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의 얼굴에 금세 깨달음의 빛이 번졌다.
그들은 졸업반이었다. 필수 교양이 낙제되었다는 건, 졸업이 연기되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자신이 준 성적 때문에.
하지만 고은교는, 자신은 정말로 공평하게 성적을 주었다고 자신했다.
“그러면 잘 출석했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다른 학생들은 다 수업에 빠졌는데도 출석으로 정상 처리해 줬다던데, 왜 그 둘만 쏙 빼놓은 건가? 다음 학기에도 수업에 강제로 참여시키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리고 국장은 고은교가 고의로, 부당하게 점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건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고은교는 즉시 대답했다.
“아닙니다.”
국장은 다 안다는 듯 혀를 찼지만, 고은교는 진심으로 황당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입을 열어 반론을 개진했다.
“우시현과 이승우 에스퍼는 발표 날 결석했습니다. 무단결석으로 인해 발표를 못 했고, 그래서 과제 점수를 0점으로 처리한 것인데 어떻게 출석 점수를 줄 수가 있습니까? 출석은 했는데 발표를 안 한 게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는데요.”
“아, 그랬구먼. 전혀 몰랐네.”
물론 어느 정도 보복 심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F를 맞은 게 우시현과 이승우뿐만은 아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백지로 낸 학생들은 예외 없이 시험 점수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둘만 콕 집어서 점수를 더 주라는 국장의 말은 아주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국장은 자신의 말을 하나도 귀담아듣지 않는 듯했으나, 표정만큼은 진실된 것처럼 꾸며내고 있었다. 눈빛에는 말이 안 통하니 피곤해 죽겠다는 기색이 가득 담겨 있는데.
‘……웃기고 있네, 이 노친네가.’
비위를 살살 맞춰 가며 달래고, 적당히 자기가 원하는 대로 휘두르려 하는 게 눈에 빤히 보인다. 심지어 국장은 이런 대화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
저러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가듯 푸념하며 ‘그 기업 사생아가…’ 어쩌고저쩌고했던 거란 말이지.
“그 애들도 학생이네. 듣자하니 하필 발표 날이 축제였고, 그 친구들은 학생회라 축제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맡았다 하더라고. 자네가 조금만 이해해 줄 수 없겠나?”
“…….”
학생은 개뿔.
얼마 전 바로 그 학생에게 발목 한 번 더 꺾어 줘야 얌전히 굴겠냐는 협박을 들은 이상 그런 마음이 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는 삐딱해지려는 표정을 애써 관리하며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국장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봐서 압박이라도 하고 싶은가 본데……. 미안하지만, 자신을 빨리 내보내고 야구 중계나 보고 싶어서 저러는 거 다 안다.
국장이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자네가 원하는 대로 우시현, 이승우. 두 명의 에스퍼를 전담으로 밀어 줬어. 그런데도 이렇게 섭섭하게 할 건가?”
“제가 국장님께요?”
반신반의하면서 묻자, 국장이 말했다.
“아니. 지금 내가 말하는 건 자네가 나를 섭섭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네가 전담하는 에스퍼들이 서운하도록 둘 거냐는 뜻이네.”
서운하다라. 그런 말로는 자신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고은교는 코웃음 치지 않으려고 애써야만 했다.
“우시현 학생과 이승우 학생이 졸업할 생각이 있었다면 제대로 발표를 해서 과제 점수를 받았을 겁니다.”
“정당한 사유가 있지 않았나?”
“그건 교수인 제가 결정할 문제인 것 같네요.”
“허어…….”
국장은 고집불통을 보듯 고은교를 쳐다보았다. 그 역시 지지 않고 국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잠깐 국장실에 침묵이 흘렀다.
뜻밖에도 국장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2차전을 하겠다는 것 같았다.
하긴, 지금 포기했다간 두 명의 S급 에스퍼를 내년 상반기에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효율을 중시하는 국장은 분명 상반기 센터 스케줄에 S급 에스퍼를 고려하여 대형 게이트들을 넣어 두었으리라.
국장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전담 에스퍼의 성과는 자네의 성과나 다름없어. 이렇게 행동하는 건 제 살 깎아 먹기밖에 안 되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아주 차분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학생들의 성과가 제 성과가 됩니까?”
“이번만 넘어가 주면, 우시현 에스퍼…… 아니, 그래. 우시현 학생도 자네의 성의에 감동해서 좀 더 잘해 주지 않겠나?”
고은교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국장을 쏘아보듯 바라보았다.
“그게 제 성과입니까?”
“원하는 것이 더 있는가?”
그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국장도 감이 다 죽은 건지 모른다. 고작해야 ‘우시현이 좀 더 잘해 줄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순순히 국장의 말을 들으리라고 생각하다니.
그는 물끄러미 국장을 바라보았다. 국장 역시 지지 않고 자신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국장님, 실망입니다.”
“……뭐라고 했나?”
“저는 생각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우시현 학생과 이승우 학생에게 내년에는 똑바로 수업을 들으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고은교 가이드!”
자리에서 일어나자, 국장이 노호를 질렀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자꾸 그러면 두 사람의 전담 가이드를 바꿀 수도 있네. 내가 못할 것 같은가?”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바라던 바다. 고은교는 얼른 국장의 말을 받아쳤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그래, 그러면…….”
“그 두 사람, 다른 가이드의 전담으로 돌려주세요.”
“뭐라고?”
“그 둘을 제 ‘my’에서 제외해 달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 얼마 전에 검색해 봤을 때는 두 사람, 파장이 맞는 가이드가 아예 없던데……. 그래도 기계 가이딩과 병행하면 어느 정도 쓸 만한 가이드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국장이 그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돌아올 고은교에게는 꽤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결정을 무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에 와서는 진짜 고은교가 이 몸으로 되돌아올지 말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 망할 자식들을 내 에스퍼 운운 하며 챙기고 싶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국장은 차마 ‘거짓말이지?’라고 묻지는 못했으나, 고은교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팔짱을 끼고 몸을 의자에 기댔다.
침음을 삼키며 국장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 맞아. 상급 가이드 중 ‘리듬게임’이 가능한 일부 가이드가 아니면 그들에게 가이딩을 해 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말일세.”
“…….”
‘리듬게임’이란…… 파장이 맞지 않는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억지로 가이딩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 가이드 사이에 그 행위를 ‘리듬게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신의 파장을 에스퍼의 파장에 억지로 맞춰 끼워 넣는 게 리듬게임이랑 비슷해서 그런 거지 별 이유는 없다.
가이딩 에너지 총량이 굉장히 많거나, 기운이 특별히 정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행위라 최상급 가이드만 가능한 가이딩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방법만 알면 현저히 효과가 떨어지지만 D급 가이드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현 방침상, 어느 정도 파장이 맞는 고은교 가이드 말고는 대체재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 그걸 빌미로 삼아 우시현 에스퍼와 이승우 에스퍼를 ‘my’에 넣은 것 아니었나?”
아니라고 하기에는 뭣했다. 자신 역시 ‘고은교’가 바로 그것을 노리고 ‘my’에 상급 에스퍼를 둘이나 집어넣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네, 맞습니다.”
순순히 대답하자, 국장이 피식 웃었다.
“의외군, 고은교 가이드. 원래 이렇게 솔직했나?”
“……거짓말하기를 바라셨습니까?”
“그건 아니야. 오히려 이편이 더 마음에 드는군.”
국장이 컵을 들어 식은 찻물을 호록 마셨다. 그들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고은교는 너무 자신을 드러냈나 싶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국장이 입을 뗀 것은 약 일 분이 지난 후였다.
“이제 시현이가 질린 모양이야.”
퍽이나 친근한 어투였다. 이 세상에는 고은교가 우시현을 따라다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나 보다.
“아니요. 노력했지만 우시현 에스퍼는 별로 저를 좋아하지 않아서, 이만 마음을 접을까 합니다.”
그는 국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의도하지 않아도 말투는 서슬 퍼랬다. 물론 국장은 이 정도로 에구머니나 하는 인물은 아니다. 국장은 태연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매만지며 반격했다.
“아하. 마음을 접으면서, 죄 지은 것 없는 그들 인생에 똥물도 좀 튀겨 주고?”
“…….”
“내가 아는 고은교 가이드는 이렇게 자신의 요구를 감추지는 않았어. 아까처럼 솔직하게 말해 보게. 원하는 것을 말해 봐. 우리 바쁜 사람들이잖나. 피차 피곤하게 굴지 말자고. 아, 시현이가 자꾸 가이딩 호출을 거부하나? 내가 알기로 그게 꽤 오래되기는 했지. 그래, 이제 슬슬 강제권을 행사할 때가 왔나 보구먼?”
“예?”
강제권? 무슨 강제권. 설마, 에스퍼가 응급 코드일 때 가이드가 억지로 가이딩을 해도 된다는 그 쓰레기 같은 법령을 말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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