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Second order
학교로부터 공문이 도착했다. 내년에 있을 1학기에도 교양 수업을 맡아 줄 수 있느냐는 정중한 내용이었다.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시간이 되지 않아 아쉽다는 내용의 답변을 써서 보냈다.
머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수업 같은 건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거다.
차가운 맥주를 들이키며 그는 노트북을 켜서 센터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리고 현장 가이드를 구하는 공지사항을 찾아 읽었다. 센터에서 근무하는 일반 가이드니 센터 커뮤니티 같은 활성화 되어 있는 곳을 뒤지다 보면, 어떻게…… 하나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망할.
그가 한숨을 내쉬며 다 마신 맥주 캔을 우그러뜨렸다.
‘전부 경력자만 구하네…….’
물론, 그가 팀장이었어도 경력자만 구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가이드에게 현장 체험이라도 시켜 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머리 제대로 박혀 있는 이능력자들은 경력자가 아니면 구하지 않았다.
애초에 현장을 배울 수 있는 것도 센터에서 지원하는 현장 이능력자 클래스에 가입하거나, 사설 기업에 입사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이렇게 좀 뒤적거리는 것으로 현장 이능력자 라이선스를 따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센터에서 일반 가이드 대상으로 하는 현장 이능력자 클래스에 등록을 해야 하나…….’
그렇지만 6주 동안 꼬박꼬박 하루에 네 시간씩 교육을 이수하는 건 참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냥 게이트를 하나만이라도 어떻게, 클리어를 하기만 하면 경력으로 인정받을 텐데.
무슨 방법이 없나 쩝쩝 입맛을 다시던 그는 곧 양치를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학기를 제대로 마쳤지만 하루하루 이어지는 날들은 지루하기만 했다.
그날 이후, 이승우와 있었던 일이 고은교의 몸에 무리가 갔던 건지 그는 몇 날 며칠을 꼬박 앓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쫄딱 맞은 게 문제였다. 앓은 지 오래였는데도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해야 했다.
국장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답답하고 지루하던 차에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는 일반 가이드로서 센터 국장 및 에스퍼의 가이딩 호출에 응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가이딩 호출이라고 하니 그날 이승우가 조롱하듯 가이딩 호출을 하겠다고 중얼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직도 아릿한 통증이 남아 있는 오른쪽 발목이 연달아 찝찝하게 느껴진다.
‘그 자식은 대체 왜 그랬을까.’
발작적으로 생각했다. 그를 괴롭힌 건 우시현과 이승우가 틀림없을 거라고. 그건 아마 이 몸의 원래 주인인 고은교의 ‘무의식’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 같았다.
과거, 이승우가 고은교의 오른쪽 발목을 꺾어 놨다는 말이…… 자신의 기묘한 생체 반응으로 미루어 봤을 때 거짓말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지간해서는 겁먹지 않는 성격이었음에도 그 서늘함에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당초의 계획대로 쥐죽은 듯 조용히 사는 게 정답이었을까?
하지만 어쨌든 무사히 학기가 끝났다. 정말 그들이 고은교를 죽일 듯 미워했다면…… 죽이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상해를 입히고자 했다면 이대로 순순히 학기를 마쳐 주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우시현은 고은교의 오랜 집착으로 인해 고은교를 의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이승우는 그런 고은교를 관찰하는 인간처럼 보였다. ‘관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끔 고은교를 징벌하는 역할이었던 것 같다는 설명이 주석처럼 추가되었다.
‘하아.’
이 관계를…… 언제까지 계속 이어 나가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크게 불쾌하기도 했고, 겁에 질리기도 해서 이 관계를 무조건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진짜 고은교는 이런 것들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우시현을 붙잡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대체 그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단숨에 끊어 버리자 생각했으면서도 고은교의 방으로 들어갈 때면 숨이 턱 막혔다. 고은교의 몸을 잠시 빌려 쓰는 처지의 그가 함부로 끝낼 수 있는 크기의 마음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실제로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가이드의 ‘my’ 목록에 당연히 활성화 되어 있어야 하는 애플리케이션 하단에 ‘에스퍼 삭제’ 버튼이 회색으로 비활성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던가.
그러지 않아도 센터에 가서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우시현과 이승우를 삭제하는 것과는 별개로 센터 애플리케이션의 문제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스퍼를 ‘my’에 들이고 삭제하는 것은 가이드의 고유 권한이었다. 이 권한이 막혀 있다는 것은 단순히 시스템의 문제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센터에 도착한 그는 일단 국장실로 향했다. 예전부터 여러 번 드나들었던 곳이라 길을 헤매지 않고 바로 갈 수 있었다.
문을 가볍게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린다.
국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창문가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중년 남자가 보인다. 그는 급할 것 없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근 넉 달 만에 보는 국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흰머리가 는 것 같았다. 아니면 요즈음 염색하는 것을 잊었거나.
“어서 오게, 고은교 가이드.”
“안녕하십니까.”
가볍게 인사하자 국장의 얼굴 위로 의외라는 표정이 스친다.
‘……아니, 인사만 했는데도 의외라고?’
그의 생각보다 고은교는 훨씬 더 망나니인 모양이었다. 머릿속으로 국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새침을 떨며 쓱 소파로 가 앉는 재벌 3세가 떠오른다.
그는 국장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까 봐 걱정했던 것도 있었고, 원래 고은교가 어떤 식으로 태도를 취했는지 몰라 국장이 무엇을 묻든 일단 모르쇠 하려고 했다. 사실 국장은 바쁜 사람이라서 그와 스케줄을 잡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장이 왜 자신을 호출했는지 모르겠다. 일반 가이드에 불과한 고은교를.
‘아, 혹시 얼마 전 위탁 강의 때문인가?’
강의를 다녀 온 가이드를 따로 부른 건…… 흠, 아무래도 그가 맡은 학생 중 두 명이 S급 이능력자여서일지도 몰랐다.
“앉게.”
“…….”
그는 순순히 국장의 지시대로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국장과 그는, 예전에는…… 말하자면 유능한 상사와 유능한 부하, 딱 그 정도의 사이였다. 꽤 장기적으로 근무했던 현장 가이드인 그는 상급 가이드로서 국장과 십 년 넘게 알고 지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국장이 일하는 방법이나 넘어서는 안 될 선 등 상급자의 취향에 대하여 빠삭하게 알게 되었다.
국장은 효율성의 극치를 추구하는 게으름뱅이였다. 나름 출신도 좋고 사람을 유들유들하게 잘 대해서 평판이 좋지만, 그는 국장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알았다.
우선 국장은 귀찮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국장이 나가야 할 출장도 여러 번 대신 나갔고, 국장의 일을 대신 해 주면서 딜을 해 자신의 이득을 꾀해 왔다.
……그 이득이란 것도 일의 연장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마 국장은 S급 에스퍼들이 S급 게이트에 나갈 준비가 되었는지 물을 확률이 높았다. 틀림없이 고은교의 강의 커리큘럼이 보고되었을 테니, 수업을 담당했던 고은교에게 그 에스퍼들의 역량을 묻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한국대 수업이 꽤 적성에 맞았던 모양이지?”
“예.”
그가 간과했던 것은, 과거 고은교가 국장과 얼마나 자주 만났느냐였다.
과거 국장이 고은교를 부르는 경우는 보통 고은교가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함이었다. 노골적으로 우시현에게 소유욕을 느껴서 그를 불법적으로 억류해 둔다든지, 자신의 뒷배를 이용해서 센터에 악영향을 끼친다든지 하는 기행을 벌일 때 국장은 그를 따로 만나 고은교가 정말 바라는 바를 묻고 그것을 적당히 들어주는 선에서 협상해 왔다.
다시 말해, 고은교가 센터 혹은 국장 자신에게 아무 이유 없이 이득을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흠, 자네도 알다시피 우시현 에스퍼와 이승우 에스퍼는 맡은 직무를 허투루 하는 법이 없지. 필요한 학점도 다 채웠고, 다음 학기에 등록은 하겠지만 수업을 들을 시간은 없을 걸세. 그 친구들도 슬슬 실무를 배워야 할 때 아니겠나.”
“아, 예.”
국장은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은교는 국장이 ‘그래, 그 친구들 말인데. 어느 등급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가?’라고 말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2점이 부족해서 필수 교양이 낙제가 되었다고 하더군.”
그렇게 말한 뒤 국장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고은교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 국장을 바라보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