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6화 (16/132)

#16

“……뭐?”

“가이딩 말입니다…… 교수님. 혹시 이것도 잊으신 건가요? 교수님은 저희 가이드인데.”

알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묻어 뒀던 문제들이 툭 튀어 올라 얼굴을 때린 느낌이다. 그는 날카롭게 쪼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 맞다. 이승우의 말이…… 맞았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의 에스퍼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가이딩을 호출하지 않았음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이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았는지 그 내역을 확인하였다. 이능력자 간의 가이딩은 무조건 센터 안, 혹은 게이트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든 기록이 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가이딩을 받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그가 우시현을 불러 낸 것도, 이 가이딩에 대해서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불법이기는 하나 사적으로 아는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제대로 받고 있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우시현과 이승우는 친밀한 사이처럼 보이니, 겸사겸사 이승우의 가이딩 상태도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다니.

“하…….”

얼이 빠진 고은교의 표정에 득의양양해진 것은 우시현이었다.

그는 고은교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 같은 순간에는 더더욱 그랬다.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굴 줄은 몰랐다는 식의 멍청한 표정이라니. 요즈음 고은교가 이상하게 잠잠했다고 해서 자신이 고은교의 끔찍했던 모습을 잊어 줄 거라 기대했던 건 아닐 텐데.

고은교는 이런 취급을 받아도 싸다. 가이딩을 언제 해 줄 거냐고 함부로 물으며 가이딩 기계처럼 취급해도 할 말이 없다는 소리다. 그게 싫었으면 고은교는 애초에 그들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꼴에 곱게 자란 고은교는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늘 하던 대로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고은교가 앓고 있는 지랄병은 장소와 시간에 무관했으니까. 개처럼 두들겨 맞고 수그러지는 것도 잠깐뿐이겠지만, 그 짧은 휴가는 달콤했다.

하지만 꽤 오래 기다려도 고은교가 째진 비명을 지르며 우시현에게 달려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교수 직함을 달았다고 체면치레를 하는 건가?

하지만 글쎄, 그런다 하더라도 고은교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고은교가 끔찍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알았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지만 더러운 수단을 쓰는 것을 가장 간편하다고 생각하고, 앞과 뒤가 달라 하루에도 다섯 번씩 말이 바뀐다. 늘 본인이 유리한 쪽으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으면 곧 죽기라도 하는 양 패악을 떨었다.

우시현은 그게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화를 내건, 치를 떨건 그것마저 짜릿해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즐기는 고은교가 말이다. 가이딩을 무기로 우시현을 잡았지만, 사실 고은교의 가이딩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

가이드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소명 같은 건 없는 더럽고 비루한 남자.

진절머리가 난 우시현이 그걸 핑계로 고은교를 떠나려 할 때, 고은교는 그의 유일한 친구를 걸고넘어지며 기어이 우시현을 놓아주지 않았다.

최근에는 호출을 해도 만나 주지 않으니 학교까지 따라왔다. 고은교가 이 정도로 기상천외한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은 처음이라 만사에 태평하던 이승우가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소름이 끼쳤던 것은 우시현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고은교였다.

언제나 최악인.

이번에도 고은교는 바뀌지 않을 것이고, 우시현은 늘 그랬듯 고은교를 경멸하며 바라보았다.

“……가이딩 예약은 센터 앱으로 하세요.”

그런데 고은교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눈을 껌뻑이며 우시현이 고은교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연구실로 들어왔을 때 고은교가 자신의 시비를 무시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

미친-개-또라이-새끼-들.

오후부터 시작된 두통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꽉 닫은 채로 찬물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래도 불쾌한 감각은 가시질 않았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취급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식히고 나니 제대로 알겠다.

센터에서만 근무하는 일반 가이드들을 하는 것도 없이 돈만 받아간다면서 괄시하는 천하의-개잡놈-쓰레기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시현과 이승우가 그런 부류인 모양이었다.

아니 가이드를 일반인 취급했으면 했지, 괄시는 왜 한단 말인가.

그런 에스퍼들이 있었다. 자기들이 타고 태어난 능력이 남들에게 없다고 스스로가 선택 받은 종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그나마 가이드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일반인보다야 나은 대우를 한다지만 애초에 능력이 있고 없고를 기준으로 사람을 나눈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미 끔찍한 인간 말종이었다. 특히 이능력자가 등장한 지 얼마 안 됐을 시점에는 그런 관점이 만연했다고 하는데, 이제 이능력자가 많아지고 흔해진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그런 사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뭐 대단한 평등주의자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런 시선이 역겹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에스퍼는 ‘my’는커녕 가이딩 한 번 해 주지 않았다. 제 능력이 대단하다면서 뻐기는 녀석 치고 제대로 된 능력 발휘를 하는 걸 본 적이 없기도 했고, 그에게는 이미 가이딩 좀 해 달라고 꼬리 치며 달려오는 에스퍼가 즐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은교의 몸으로는 예전처럼 실력 발휘를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는 적어도 가이딩을 하는 방법 정도는 기억했다. 솔직히 고은교는 어떻게 B급 가이드 라이선스를 가질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가이딩 양이 적었다. 활용도 쉽지 않았다. 마치 체내에 있는 기운을 한 번도 일으켜 보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가이딩 기운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가 느끼기로는 이 기운이 매우 정순한 것이어서 에스퍼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제까지 이 도움을 받은 게 인간 말종 ‘우시현’과 속을 알 수 없는 똑같은 인간 말종 ‘이승우’라는 점이 안타까웠지만 말이다.

여전히 센터 애플리케이션으로는 가이딩 호출이 오지 않았다. 벌써 두 달이 넘었나? 이들에게 가이딩을 해 주지 않은 게 말이다.

“가이딩은 무슨…….”

오늘 같은 꼴을 당하고도 가이딩을 해 주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건 천사가 아니라 호구다.

혹시나 싶어 우시현과 이승우가 다른 가이드의 ‘my’로 옮긴 건 아닌가 검색해 봤지만 전혀 그런 기록이 없었다. 이 관계를 끝내자는 게 아니면 오늘 그에게 그 따위로 굴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었나. 의아한 얼굴로 우시현의 세부 사항을 눌렀을 때였다.

‘……가이딩을 안 받아?’

가이딩을 받은 기록이 없다. 이승우가 가이딩이 급하다고 여유롭게 말하던 것(“급하긴 뭐가 급하다는 거야? 미친놈들.”)을 떠올리며 그가 신경질적으로 우시현과 이승우의 매칭 가이드들을 검색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

“뭐야, 이 새끼들.”

그들은 다른 가이드와 파장 자체가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나마 가이딩이 가능한 일치율을 보이는 가이드는 고은교일 정도였다.

‘이게 이럴 수가 있나?’

매칭률이 아주 높지는 않더라도 어떤 에스퍼든 30~50% 내외로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가 최소한 열에 셋은 있어야 했다.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면 에스퍼들은 진작 미쳐 버렸을 거다.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우시현과 이승우의 건강 정보 상태를 눌렀다.

최근 학기를 시작한 탓에 센터 방문을 아예 하지 않은 건지, 그들의 체내 위험률 수치(The body ratio[percentage] of risk; 에스퍼-이능력자가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몸에 쌓이는 부작용 일체)는 한 달 전부터 갱신되지 않았다. 심지어 한 달 전 상태도 상당한 고위험군이었다.

그는 몹시 당황했다.

이러니 가이딩은 언제 해 줄 거냐고 물었던 건가?

혹시, 그가 다른 가이드에게 도움을 받으라는 걸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아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가이드가 있는 에스퍼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대단한 실례다. 특히 다른 가이드 찾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돌연변이 에스퍼에게는 그런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너희를 가이딩해 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빌빌 기어 봐라’ 정도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제야 왜 우시현과 이승우가 고은교를 싫어하면서도 그의 ‘my’를 떠나지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고은교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휴대 전화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그들이 S.M.T를 하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굴이 굳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그들은 물, 바람 능력을 가진 원소 계열 이능력자로, 원소 계열 에스퍼들은 다른 에스퍼들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리스크를 떠맡으니 말이다.

시뮬레이션이라 하더라도 게이트 작전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이런 건 정말이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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