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3화 (13/132)

#13

물론 남선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의 기준에서도 이번 발표는 아주 괜찮았다. 많은 피드백을 주려고 해도 이렇게 완벽하게 발표를 준비해 오면 피드백을 할 수 없다. 정확하게는 할 필요가 없다.

1조 리딩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마음먹었던 너그러운 교육자의 태도를 다시 보여 줄 생각이 들었다.

남선재가 클리어 한 게이트는 하급 좀비 게이트였다. 좀비는 불에 매우 취약해서, 화염방사기를 들고 돌진하기만 해도 금세 타 죽는다. 게이트 상성까지 확실하게 고려한 남선재의 조는 준비 단계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금세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모의 전투를 마무리했다.

고은교는 아무 말 없이 2조의 발표 영상을 넘겼다. 그의 손이 멈춘 곳은 남선재가 호쾌하게 좀비들을 때려잡는 구간이었다.

“D급 에스퍼가 화기를 들고 상급 에스퍼의 역할을 한다면, 중급 에스퍼 역할은 누가 해야 하지요?”

“아…….”

고은교의 지적에 남선재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가이드의 수가 에스퍼보다 많은 이 팀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에스퍼가 보호 역할로 떨어져 있어야 해요. 가이드의 수가 많으면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질뿐더러, 위험에 노출된 가이드의 능력은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이 상황은 팀 전력의 누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해했나요?”

“……네.”

“포지셔닝을 바꿀 필요가 있겠네요. 그 밖의 내용은 모두 좋습니다. 수고했어요, 2조.”

“감사합니다.”

얼빠진 얼굴로 남선재가 중얼거렸다. 누군가 속삭였다. ‘남선재가 C급 에스퍼라고?’ 그 목소리를 들은 고은교가 설핏 눈썹을 찡그렸다.

혹시 남선재는 C급 에스퍼가 아닌 걸까?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출석부에는 분명히 남선재의 에스퍼 등급이 나와 있었다.

행여라도 남선재가 상급 에스퍼임을 숨기고 C급 에스퍼로 제 능력을 낮추어 기재했다면 오늘 고은교가 한 지적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영 쓸데없지는 않을지 몰랐다. 앞으로 남선재는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 가이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에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벽시계를 확인하고, 고은교가 강단으로 걸어 나갔다. 수업은 20분 일찍 끝날 수 있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합시다. 앞으로도 2조처럼만 발표 준비를 해 온다면 수업이 훨씬 일찍 끝날 수도 있겠네요.”

“…….”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학생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왜지? 수업을 길게 듣고 싶어 하는 학생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럼 다음 시간에 봅시다.”

괜찮은 기분이었다. 고은교는 2조의 준비 리포트와 출석부를 겹쳐 들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정말로, 2조처럼만 하면 그도 학생들도 스트레스받을 것 없이 행복한 1학기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당연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선재는 최근 현장에 두 번이나 나가본 적 있는 에스퍼라고 한다. (그는 이 말을 그다음 조의 리포트 피드백 시간에 들었다. 3조의 조장은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들은 남선재의 조 같은 발표를 할 수 없다고 돌려서 말했다.) 그러니 그가 조장으로 속해 있는 조의 발표가 수준 높았던 것이다.

이제는 꽤 학생들의 엉망진창인 발표에 적응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강의 시간도. 그리고 고은교의 몸에도.

학생들은 발표 시간마다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현장으로 나가면, 오히려 고은교의 상세한 리딩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정도면 아주 상냥한 편이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

강의에 한숨 돌리게 되자 슬슬 다른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째서 ‘my’에 있는 에스퍼들이 가이딩 호출을 하지 않느냐는 건데…….

벌써 한 달이나 시간이 지났고, 그동안 자신의 에스퍼들은 단 한 번도 가이딩 호출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계 가이딩이 만연해 있는 ‘가이딩 포화(飽和)’의 시대라지만, 에스퍼들은 가이드가 해 주는 가이딩을 선호하는 법이었다. 실제로 한 달에 한 번씩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것이 지침으로 정해져 있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오래 근무할수록 ‘my’에 들어가는 에스퍼들은 많아졌다. 어차피 한 달에 한 번만 하면 되니까, 매칭률이 조금만 일치해도 떠넘겨지기 일쑤다. 가이딩 받는 것을 귀찮아하는 에스퍼들도 제법 많았다. 단순히 몸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그러니까 목욕 같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이 귀찮은 짓을 빨리빨리 해치우려고 했다.

사실 우시현과 이승우가 고은교에게 가이딩 호출을 하지 않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 역시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예측했으므로.

처음 우시현과 이승우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느꼈을 때부터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리라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조금 곤란해진다.

그는 설마, 하는 생각에 센터 애플리케이션을 뒤져 그들이 과거에 가이딩을 어떻게 주고받았는지 체크했다. 이승우와는 대부분 한 달에 한 번씩만 가이딩을 했고 우시현과는 대중없이 했다. 하루걸러 하루 한 적도 있었지만, 삼 개월 내내 가이딩을 하지 않은 적도 있다는 소리다.

물론 그때는 고은교의 요청을 우시현이 다 무시한 경우였다.

그는 뜨악한 표정으로 가이딩 내역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게 전부 고은교의 요청일 수가 있지?’

현장 가이드였던 시절에도 ‘my’에 있는 에스퍼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이딩 호출을 해 댔다. 하루에 세 번씩 밥 먹듯 가이딩을 못 받으면 죽을 것처럼 구는 에스퍼를 어떻게 ‘my’에서 퇴출시키냐고 짜증 내는 동료 가이드가 하루에 한 명씩은 생겼다. 하루 종일 삑삑거리는 휴대 전화가 거슬리는 건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서, 센터 애플리케이션의 알람을 끄는 건 가이드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고은교의 센터 애플리케이션은 알람이 꺼져 있지 않았다…….

에스퍼가 가이드의 가이딩 스케줄 표를 일람할 수 있듯이, 가이드 역시 ‘my’에 있는 에스퍼가 언제 가이딩을 받았는지 검색해 볼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인 끝에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우시현과 이승우의 가이딩 내역을 눌러 보았다…….

“교수님?”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자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쭈삣쭈삣 바라보는 6조 학생들이 있다.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6조 준비 리포트를 휙휙 넘겼다. 이미 저번 피드백 시간에 모의 게이트와 관련 없는 논문 인용은 지양하라고 지적한 적 있었다. 그랬더니 분량이 고작 세 장밖에 안 되는 허접한 리포트가 제출되었다. 물론 수정할 시간이 없어서겠지. 그는 헛웃음을 삼켰다.

“발표 끝입니까?”

힉, 하는 소리가 났다. 잘못 들었나?

“……네, 네에, 교수님.”

바들바들 떨리는 염소 같은 목소리에 고은교는 잠시 침묵했다.

봐주고 싶은 마음도 잠깐, 성의 없는 리포트와 발표를 복기하니 그럴 마음도 다 사라진다는 게 문제였다.

“저번 시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몬스터를 마주 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 죄송…….”

“그리고 꼭 하나 이상의 에스퍼가 가이드를 보호하라고, 아니 최소한 가이드는 몬스터의 시야 밖에 있어야죠. 무슨 능력이라도 있나요? 몬스터를 잡을 때 가이드가 무슨 도움을 줄 수가 있죠? 방사 가이딩이 가능한 상급 가이드는 이 클래스에 없는 걸로 아는데. 그리고 최선재 학생.”

“네, 네…….”

호명당한 학생이 딸꾹질을 하며 대답했다.

“무기를 챙겨 왔어도, 가이드가 그 무기를 스스로 사용할 때는 최악의 경우라는 걸 몇 번이나 말씀 드리지 않았나요? 총성이 울리면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기 쉽기 때문에 반드시 사용을 주의하라고요. 게다가 박아람 학생이 최선재 학생의 ‘my’에 있는 에스퍼라고 적혀 있는데, 자기 에스퍼에게 총을 쏘면 어떡하지요?”

“그게 아니라, 실수로…….”

“물론 실수였을 거고 사격술을 따로 훈련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총을 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쓰면 안 된다고요. 총을 쏴서 맞혀 봤자 지금 이 게이트의 몬스터는 고스트 타입(ghost; 귀신이나 유령)이니 유의미한 타격을 가할 수 없습니다. 혹시 준비 리포트를 본인의 손으로 쓰지 않은 겁니까?”

“그게 아니고…… 너무 급한 상황이라, 아람이를 구하려고…….”

“처음부터 고스트 타입 몬스터에게 먹히는 무기를 소지해서 가져왔어야지요. 총기를 들고 게이트에 들어온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의 전투라 총을 쏴서 팀 에스퍼에게 맞혔어도 타격 판정이 안 들어가니 상관없겠지만, 게이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박아람 군은 즉사입니다. 몬스터가 아닌 자기 가이드가 쏜 총에 죽는 거예요.”

“…….”

너무해,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내내 지적받던 학생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훌쩍훌쩍 우는 소리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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