
‘게이트 기본 프로세서’가 뭔가요?라고 묻지 않아 다행이다. 최악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그는 애써 안심하려 했다.
“예를 들면, 불 속성 몬스터는 물 속성 에스퍼에게 취약하지요. 그런 상성을 말하는 겁니다. 또 무슨 예시가 있을까. 음, 물 속성 몬스터에게 전기 충격기를 사용하면 몬스터를 쉽게 잡을 수 있지요. 이해가 됐나요?”
“…….”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강의실은 한층 더 고요해졌다. 의문이 속 시원하게 풀렸다기보다는 그밖에 무엇을 더 질문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약간의 불안함을 느끼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끝으로, 가이딩은 모의 전투를 진행할 때 카메라가 있는 방향에서만 하도록 하세요. 마찬가지로 기본 가이딩 외 그 어떤 가이딩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손들이 산발적으로 올라왔다. 모두가 몹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왜?
그 역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중 하나를 지목했다. 지목당한 학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다음,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렇지만 다급하게 질문했다.
“하지만, 어떻게 기본 가이딩만으로 게이트를…… 아니,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합니까?”
그야, 모의 전투잖아?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게이트 안에서 점막 가이딩을 하겠다는 뜻인가? 그건 남사스럽고 말고를 떠나 수업 중에 리딩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실제 현장 역시 유사시에 점막 가이딩을 진행하는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은 기본 가이딩으로만 게이트 작전을 수행했다.
“기본 가이딩만으로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세요.”
“……어떻게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
설마, 정말로…… 이 학생들은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한 번도 안 한 걸까?
강의실을 둘러보니 모두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과정 하나를 더 추가해야겠네요. 각 조의 조장들은 준비 리포트가 완료되면 그걸 제 이메일로 보낸 뒤 연구실로 발표 전에 피드백을 받으러 오세요.”
일단 그걸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수 있었다.
그에게 배당된 연구실은 다른 시간 강사들과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교무실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북적북적한 독서실 같은 느낌.
의문의 향수를 느끼면서 그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작게 조각된 명패가 책상 위에 번듯하게 올려져 있었다. <고은교>.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그는 이곳에서 학생들의 리포트를 피드백해 주기로 했다.
피드백을 위해서는 노트북이 필수였다. 그는 집안을 샅샅이 뒤져 노트북을 찾아내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고은교는 아예 노트북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할 수 없이 400만 원 중 100만 원가량을 지출해 새 노트북을 사야 했다.
학생들은 제 시간에 리포트를 제출했다. 이미 수많은 리포트로 단련되어 깔끔한 양식에 맞춘 것처럼 그럴듯하게 작성된 리포트였지만, 여러 개의 소논문을 한꺼번에 베껴오기라도 한 것인지 알맹이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그는 몇 번이고 눈가를 좁히며 리포트를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야 했다.
그는 1조와 조장과 2조의 조장을 같은 시간에 불렀다. 어차피 두 사람은 게이트의 첫 시작만 잘 보여 주기만 하면 되니 가장 처음 발표를 하게 되는 대신, 게이트 작전의 가장 쉬운 부분을 발표하는 셈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긴장 안 해도 돼요.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
그는 게이트 작전에 처음 참여하는 햇병아리들에게나 해 주는 상냥한 태도를 쥐어 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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