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가이딩 강제권 말일세.”
국장이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번에는 차마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저건…… 저렇게 웃으면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고은교가 썼다고?
“…….”
순간 기분이 아연해졌다.
고은교, 얼마나 최악의 짓을 골라서 해 왔던 거야…….
가이딩은 성적인 접촉이나 다름없다. 그걸 어느 쪽이든, 합의 없이 강제로 했다면 그건 추행이고 강간에 준하는 범죄 행위였다. 당하는 사람은 불쾌함을 넘어 인격 모욕으로까지 느낄 수 있는 범죄 말이다.
국장은 이런 것으로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가듯 하는 모든 말들에 뼈가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고은교가…… 과거에도 몇 번이나 ‘그런 짓’을 국장의 묵인 하에 해 왔다는 이야기다.
‘미친.’
국장은…… 제정신인가? 정말로 강제권을 행사했다면, 정말로 그랬다면…….
그들은…… 어디까지…… 뭐를…… 했을까?
그제야 우시현이 고은교를 그렇게 죽일 듯이 미워했던 게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고은교는 이전에 이승우가 ‘가이딩은 언제 해 줄 거냐’는 식으로 한 말에 극렬한 거부 반응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아주 폭력적으로, 모욕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미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몇 번이고 저질러 온 짓이었다면.
그런 태도가 그들 눈에는 꽤 우스워 보였을 것이다.
목 안이 계속 당겨 왔다. 몇 번 심호흡을 하며 말을 고른 그가 툭 말을 뱉어냈다.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국장의 얼굴에 스친 건 일말의 안도감이었다. 혹시나 국장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강제권’ 같은 걸 거래 수단으로 먼저 제안했던 것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고은교가 일방적으로 요구해 왔던 것인 게 확실해졌다.
하긴, 자신이 아는 국장은 그런 비열한 짓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에 따라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잘못은 눈감아 주는 편이었다. 이러한 비화를 알고 나니 더욱 자괴감이 심해진다.
자신이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해 봤자 있었던 과거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왜 국장이 고은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알 것 같군.
누구라도 이런 비열하고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인간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을 터였다. 고은교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스트레스성 두통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생겼다.
국장은 여전히 살살 달래는 말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래, 고은교 가이드. 정말 시현이가 필요 없어졌다고 치겠네. 그러면 내년 수업에…….”
“내년 수업이라니요?”
“당연히 내년에도 한국대 위탁 강의를 맡을 생각이었던 것 아니었나?”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이미 고은교는 학교로부터 도착한 공문을 거절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단숨에 고개를 저어 국장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수업할 생각 없습니다. 이미 학교에 거부 의사도 밝혔고요.”
“뭐라고?”
국장이 눈을 멍청하게 껌뻑거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무엇이 왜라는 겁니까?”
그는 겨우겨우 신경질을 참으며 국장에게 되물었다.
“내년에 수업을 할 생각이 없었다면 왜 굳이 우시현 에스퍼와 이승우 에스퍼에게 낙제점을 준 거지?”
이 도돌이표 같은 질문만큼은 확실하게 끝맺고 싶었다. 우시현에게 강제권을 행사하고, 그를 숭배했던 것은 과거의 ‘고은교’였으나 우시현에게 낙제점을 준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그는 분명한 어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수업에 불성실했으니 그 점수를 줬던 겁니다, 국장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시현 학생과 이승우 학생 말고도 낙제를 받은 학생들이 아주 많습니다.”
“…….”
“이제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는 이로써 우시현과의 용무가 완전히 끝나기를 바랐다.
악연의 고리를 누군가 끊어야 한다면, 고은교는 스스로가 바로 그 역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몸이 한 일은 이 몸이 맺어야 한다. 때로는 그 어떤 것보다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더 이상의 변명은 없어도 될 것이라 믿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할 때였다.
“국장으로서의 부탁이네. 전도유망한 청년들의 시기는 반년이 늦춰지면 실제로는 3년 늦춰지는 거야. 어떻게 안 되겠나?”
등 뒤에서 국장이 한 번 더 그를 붙잡았다.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다가 이제는 아쉬운 소리를 한다. 고은교는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국장을 바라보았다.
……원래 국장은 효율성의 극치를 추구하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 그게 무엇이든 곧바로 접는 인물이었는데.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구는 걸까?
물론 억대 연봉이다 뭐다, 온갖 귀빈 대우를 해 주는 국가며 기업에 훌륭한 에스퍼들을 빼앗기고 있음은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의 국장을 보면…… 단순히 최상급 에스퍼들을 국가 전력으로 보유하기 위해 애국심으로 애쓴다기보다는 어떻게든 이 일을 좋게 좋게 해결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
“한 번만 더 고려해 주게, 고은교 가이드.”
그러고 보니 이승우가 대단한 집안의 자식이라고 했던 것도 같았다. 이승우의 집안에서 압박이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고은교가 국장을 바라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자신이었다면 국장이 뭐라고 말하든 그냥 문을 열고 나갔을 것이다.
“센터의 인력난을 충원하시려는 목적이신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국장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잔뜩 당겨졌던 활시위가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던 게 전부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는 철저하게 평형을 지키던 마음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더 마음을 쓴다면, 국장의 말대로 이 냉혹한 관계도 조금쯤은 부드러워질지 모르지.
고은교는 우시현과 이승우를 차례로 떠올렸다.
“……학교에 문의해 봐야 합니다. 이미 성적 일람은 올려 두었으니까요. 성적표도 이미 나간 것으로 압니다만. 제 동의만으로도 성적 수정이 가능하다면 학교에 메일을 보내 두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 줄 건가?”
“예.”
국장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스친다.
“왜?”
이제까지 계속 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저쪽이면서, 선뜻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하니 오히려 되묻는다. 그는 이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인력난은 해결되어야 하니까요. 센터에 상급 에스퍼 두 명은 큰 전력이 되어 줄 겁니다.”
국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지만 영 석연치 않은 얼굴로 국장이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네 꼭, 내가 아는 사람처럼 이야기하는구만.”
“…….”
아차. 너무 장이주처럼 말했나?
설마 국장이 자신을 알아볼까? 그러지 않아도 그는 국장과 꾸준히 정기적으로 대면하며 실적을 쌓아왔다. 국장은 눈치가 빠른 자이니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기대감인지 뭔지 모를 묘한 감정을 품으며 국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국장은 조금 눈썹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내가 무슨 생각을…….”
“…….”
그럼 그렇지. 보통은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살짝 혀끝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자신이 고은교로서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 지냈던 게 아니었다.
국장이 이어 말했다.
“정말 원하는 게 없나? 아, 혹시…… 새롭게 관심 가는 에스퍼가 생긴 건가. 그 에스퍼의 담당으로 배정해 줄까? 말만 하게.”
그것이야말로 어림없는 소리였다. 그는 두 번 다시 에스퍼와 이런 식으로 지독하게 얽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닙니다. 이제 조용히 살고 싶어요.”
“하하.”
국장은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싹 굳히더니 말했다.
“고은교 가이드,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나는 자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네. 필요한 게 있다면 지금 말하게.”
“…….”
하여간 노친네, 나이 먹으니 의심만 늘어서는.
딱히 필요한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비지니스적으로 서로 돕던 사이에 국장이 앓는 소리를 하는데다 고은교가 벌인 일 때문에 눈앞이 아득해져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해 보고자 한 것뿐이었다.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최근 간절히 가지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무심코 말했다.
“그러면 저한테 현장 가이드 라이선스를 발급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음? 그건 왜?”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국장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호기심은 긍정적인 반응이다. 당연히 거절당할 것이라 예상하고 말한 것이었는데, 뜻밖에 이 일을 아주 쉽게 일을 해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최대한 태연하려 애쓰며 말했다.
“그냥 현장이 궁금해졌습니다. 국장님이 저에게 잘해 주고 싶어 하시니 드리는 부탁입니다만.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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