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마디로 그들을 옹호하는 발언이었다.
우습지. 그들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한 걸음걸이였는데. 마치 고은교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남선재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그걸 알고 나니 남선재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는 것조차 의심되었다. 그럼 남선재도 평소에 그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이야기고, ‘다른 학생’이 그에 대해 험담하는 것을 듣는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남선재는 그 학생이 누구인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쯤 되자 남선재가 감싸려는 게 익명의 그 학생인지, 아니면 우시현과 이승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그는 높은 확률로 자신에게 물건을 떨어트리려 한 ‘다른 학생’의 정체가 그들일 거라 생각했고 최소한 그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명령’했을 거라 생각했다.
학생회라고 했으니 동기끼리 어울리지 않는 게 더욱 어렵겠지만, 그는 그쯤에서 남선재를 향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요즈음 얌전하게 구시잖아요. 떨어지는 보상도 없는데……. 그래서 교수님이 왜 이러는지 궁금해지더라고.”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젖은 머리카락 끝으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속눈썹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대충 훔쳐내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런데도 축축하고 비린 빗방울들이 사정없이 빗발쳐 귀밑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알아듣게 말하세요.”
머리가 푹 젖고 얼굴은 추위와 두려움에 하얗게 질린 주제에 신경질을 내는 고은교를, 어둠 속에 감춰져 있는 보석처럼 묘하게 빛을 내는 고은교를, 이승우는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좋아.”
돌연 이승우가 이를 드러냈다. 인적 없는 곳에서, 사방이 캄캄한 대학교 부지 안에서 그는 고은교에게 좀 더 허리를 굽혔다. 마치 귓가에 입술이 닿을 것처럼.
그러나 결코 피부와 피부가 맞닿지는 않았다.
“말해 봐, 은교야. 뭘 가지고 싶어서 그래? 우시현은 이미 가졌잖아. 남선재? 이번에는 남선재를 가지고 싶어?”
“…….”
“언제까지 헤프게 굴래?”
눈꺼풀이 떨렸다. 추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찰방찰방 물이 고여 드는 바닥에서 일어나려 하자 무도한 손이 그대로 어깨를 붙잡고 내려앉혔다.
바닥에 고인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그는 당황해서 이승우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그저 손등 위로 맞잡혀질 뿐이다.
고은교는 한순간 이승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한 대 맞거나, 최소한 더러운 것에 손댄 듯 자신의 손을 뿌리칠 것이라 여겼으나 이승우는 그러지 않았다. 행여나 고은교가 자신의 아래에서 벗어날까 봐 그런 듯했다. 아니면 자신이 그를 압제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거나.
언제까지 헤프게 굴 거냐고?
기분이 나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분노가 숨결을 통해 흘러나왔다. 씨근거리는 숨소리를 억누르려 노력하며 고은교가 날을 바짝 세웠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알 만한 분이, 마음대로 대화를 끊고 가시려고 하면 안 되죠.”
이승우는 그들이 퍽이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이게 대화야?”
“이렇게 대화하는 게 어울려 보이는데.”
그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이승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럼에도 이승우의 표정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캄캄한 빗속에서 가끔 우르릉 치는 번개에 우산 아래가 한 번씩 밝아질 뿐이다. 이 안에서 유일한 온기를 가진 건 이승우의 손뿐이었다.
그 사실이 몸서리쳐지게 끔찍했다.
이승우에게서 손을 떼어 내자, 이승우 역시 언제 고은교의 어깨를 짚었냐는 듯 자신의 손을 떼어 냈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지?”
“글쎄…….”
“아니라고 말하면 믿어 주기나 할 건가?”
“…….”
그러자 이승우의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고은교는 그 눈웃음에서 명백한 대답을 읽어 냈다.
빌어먹을.
고은교가 되어 처음 겪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이것 역시 그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오른쪽 발목 통증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발목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발목이 끊어지더라도, 최소한 이승우의 앞에서 아픈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턱에 튄 물방울을 닦으며 이를 갈았다.
어차피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승우가 무슨 짓을 하려면 진작 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지금부터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한대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계속해서 참을 이유가 없었다.
“너야말로 좀 얌전히 굴지 그래. 음침하게 뒤에서 이상한 일 꾸미지 말고. 남선재가 아니라 다른 학생이 맞았으면 크게 사고 났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생각이었지? 건물 위에서 물건 던지지 말라는 걸 부모님에게서 배우지 못했나?”
그 말에 이승우는 오히려 놀란 얼굴이었다.
“그걸 제가 했다고요?”
“…….”
“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구나.”
느릿느릿한 목소리에는 깨달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건 들을 거라 생각지 못한 솔직한 대답이었다. 단 둘만이 있는 게 분명한 이 음습한 교정에서 이승우가 굳이 거짓을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
“뜻밖이네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우시현과 이승우가…… 아니었나?
워낙 우시현이 그를 노려봐서, 이승우도 그다지 고은교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서…… 당연히 그 모든 것들이 그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지.’
자신의 에스퍼들이 그 지경까지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사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승우는 고은교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를 바닥으로 내리누른 채 이유 없이 그를 겁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승우의 실체였다. 그는 착각하지 말아야 했다.
침묵하던 고은교가 파리하게 질린 입술을 뗐다.
“지금 하고 있는 짓도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은데.”
“아……. 죄송해요.”
이 자식, 왠지 웃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승우가 허리를 폈다. 그의 눈이 우산 속으로 사라진다. 우산으로 절묘하게 반쯤 가려진 얼굴, 하관에는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뭐가 재미있어서 웃고 있는 걸까? 이 상황에서 웃다니.
정말이지 너무 성격이 나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이승우가 우산의 손잡이를 넘겨주었다. 정성스럽게도 이승우는 고은교가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적당한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다. 우산 손잡이 위로 고은교의 손이 잡도록 한 뒤, 그 위에 자신의 손을 덮어 씌워 꾹 쥐었다는 소리다.
고은교는 얼결에 우산을 받아 단단히 쥐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승우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저는 그냥…… 오늘 마지막으로 출근하시는 거니까 얼굴이라도 뵐까 했어요. 제가 그래도 교수님 에스퍼인데,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서. 아, 그리고 오해하실 만한 일도 있었잖아요. 교수님이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
“조심히 들어가세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하얗게 마른 검지가 살며시 올라오더니 고은교의 머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머리라도 다쳤냐고 묻는 것처럼. 그가 분노하기 전에, 하얀 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오른쪽 발목을 정확히 감싸 쥐었다.
“뭐 하는……!”
거짓말처럼 욱신거리던 발목이 조금도 아프지 않게 되었다. 너무 놀라서 근육이 경직된 듯했다.
이상하게도 그 감각을 이전에 한 번 겪어본 것 같았다. 동시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완전히 굳어서 아무 말 못하는 고은교에게, 이승우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멀쩡하게 걸어 다니셔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두 번 꺾이지 않게 조심하세요. 설마 이건 안 잊으셨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아프다고 울어 대셨잖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고은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침도 삼키지 못하고 멍하니 이승우를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욕실에서 넘어졌을 때 다친 건 줄 알았다. 오른쪽 발목이 유독 아픈 건 그쪽으로 넘어져서일 거라고.
이승우는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두 번 꺾이지 않게 조심하라는 건, 이미 그가 한 번 고은교의 다리를 손수 꺾어 놨다는 소리였다.
“제 스타일…… 아실 줄 알았는데요. 저는 직접 하는 걸 좋아하지, 몰래 하거나 사주하지 않습니다.”
그건 절대 착각할 수 없는 말이었다. 차라리 몰랐을 때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봬요.”
“…….”
“아.”
떨어지는 비는 이승우를 건드리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게 빗속을 걸어가던 이승우가 조금도 젖지 않은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호출할게요, 가이딩.”
저벅, 저벅 걷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이승우가 멀어지고 나서야 온몸의 긴장이 스르륵 풀렸다.
숨이 멈췄을 때 전혀 들리지 않았던 빗소리가 쏴아, 다시 쏟아진다.
마비된 청각이 복구된 것처럼.
‘미친 새끼…….’
더는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속을 가로지르는 섬뜩함이 전부였다. 그는 한참만에야 몸을 이끌고 일어날 수 있었다.
오른쪽 발을 질질 끌며, 이승우가 적선하듯 던져 주고 간 우산을 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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