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7화 (17/132)

#17

아무리 이 몸이 B급이고 그들은 S급 이능력자라 가이딩이 충분하지 않았을 테지만, 또 요즈음은 가이딩을 해 주지 않았다지만……. 어쨌든 이전에는 꼬박꼬박 가이딩을 받기도 했고 번듯한 가이드의 ‘my’에 들어가 있는 몇 안 되는 에스퍼들이라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

그는 급히 손가락을 움직여 휴대 전화의 전화기록부를 뒤졌다. 그들이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 하더라도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으니까, 지금 당장 연락을 해서 기본 가이딩이라도 하자고 하려 했다. 아니면 센터로 가서 기계 가이딩이라도 받으라고 지시를 내리거나.

“아…….”

깜빡했다. 그들의 전화번호가 없다는 것을.

이 관계는 비정상적인 관계라는 것을 말이다.

고은교가 머리를 감싸 쥐고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방법이 없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기다리는 것밖에는.

몰랐을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알게 된 이상 넘어갈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우시현과 이승우는 막대한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설마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고은교에게 귀책 사유를 찾아 ‘my’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러기에 그들의 매칭률은…….

‘이건 어차피 도돌이표잖아.’

센터에서는 이렇게 매칭률이 지나치게 낮은 에스퍼에 한해 매칭률이 일정 이상 되는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무조건 보장해 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고은교가 그들을 손쉽게 ‘my’에 넣은 이유가 왠지 추측되었다. 하지만 고은교의 운이 그렇게 좋았을까? 설마, 고은교가 뒷배를 이용해 매칭 결과를 조작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대책을 찾아야 했다. 그들에게 맞는 가이드를 찾아 주어야 했으므로.

복잡해지는 생각에 늦잠을 잤다. 일어나자마자 고은교는 최대한 빨리 학교로 갔다.

그리고 그곳엔…….

“하.”

“교수님…… 안녕하세요.”

데자뷔가 느껴진다. 강의실 맨 앞에 앉아서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는 남선재, 그리고 텅 비어 있는 강의실.

머리만 대충 말리고 튀어 온 탓에 늘어진 앞머리가 이마 앞으로 내려왔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고은교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남선재는 고은교가 자신을 쳐다보자 금세 헤헤거리며 웃었다.

“오늘은 무슨 일입니까? 선재 군.”

“저…… 축제요. 오늘부터 축제거든요. 그래서 다들 준비하러 가느라고…….”

“월요일 1교시부터요?”

“……그, 준비할 게 많았나 봐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단체 보이콧이란 뜻이었다. 오늘 발표자들도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발표를 하지 않았으니 과제 점수는 0점 처리다. 그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어쩐지 그때, 이승우가 순순히 하겠다는 대답을 한다고 했지 싶었다. 애초에 그때부터 발표를 빠질 생각이었겠지.

개-또라이들-같으니.

가이드로서 최소한의 의무라도 하자고 겨우 다잡은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선재 군도 가 봐요. 즐거운 시간 보내야지요.”

“저, 교수님.”

이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이라고, 처음 당했을 때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강의실을 떠나려 하자 등 뒤로 남선재가 그를 불렀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몹시 당황해 하는 남선재의 모습이 보인다.

착한 녀석. 그를 걱정해 주고 있는 거다. 강의를 거부당한 고은교가 상처 받았을까 봐 마음을 써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딱딱한 기분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괜찮으니 다음 시간에 봅시다.”

이미 첫날도 결석한 녀석들의 출석은 다 빼 놓은 상태였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점수는 상대평가라 별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과제 점수는 다르지.

이건 낙제점이었다.

우시현과 이승우는 이번 학기를 마치고 졸업하지 못할 것이다.

글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둘 다 만점을 받는다면 아슬아슬하게 낙제는 면할 수도 있었다.

“아, 저, 교수님……!”

물론 그들이 D-가 뜨든, F가 뜨든 고은교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리에 서서 남선재에게 거듭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괜찮다니까. 가 봐요.”

남선재는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뭐 마려운 개처럼 낑낑댔지만 고은교의 단호한 태도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연구실로 돌아간 고은교는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출결 처리를 했다.

그때, 칸막이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은교 교수?”

“아, 네. 맞습니다만.”

고개를 들자 칸막이 앞에 나이 지긋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서 있다.

“나 특수과 신정철 학과장 교수일세.”

“아, 네…….”

학과장 교수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그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본적으로 정교수들은 자신만의 연구실을 가지고 있다. 이 건물에 올 일이 없다는 소리였다. 아마…… 자신에게 용건이 있어 온 것 같았다.

학과장 교수는 뒷짐을 지고 연구실을 한 번 쓱 훑어보더니, 고은교를 바라보았다.

“우리 특수과 학생들이 신세 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알다시피 축제에 특수과 애들이 바빠서 말이야. 우리 애들이 하는 일이 워낙 많잖은가. 그런데 이번 주 자네 수업, 휴강이 아니더라고?”

“아…… 네.”

“축제인데 너무 빡빡하게 하지 말지. 응?”

“…….”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은교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학과장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다른 과목들은 전부 이 시기에 휴강이란 말인가?

그는 무심코 생각한 대로 물었다.

“다른 과목은 다 휴강입니까?”

다른 과목은 어쩌는지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오늘이 축제라는 것도 남선재에게 들어서 알았다. 학부를 졸업한 지 꽤 되어서 축제 날 수업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또 그에게 오늘이 축제인지 아닌지 미리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대처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학과장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아, 뭐, 전공 필수 과목은 아닌 것도 몇 개 있지. 그 과목들은 워낙 중요해서……. 고 교수도 알지 않은가. 애들한테 중요한 과목이 있고, 아닌 과목이 있다는 것 정도는. 센터 가이드 출신이라 들었는데?”

그의 물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어쩐 건지, 학과장 교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처음부터 재깍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불쾌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지만 어떤 과목은 중요하고, 어떤 과목은 그렇지 않다는 소리를 ‘그렇지 않은 과목’의 교수 앞에서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는 최대한 공손하게 들리기를 바라며 대꾸했다.

“제 수업은 발표 수업이라, 발표자들이 수업에 빠지면 과제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발표자들을 제외한 학생들 출결은 따로 체크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절충안을 정해서 내밀었는데, 학과장 교수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학과장 교수가 연구실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걸음 자신에게서 물러나더니 말했다.

“뭐 수업은 본인이 하는 거니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

“아,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

“시간 강사라 그런가.”

그런 뒤 혀를 차며 학과장 교수가 돌아서서 나갔다. 그는 눈을 껌뻑거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

그동안 그는 한 번도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을 들은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햇병아리 시절에는 선배들이 자신을 굴리는 게 배우는 과정이라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로 인해 모멸감을 느끼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고 스스로를 자책한 적 없었다.

어차피 자신 역시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다 보면 선배들처럼 잘하게 될 테니까, 그러면 이 사회의 일원 중 하나로 제대로 자리매김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와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의 노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지 않는 인간들은 그만큼 제대로 되지 않는 인간들이라 그에게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다. 권력을 등에 업은 인간들, 남의 노력은 생각하지 않고 남이 성취한 것에 질시를 느끼는 인간들이 특히 그랬다. 심지어 그런 인간들마저도 장이주를 대할 때 최소한의 인정은 해 주었는데.

고은교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아니, 과연 이게 고은교의 탓일까?

붉어진 얼굴로 출결 처리를 바꾸면서, 그는 부당함과 민망함을 느꼈다. 이곳은 공용 연구실이라 수업을 준비하며 남아 있던 몇 몇 교수들과 조교들, 연구실을 드나드는 학생들이 알게 모르게 그를 흘끔대는 시선 때문에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그들 모두 학과장 교수가 고은교에게 하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축제를 핑계로 수업을 빠진 학생들의 결석을 모두 출석으로 바꿔 주면서, 그는 이렇게 하는 게 정말 옳은 건지 생각해 보다가 결국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강의 계획서를 처음부터 다시 쓰기로 결정한 건 바로 자신이었다. 학생들과 피드백을 나누고, 발표 리딩을 해 주고, 자신의 것이 아닌 수업에 욕심을 낸 건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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