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수업을 맡기로 결정했을 때, 고은교는 이렇게까지 제대로 수업을 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 가졌던, 고은교의 삶에 맞추어 그가 돌아왔을 때 다시 자신의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마음가짐을 새삼 복기했다.
단순히 머리를 부딪혀 기절해 있는 줄 알았는데 이상한 귀신 같은 게 몸에 들어와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소름이 끼칠 것인가.
이 몸과 인생은 자신이 아닌 진짜 ‘고은교’의 것이었다. 완전히 생각이 정리되었을 쯤에는 출결 처리가 전부 끝나 있었다.
“저, 교수님.”
노트북만 챙겨서 학교를 빠져나가는데, 누군가 연구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빠르게 걷던 걸음이 천천히 멈추었다.
“선재 군.”
남선재였다.
약간 초조한 얼굴로 그를 부르는 남선재를 발견한 순간, 고은교는 왠지 모를 뭉클함을 느꼈다.
남선재만큼은 고은교의 마음이 상했을까 봐 진심으로 걱정되어 시간 강사들의 연구실이 있는 건물까지 찾아온 것이다. 누구 하나 정도는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위안이 되어 주었다.
“교수님, 잠깐만요……!”
반가운 마음에 건물 입구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남선재의 머리 위로 뭔가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생각은 오히려 늦었다.
그는 즉시 몸을 날려 남선재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남선재는 그가 가진 학생 중 유일하게 제자다운 학생이었다. 고은교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의 피드백을 받아들여 보내라고 한 적도 없는 리포트를 다시 고쳐 보내 온 유일한 학생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은 본능적인 것이었다.
페인트가 가득 든 양동이와 판넬들이 쏟아지는 것을 분명 봤는데, 한참 기다려도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머리 위를 올려다보자 허공에 둥둥 뜬 물건들이 보였다.
아, 남선재는 염동력 에스퍼였지.
한 박자 늦게 남선재의 능력이 떠올랐다.
“괘, 괜찮으세요?”
“선재 군은?”
뒤집어진 양동이 아래로 끈적한 파란색 페인트가 흘러내렸다. 대체 물품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이런 걸 사람이 맞았다가는 정말 큰일 날 수가 있었다. 마침 염동 능력자인 남선재가 있어서 망정이지, 고은교가 이걸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어떻게 됐을까.
고은교가 이것을 맞았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순간 섬뜩함이 느껴졌다.
그래, 이것은 고은교를 노리고 떨어진 물건들이었다.
괴롭힘이라고 부르기에는 질 나쁜 악의가 섞여 있었다. 염동력은 떨어진 페인트, 양동이, 판넬을 막아 주었지만 지독한 페인트 냄새까지는 막아 주지 못했다. 코를 찌르는 페인트 냄새에 확실히 정신이 들었다.
더 이상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홀로 연구동에서 나왔을 때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적기에 남선재가 그를 구하지 않았다면 고은교는 최소한 페인트를 뒤집어 쓴 채 교정을 걸어 다녀야 했을 테고, 학생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저는 괜찮아요.”
순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남선재가 말했다. 남선재는 자신을 껴안고 있는 고은교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얼굴에 수줍은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고은교는 뻣뻣하게 굳은 채 남선재를 껴안은 팔을 풀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앉는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이 물건들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고은교는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 복도 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에스퍼가 보였다.
그들 역시 이 광경을 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은교가 남선재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끌어안고 눈을 꼭 감았던 것을. 그리고 남선재가 고은교를 구해낸 것을.
고은교가 그들의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
그는 확신했다.
누군가 괴롭힘을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우시현이나 이승우일 것 같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물론 교수인 그를 괴롭히는 움직임은 전문적이라기보다는 장난처럼 유치했고, 그렇다 보니 별 타격은 없었지만……. 쓸모없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점에서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 수준이 어떻다고 평하고 싶지는 않았다.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학생들은 고은교가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지 않았고, 발표 수준은 악질이라고 느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으며, 리딩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성적은 그들이 노력한 만큼 나갈 것이다.
중간고사는 거의 절반이 백지였다. 하지만 기말고사 수준을 떨어트려 주지는 않았다. 그러자 대부분이 답안지를 백지로 냈다.
이러면 F를 받아도 할 말 없는 것 아닌가.
‘재수강이나 먹어라.’
어떤 교수는 학생들의 시험 답안을 매기는 게 보통 골치가 아니어서 조교가 몇이나 필요하다는데, 자신은 아니었다. 채점은 순식간에 끝났다.
입맛이 씁쓸했다.
그는 연구실 안에서 채점된 답안을 기준으로 학교 홈페이지에서 성적표를 하나하나 입력하면서 학생들이 다음 수업은 제대로 듣기를 바랐다. 이대로라면 재수강을 하더라도 좋은 점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성적표 입력을 마무리할 때쯤에는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중얼거리며 시계를 보았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다.
연구실 조명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날이 어두워진 것뿐이었다.
그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북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당연한 순서처럼 잊고 있었던 오른쪽 발목의 통증이 재발하였다. 한 번 탈이 났던 관절은 날이 흐려질 때마다 아파왔다.
그는 저린 발목을 주무르며 비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우산이 있었나? 그럴 리가.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는 듣지 못했다. 이곳에서 지하철을 타려면 적어도 십오 분은 걸어가야 했다. 빌어먹을 한국대 캠퍼스는 너무 넓었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갈 수 없는 거리였다. 저린 다리를 절뚝이며 비까지 맞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산을 사와야지.
그는 빠르게 노트북을 종료하고 휴대 전화와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캠퍼스 안, 기숙사동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일회용 우산을 살 생각이었다.
시간도 늦었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어서 6시였는데도 불구하고 밖이 밤처럼 캄캄했다. 기숙사동이 어디였더라 기억을 짚어가며 부지런히 걷는데, 거친 빗방울이 뺨에 점점이 튀었다. 초여름 비 치고는 사나운 전조였다.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금세 비는 폭우가 되어 쏟아졌다.
“아!”
축제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에는 온갖 전단지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중 하나를 밟고 미끄러졌다. 넘어진 충격 때문인지, 저리던 오른쪽 발목이 이제는 숫제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욕실에서 미끄러졌을 때 심하게 다쳤던 건가? 머리만 치료할 게 아니라 발목도 제대로 치료했어야 했던 건데. 그때는 이 몸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래도 정신이 없었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자신에게 우산을 씌웠다.
저도 모르게 남선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시의 적절하게 그를 구해 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고맙…….”
“조심하셔야죠.”
“…….”
“교수님.”
미친 듯이 짓쳐들던 빗방울들이 묘하게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검은 머리칼의 남자는 그의 머리 위에서 손도 내밀지 않은 채 허리를 굽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선재는 갈색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는 남학생이었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는 결코 남선재가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키며 이승우를 올려다보았다.
“우산이 없으실까 봐 걱정되어서요.”
“…….”
걱정이라고?
그 말에는 이가 악물렸다. 이승우 때문이 아니라 전단지를 잘못 밟고 미끄러졌는데도, 이승우가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뒤에서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수치심 섞인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승우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음에도 도와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신이 어디까지 괴로워하는지 보고 싶어 이승우가 이 모든 것을 조장한 것 같다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래, 이 끔찍한 날씨마저…….
그날, 우시현과 이승우를 의심하는 고은교를 말렸던 건 남선재였다. 그 애는 우시현과 이승우가 아닌 다른 학생이 고은교에게 무슨 짓을 할 건지 떠벌리는 걸 듣고 달려왔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우시현과 이승우도 고은교를 구하기 위해 그 자리에 왔던 것일 거라고. 고은교가 판넬과 양동이, 그 안에 가득 담긴 페인트에 얻어맞고 엉망이 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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