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국장은 흔쾌히 그 자리에서 국장 권한으로 고은교에게 현장 가이드 임시 라이선스를 발급해 주었다. 임시를 정식으로 바꾸려면, 그러니까 다시 말해 고은교가 제대로 된 현장 가이드인 것이 보장되려면 최소 세 달 안에 게이트 하나를 클리어해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였다.
물론 그건 고은교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임시 라이선스 뒷면에는 이 카드의 효용 기간이 바코드 위에 적혀 있었다.
이렇게 손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일은 흔치 않다. 작은 플라스틱 카드를 쥔 채 고은교는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너무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누구에게서든지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서는 안 된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등 뒤로 국장이 새삼스럽다는 어투로 말했다. ‘자네, 못 본 사이 많이 바뀌었군?’
글쎄, 그게 뭐든 간에 ‘많이 바뀌었다’ 정도는 아닐걸.
그는 국장의 말을 웃어넘겼다. 그리고 뜻밖에 주어진 기회를 시의적절하게 잡아챈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임시 라이선스가 이렇게 손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수모가 싹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가 (비록 임시이지만) 현장 가이드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은 카드가 지금 손 안에 있다니. 단순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현장 가이드로 복직할 수 있는 길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가이드는 혼자서 현장으로 나갈 수 없으니 자신을 도와 게이트를 클리어 할 적당한 에스퍼를 구해야겠지만 그거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다.
‘아니지.’
센터에…… 고은교의 악명이 어디까지 퍼져 있을까? 신나는 걸음으로 센터 내를 활보하던 고은교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분명히 제대로 된 소문일 리는 없을 테니, 소문에 어둡고 현장에는 자주 나가는 에스퍼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꽤 어려움이 있을 터였다.
‘생초짜에 초면인 가이드가 대뜸 함께 게이트를 돌아 달라고 하면 순순히 돌아 줄 에스퍼가 있을까.’
지금 자신은 센터 내에서 알아주는 팀장, 장이주가 아니었다. 인맥은커녕 아는 에스퍼도 없는 일반 가이드 고은교였다.
물론 고은교 역시 아는 에스퍼가 있었다. 딱 두 명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 무너져도 그 둘에게만큼은 도움 같은 걸 받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장이주라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가 죽은 뒤로 다른 가이드들을 눈독 들이며 어디로 갈아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장이주’의 에스퍼 중 하나를 슬쩍하면 어떨까?
‘my’ 목록에 있는 에스퍼 대부분은 다른 가이드를 만났겠지만, 그러지 못한 녀석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고은교는 B급 가이드지만, 가이드를 얻지 못해 공실이나 다름없는 에스퍼 중 그와 파장이 일치하는 상급 에스퍼가 있을 수도 있었다.
가이딩에 파장이 중요하다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파장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기만 하면, 몇 단계나 되는 등급 차조차 단숨에 뛰어오르는 막강한 효율을 보였다.
뭐, 정 안 되면 ‘리듬게임’이라도 하면서 살살 꼬시면 되고.
고은교는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정순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발현 직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운을 사용한 적 없는 사람처럼. 따라서 그는 고은교로 각성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같이 가이딩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연습을 해야 했다.
에스퍼에게 이능력이 손과 발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처럼, 가이드에게 가이딩 에너지 또한 자신의 손과 발이었다. 단, 가이딩 기운은 말 그대로 능력이 아닌 ‘기운’이어서 체내에 있는 기운을 끄집어내서 사용했다. 그 때문에 몸 안에 최대한 머무르게 했다가 끄집어낼수록 가이딩 기운이 정순해지는 것은 통상적인 개념이었다. 그래서 가이드는 발현한 이후부터 최대한 파장 맞는 에스퍼를 만날 때까지 가이딩을 하지 못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이 규칙이 지켜지는 일은 드물었다.
이론대로라면 그 어떤 가이드든 5년 이상 가이딩을 하지 않고 체내에 기운을 머물게 두면 상급 가이드에 선회하는 정순한 기운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데, 그가 아는 한 그런 가이드는 본 적이 없다. 능력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게 아닌 이상 모든 가이드는 발현 즉시 에스퍼를 도우려 하니까.
그건 일종의 이타심이었다.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됐다. 누군가에게 필요가 되었을 때 인정받는다고 느끼는 다정한 사람들이야말로 가이드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설마, 고은교가 이타심이 없는 유일한 가이드여서 이제까지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 기운이 정순해졌겠는가?
짧게 웃으며 센터 애플리케이션을 들여다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침대 주변에 번쩍거릴 정도로 광이 나 있는 사진들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정말일지도?’
우시현을 숭배하느라 다른 에스퍼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지도…… 아니, 그렇지만 최소한 우시현에게는 가이딩을 해 주었겠지. 센터 애플리케이션에 있는 기록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니 고은교의 기운은 그저 그가 스스로 타고 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국장에게 말한 대로 한국대에 성적 정정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휴대 전화에서 익숙한 알림이 울렸다.
아무 생각 없이 알림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시현 에스퍼의 가이딩 호출이었다.
*
알림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엄청난 불쾌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우시현이 자신을 호출한 것이 믿을 수가 없어, 고은교는 한동안 휴대 전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아야 했다.
이승우라면 몰라도 우시현은 고은교와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판넬과 양동이, 페인트가 머리 위로 쏟아진 그 사건 이후로 말이다.
‘……대체 왜?’
우시현이 정한 가이딩 예약은 저녁 7시였다. 그는 주말, 그것도 토요일 저녁에 아무런 약속이 없는 건지 가이딩 예약을 그때로 잡아 두었다. 수업에서 볼 때는 친구가 많아 보였는데 실은 어지간히 겉도는 녀석이 아닌가. 이 시간이라면 집에서 편하게 누워 쉬거나,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하는 게 보통이었다. 적어도 학부 시절의 자신은 그랬다.
고은교의 몸에서 눈을 뜬 이후로 이 시간에 한가해진 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러지 않아도 우시현과 이승우가 무슨 수로 가이딩 없이 버티고 있나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때 조별 리포트 피드백을 빙자하여 물으려고 했다가 발끈한 우시현의 태도에 그러지 못하고 유야무야 넘어갔던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몰라.’
우시현이 자신을 가이딩 호출로 부른 이상, 순순히 이 자리에 나가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우시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적당히 가이딩을 해 주고, 그동안 가이딩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예의상 물어본 다음, 아주 온건하게…… 가이드를 바꾸라고 권유할 생각에서였다.
그때 우시현이 고은교 자신에게 아주 싸늘하게 굴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게 되었으므로, 짧게나마 우시현을 가르쳤던 교수로서 어른스러운 애티튜드를 먼저 취하기로 했다.
고은교가 우시현을 짝사랑한다는 이유로 국장과 결탁해 ‘가이딩 강제권’을 행사해 가며 그와 억지로 가이딩 했다면…… 아마 우시현은 그 성질머리로 고은교가 하고 싶은 대로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겠지만, 고은교의 불필요한 접촉을 모두 막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왕 강제권을 쓴 상황이니 아마 고은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시현에게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표현했을 확률이 높았다.
국장까지 움직여 우시현을 가지려 발악한 정황이 이렇게 확실하다면…….
우시현은 아마 상상도 못할 일들을 겪었으리라.
그래서 국장에게 우시현과 이승우를 자유롭게 만들어 달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서는 솔직히, 우시현이든 이승우든 고은교에게서 탈주가 가능해진 순간 바로 사라지리라 생각했는데…….
우시현은 굳이 왜 지금 가이딩을 하자고 하는 걸까.
그의 생각이 맞다면, 우시현은 이대로 고은교를 무시해야 옳았다. 그에게 고은교는 엄청나게 끔찍한 존재일 테니까.
‘무슨 생각인지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서 그는 우시현의 호출에 응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받은 월급을 기념해서 센터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가이드 전용 손목 워치를 샀다. 게이트에서도 실생활에서도 이 물건은 아주 유용했다. 그는 힐끗 시선을 내려 시간을 확인했다.
‘좀 늦는군.’
편한 검은색 티셔츠와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 나왔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초조한 듯 다리를 까딱이며 그는 5분에 한 번씩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그는 센터 가이딩실이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이능력자는 센터에서 가이딩을 주고받아야 했다. 가이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게이트가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 하는 모든 가이딩은 불법이었다.
“이 새끼가…….”
그리고 30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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