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24화 (24/132)

#24

처음 10분은 그냥 늦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20분이 지나자 이 자식이 설마 시간을 헷갈린 건 아닌가 생각했고, 30분이 지나자 고의임을 확신했다. 하긴 개가 제 버릇을 남에게 주겠는가. 끝까지 사람을 괴롭히려 들다니,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창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오늘 우시현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30분이 지나자마자 의자를 걷어차고 일어섰다. 겉옷을 챙겨 입으려는 순간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센터를 떠났을 것이다.

“오랜만에 뵙네요, 교수님.”

“…….”

그는 조금 놀란 얼굴로 섰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인사한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가이딩실에 들어온 건 우시현이 아니었다.

이승우였다.

“죄송합니다.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시현이 걸로 했거든요.”

“…….”

“이해해 주세요. 어쨌든 저도 교수님 에스퍼 아닌가.”

맞는 말이었다. 이승우는 조금 제정신이 아니기는 했지만, 무조건 적의를 표출하며 손부터 나가는 우시현에 비해 말이 통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이승우는 우시현과 친했고, 우시현처럼 그의 ‘my’에 있는 에스퍼였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우시현과 가이딩 방법을 공유하고 있을 터였다.

어차피 이승우에게도 가이드를 바꾸라는 권유를 하려고 했다. 순서가 바뀌었을 뿐 그가 하려던 일인 건 같았다.

“어차피 제가 호출했으면 나오지도 않았을 테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는 예전의 고은교가 어떤 식으로 굴었을지 짐작하는 것에는 신물이 난 상태였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어차피 임시긴 하지만, 이미 현장 이능력자 라이선스는 국장을 통해 따 둔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더 이상 교수가 아니니까 학생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앉아요.”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빙글빙글 웃던 이승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물론 이승우가 한 번 만에 고은교의 말을 듣는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예 고은교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텅 빈 머리 괜히 쥐어짜지 마시고 그냥 얌전히 좀, 있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 정도 말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하여간에 거만한 자식.

“앉으라니까.”

“…….”

“27분 남았네요.”

입으려던 겉옷을 다시 빈 의자 위에 걸어 놓고, 고은교는 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 다음 가이딩을 위해 손을 책상 위로 올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이승우는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정말 이상한 표정이군.

정말로, 이승우의 얼굴 표정은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건 웃는 것도 무표정한 것도 아닌 어중간한 얼굴이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는데 그것이 자연스럽다기보다 비스크 인형처럼 어색해 보였고, 눈꼬리는 파르르 경련하며 이쪽을 보고 있다.

“……교수님, 그러니까 이건……. 제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지금 이승우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무지 ‘원래의’ 고은교가 이런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미 그는 자신이 써야 할 일 년 치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

이제 자신은 교수도 아니고 이승우는 무사히 졸업할 테니 더 이상 학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와 이승우는 동등한 위치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말을 왜 이렇게 안 들어?”

“…….”

“목 아프니까 앉아.”

그 말에 이승우는 흠칫하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나 골똘히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이딩을 하든 이야기를 하든 앉아서 해야 할 일이었다. 이승우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천천히 방 안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반말했다고 성질내지 않는 것을 보니, 고은교는 평소에 반말을 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승우와 우시현은 고은교와 제법 나이 차이가 났다. 한…… 다섯 살? 여섯 살 정도?

소리 없이 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승우가 이쪽을 빤히 봤다. 그 모습이 꼭 학습이 덜된 로봇 같았다.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으면 움직일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굳어 있을 따름이었다. 당장이라도 잔뜩 쌓인 말을 쏟아낼 것처럼 굴지 않았나? 고은교는 입을 다물고 있는 이승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오히려 이편이 나았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손 내밀어.”

그는 이번에도 지시했다.

“…….”

이승우는 생전 처음 본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내밀어진 고은교의 손을 응시했다. 마르고 창백한 손을.

이승우가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어젯밤이었다.

그는 센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말이 센터였지, 국장 직속 부서에서 온 연락이었다. 그 연락의 내용이란 참으로 기상천외했다. 내용인 즉슨, 원한다면 고은교 가이드가 아닌 다른 가이드로 담당을 바꾸어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와 우시현은 고은교가 아닌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것이 불가능했다. 고은교 외에 파장이 맞는 가이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스퍼에게 최소 가이딩을 보장해 주기 위한 특약은 그들에게 오히려 족쇄가 된 지 오래였다. 특히 이 특약의 가장 빌어먹을 점은 체내 위험률 수치가 높은 에스퍼일수록 가이드의 지침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가이딩이 부족하면 에스퍼를 정상인의 범위에서 제외시키기 때문이었다.

고은교는 그들이 가이딩이 부족하여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꼭 자신에게 정기적으로 가이딩을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정작 그 고은교는 자신들에게 가이딩을 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이딩은커녕 자신의 호출에는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으니까. 한마디로 고은교는 우시현에게만 관심이 있었고, 우시현을 센터에서 빼돌리려는 이승우가 괘씸하여 벌주고 싶었던 거지 이승우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학부를 완전히 졸업하고 나면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된다. 센터에서 의무 복무 기간인 일 년을 채우고, 대학을 졸업하면 센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유 의지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학에서 졸업하자마자 센터를 떠나기 위해 3학년부터 센터에서 일했다. 우시현은 술만 마시면 이 빌어먹을 기간만 끝나면 에스퍼 따위는 때려치우겠노라고 말했다.

물론 고은교가 그들의 성적을 끝장냈을 때는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는 생각이었다. 역시 고은교답다는 생각도 했다. 어떻게든 졸업을 유예시켜 그들을 센터에 묶어 두려는 속셈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필수 교양의 교수가 된 터였으리라.

어울리지도 않는 교수 노릇을 꽤나 훌륭히 해내려고 했던 것은 의외였지만.

어차피 센터 복무 기간이 조금 남은 터였다. 한 학기 정도는 더 버티자고 생각했다. 노발대발하는 우시현을 달래고 이승우는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내년에 있을 필수 교양 강좌를 늘리는 방향으로 교과 커리큘럼을 바꾸도록 했다.

그런데 바로 어젯밤, 그들은 고은교에게서 풀려났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고은교가 마음을 바꾸었다는 게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겼다. 우시현은 제까짓 게 별 수 있느냐고, 어차피 아무리 발악해 봐야 6개월 뒤면 끝인데 지금이라도 자포자기한 것이 아니냐 하였으나 이승우는 고은교의 생각이 어떤지 간파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예약하면 고은교가 만나 주지 않을 테니, 휴대 전화를 잃어버렸단 핑계로 우시현의 이름을 빌려 예약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승우는 상당히 순순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고은교의 생각 일체를 파악하려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사실…… 모르겠다. 저 손을 본 순간, 고은교의 지시를 들은 순간, 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본능에 가까운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이승우는 고은교의 지시대로 그의 손을 잡았다.

“……네.”

뒤늦은 대답을 들으며 고은교는 눈을 깜빡였다.

솔직히 그는 이승우의 기세가 워낙 심상치 않기에 자신의 손을 잡고 부러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걸 자신이 왜 잡아야 하냐며 화내고 가이딩실을 나가 버린다거나.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아까처럼 적대감을 보이는 대신 홀린 듯한 얼굴로 얌전히 구는 게 이상하기는 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승우의 손에 기운을 흘려 넣었다.

순간적으로 이승우의 손과 그의 손이 연결되었고, 그는 이승우에게 다시 운명적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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