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그는 눈썹을 찌푸린 채 우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앉아 있고, 우시현은 서 있었기 때문에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우시현은 비딱하게 선 채로 그를 깔아보고 있었다.
늘 그래왔듯 우시현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은 다른 시간제 강사들도 사용하는 연구실이었고, 그는 교수의 신분인데다, 옆에 친구까지 달고 왔으니 기본적인 예의는 차릴 거라 생각했는데.
‘……고은교가 평소에 어떻게 우시현을 대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사실 11조의 준비 리포트는 무척 훌륭해서 발표 전 피드백이 전혀 필요 없었다. 하지만 굳이 11조의 조장을 부른 건 그게 그가 정해 놓은 절차이기도 하고, 11조의 조장이 우시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우시현이 그의, 정확히는 고은교의 ‘my’에 있는 고은교의 에스퍼이기 때문에 한 번쯤은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고은교를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한 두 명의 에스퍼를 무작정 피하려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얼마나 이 몸에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의 손으로 꾸려나가게 된 이 강의에 꽤 흥미를 붙이게 되었다. 학생들이 그를 얼마나 미워하든 그건 상관없었다. 그는 예전부터 일단 한번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편이었고, 반드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후배가 지시를 똑바로 수행 못하면? 더 굴리면 된다. 일을 제대로 해낼 때까지.
그러니 고은교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것 같은 ‘우시현’, 그리고 ‘이승우’와는 어떤 관계인지 알아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물론 이것이 본격적으로 고은교의 행세를 하고 싶어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장이주의 몸은 죽어서 사라졌고, 어느 날 다른 사람의 몸에서 눈을 떴다는 이야기는 너무 말도 안 되었으니 사실은 자신이 장이주라고 말하고 다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삶은 시작되었고…… 그로서는 절충안을 찾고자 한 셈이다.
그러니까 고은교가 다시 돌아와도 괜찮을 수 있게끔, ‘my’의 에스퍼들과의 관계를 이전처럼, 아니 사실은, 조금은 좋게 유지하려는 마음이었는데.
고은교의 에스퍼이면서 우시현은 왜 이렇게 고은교를 싫어하는 걸까.
“……피드백으로 넘어가죠. 피차 좋은 꼴 보자고 부른 건 아니니까.”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비웃음을 띠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고은교가 우시현한테 얼마나 설설 기었으면 사람이 저 모양 저 꼴일까 싶어도, 그는 도저히 고은교가 했을 거라 추측되는 ‘을’의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다.
그래 본 적도 없고, 그런 시늉을 낸다 한들 아주 어색해 보일 테니까.
그래도 고은교인 척은 해야 했는데…… 욱해서 뱉은 말에 스스로가 움찔했지만, 우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이승우도 의외란 표정이다.
“…….”
이승우. 그가 처음으로 ‘운명의 상대’라고 느꼈던 에스퍼. 그는 우시현에 비해 표정 변화가 있는 녀석이었다. 그것도 순진한 느낌은 아니었고, 이를테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으니 일부러 보여 주는 것 같다고나 할까. 교활하다면 교활하고, 당당하다면 당당하다.
이승우는 고은교가 느낀 것처럼 그는 자신에게서 운명의 느낌을 받지 못한 걸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고은교는 그것을 묻는 대신 발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11조는 조원 전원이 센터 이능력자니까 다른 조에 필수로 들어갔던 준비 과정은 생략합시다. 대신 S.M.T을 간단하게라도 보여 주세요. 다른 건 몰라도 T는 자세하게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11조 준비 리포트를 쭉 훑어보며 말을 끝냈는데, 들려와야 할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무표정한 이승우와 비웃음마저 식어서 굳어 있는 우시현이 보인다.
‘……너무 무리한 일정을 요구해서 그런가?’
하긴, T를 진행하려면 나머지 과정은 당연히 해야 하는 마찬가지다. 그는 약간 머쓱한 기분을 느끼며 덧붙였다.
“그냥 상급 에스퍼도 아니고 S급 에스퍼가 둘이나 있는 조니까 할 수 있겠죠? 정 어려우면 미드 포인트까지만 해도 됩니다.”
“아니요.”
이번에도 대답한 건 이승우였다.
“하겠습니다. S.M.T.”
예의 바르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분위기가 확 안 좋아진 것이 느껴졌다. 그 역시 일주일 안에 대형 게이트 하나를 완전히 클리어 하라는 요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진짜 게이트가 아니라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이니까 몬스터의 강약도를 조절할 수 있다. 다른 조들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던 팁을 알려 주려던 고은교의 시선에 ‘서예은’이라는 이름이 들어왔다.
‘이건 뭐, 내가 말해 줄 필요도 없겠는걸.’
그가 아는 서예은이 맞다면, 그녀는 일 년 전부터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에서 사는 신입 가이드 중 하나다. 고은교가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11조에 서예은 가이드가 있는 걸로 아는데 도와 달라고 하세요.”
“서예은 가이드에게 도와 달라고 하라고?”
“그래요. 어차피 같은 조 가이드니까…….”
이번에 대답한 건 이승우가 아니었다. 우시현이었다. 빈정대는 것 말고는 말할 줄 모르는 우시현이 정상적으로 대답했다고?
불길함이 감지됐다. 준비 리포트에서 천천히 시선을 떼어 내자,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듯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두 쌍의 눈이 보였다.
‘뭐지?’
그때 그가 본 건, 자신에게로 뻗어져 나오는 기다란 팔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우시현이 자신의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끼익.
귓가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금 들은 게 맞아?”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멍하니 우시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고은교의 목 대신 그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꽉 쥐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의자를 부서뜨릴 듯했다. 그것을 막고 있는 건 이승우였다. 우시현이 주먹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그 손을 덮어 누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진정해야지 시현아.”
입 안으로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세 사람의 사이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고은교는 이승우가 속삭이는 소리를 명확히 들을 수 있었다.
이후로는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아니, 아니다.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폭풍 전야 같은 것이었다. 우시현은 도저히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노리는 에스퍼의 시선에 바짝 얼어붙었다.
마침내 우시현의 번뜩이는 눈이 거의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고개를 들자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들이 보인다.
불편한 내색을 하는 교수들의 모습에, 우시현이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그가 본래 자리로 가서 서자 이쪽을 보던 시선들이 사라진다.
이승우는 여전히 고은교의 옆에 서 있었다. 고은교의 낯빛을 살피면서. 그는 자신이 이승우에게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현이가 가이딩을 받은 지 꽤 돼서 그런가 봅니다.”
“…….”
“놀라셨어요? 교수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고은교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우시현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승우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대로 완전히 얼어붙어 있는 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입술을 열어도 물고기처럼 뻐끔대기만 할 뿐 목소리가 성대를 통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소리를 쥐어짜내려 애썼다.
“……아니, 나는.”
“이 정도는 교수님에게 별것 아닌 일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네요.”
그 말에는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것 같다. 이런 일이 별것 아니라고? 이건 명백한 폭력이었다.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휘두르기 직전까지 갔다.
설마 에스퍼가 그에게 폭력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이 자주 있었던 걸까? 입천장이 바짝 마르는 것 같다.
에스퍼가 가이드한테. 그것도 ‘my’에 있는…… 그의 에스퍼가.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그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였다. 이걸 지적한다고 해서 우시현과 이승우가 태도를 바꿀까? 답은 바로 나왔다. 아니.
이건 당장 끊어야 하는 관계였다. 고은교가 우시현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계속 맺어져야 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이건.
고은교는 분명 우시현을 숭배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런 우시현이 고은교를 이렇게 대하는 건 정말이지 상상 이상의 일이다. 기껏해야 싫어하는 정도라 생각했는데.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호의적이지 않더라도 마음 정도는 약해지지 않나.
불현듯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그가 고은교의 몸에 들어오게 된 건, 이들과의 관계를 끊어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말투가 부드럽다고 해서 이승우 또한 고은교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 서 있지만, 조금도 고은교를 건드리지 않는다. 에스퍼란 가이드의 곁에 위성처럼 맴돌면서 어떻게든 손가락 한 번 스쳐보려고 애쓰는 존재들인데.
상식이 개벽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희 가이딩은 언제 해 주실래요?”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물었다. 도무지 상황에 맞지 않는, 상식 밖의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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