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러면 안 된다. 가이딩 시간도 초과됐고, 에스퍼의 버릇을 초장부터 잘못 들일 수는 없었다. 지금 허용해 주면 앞으로도 이승우는 대중없이 고은교를 만지고 키스하려 들 것이었다.
가이딩을 끊으려 노력하자 마구잡이로 빨리던 기운이 서서히 멎어갔다. 그게 안타까운 건지 이승우가 옅은 한숨을 흘리며 혀로 아랫입술을 계속 할짝거렸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됐나 싶어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다시 고개를 꺾어 온다.
이건 계속하자는 신호가 아니다. 왜 자꾸 키스하려고 드는 거야.
결국 그는 이승우의 뒷머리를 붙잡고 그의 머리를 뜯어내듯 떼어 냈다.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억지로 머리가 들렸다.
“……그만해.”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승우의 얼굴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는데, 어찌나 자신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그곳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정말 일을 치르겠는데.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계속 이승우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을 수는 없는데, 이 손을 놨다간 그대로 아까 하던 폭풍 같은 키스가 다시 시작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눈을 부릅뜨고 대답을 듣기 위해 이승우를 다그쳤다.
“어? 그만하라고.”
한참 동안 새카맣게 어두워진 눈이 고은교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네.”
마침내, 이승우의 입술에서 마지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적어도 자기 입으로 그만하겠다고 했으니 손을 풀어도 될 것 같았다.
그는 쫓기듯 이승우의 머리를 놔주고 일어났다. 구겨진 티셔츠를 내리고, 반쯤 헐거워진 바지를 다시 제대로 입었다. 돌아보니 이승우는 잡혔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보자 머쓱했지만, 그는 헛기침을 하며 할 말을 했다.
“나는 간다.”
“…….”
“다음에는 네 센터 앱으로 예약해.”
뭔가를, 여러 가지를 물어보려 했었는데……. 겸사겸사 일전에 했던 협박에 대한 사과도 받고, 우시현에 대해 묻고, 앞으로의 관계는 어떻게 해 나갈 건지에 대한 그런 이야기들을…….
하지만 생각지 못한 키스를 해서인지 생각이란 생각은 죄다 휘발되어 있었다. 일단 그는 최대한 빨리 가이딩실을 벗어나려 했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엉켜서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겉옷을 입지도 못하고 손에 대충 든 채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뭔가가 그를 뒤에서 끌어당겼다…… 당연하지…… 물론, 지금 그럴 만한 사람은 이승우뿐이니까.
다리에 힘을 줘야했다. 거의 안기듯이 끌어당겨졌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장신의 남자가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역광을 받아 음영이 드리워져 새카만 얼굴이 그곳에 있다. 까만 얼굴로 고은교를 붙잡은 채, 이승우가 속삭였다.
“데려다 드릴까요?”
“…….”
“차 가져왔어요.”
귀가 간지러웠다. 이승우가 어찌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꾀어내는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일부,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를 오래 만나지 못한 에스퍼들이 ‘리듬게임’을 받고 난 다음 상급 가이드에게 집착적으로 매달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이딩을 받기 전에는 안하무인이나 다름없는 태도를 유지하다가 가이딩을 받고 난 이후에는 아주 사랑에라도 빠진 것처럼 구는 식이다.
당연하지만 그런 반응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구는 이유는 단지 몸 안 가득 차올랐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가이딩을 마약처럼 원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체내에 가이딩을 흡수하기 시작하면 몸 상태가 완전히 정상적으로 자리 잡힐 때까지 이 증상은 계속해서 심해진다. 따라서 이건 에스퍼의 인간성 문제라기보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게다가 이승우가 받은 것은 ‘리듬게임’도 아니었고, 순전히 매칭률 높은 가이드와 가이딩을 한 것이었으니 아무리 냉철한 그라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괜찮다.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둘 중 한 사람만이라도 제정신을 차리면 된다. 고은교는 심하게 뛰는 가슴을 꾹 내리누르며 길게 심호흡을 했다.
‘데려다 드리긴 뭘 데려다 드려…….’
하지만 이런 상황에는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딱딱한 뭔가가 그의 엉덩이를 찌르고 있었다. 가이딩을 받으면서 발기하는 변태 새끼가 바로 등 뒤에 있었다.
“너는 좀 식히고 가.”
그를 뿌리치고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리 없이 은근한 힘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는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고, 이승우는 좀 안 놓아 주려고 하니까.
정말 이승우가 고은교에게 힘자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닐 거다. 에스퍼가 마음먹으면 일반인의 몸으로는, 심지어 이렇게 가까이에서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 적잖이 이승우가 봐주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힘 차이가 명백한 것이 신경질이 났다.
“데려다주고 싶어요.”
그냥 ‘데려다주기’만 할 게 아닌 게 뻔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다니. 물론, 거짓말을 한다는 자각조차 없다는 얼굴이지만.
그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헛소리 하지 마.”
이승우는 아주 아쉽다는 태도로 고은교를 놔주었다.
*
이건 사고다. 무조건 사고다. 사고였다. 사고가 아닐 수 없다…….
‘하아.’
장이주였을 때 점막 가이딩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시로 점막 가이딩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 건 정말, 유사시이거나 가이드와 에스퍼가 서로 ‘연애’라도 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하지 않는 짓이니까.
다만 점막 가이딩을 하면…… 아무래도 속살을 맞대는 것이기 때문에 가이딩 효율이 무척 좋아져서, 가이딩이 부족한 에스퍼들은 본능적으로 점막 가이딩을 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있어 점막 가이딩이란, 정말 말 그대로 ‘가이딩’일 뿐이었다.
그는 애써 침착하려고 애썼다.
이승우는 가이딩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것 같았으니 자신의 충동을 제어하기 어려웠을 테다. 당시엔 가이딩을 받은 직후이기도 하고, 그가 이승우에게 해 주었던 가이딩은 인스턴트나 다름없는 가이딩이었다.
아무래도 가이딩이 고갈되어 있던 체내에 가이딩이 한꺼번에 채워졌다가 몸 밖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니까…… 어떻게든 가이딩을 다시 채워 넣고 싶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키스부터 한 거겠지. 일단 눈에 보이는 점막은 눈, 코, 입 정도인데 코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보다는 입술을 여는 게 더 쉽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했을 테니까.
그래, 그 정도로 이승우의 상태는 안 좋았다. 그러니 막무가내로 키스한 건 이해한다. 만지려고 든 것도…… 그래, 뭐. 사고였으니까.
고은교는 지금 이게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싫어서 죽을 것 같으면 또 모르겠는데, 오히려 좋아서 이승우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입 맞추었던 기억이 있다. 이건 아마 이승우를 처음 봤을 때, 그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연관 있을 것 같았다.
뜨겁게 문질러졌던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한숨을 내쉬길 여러 번, 침대에 푹 엎어지며 괜히 센터 애플리케이션을 들락날락했다.
당연히 그다음 날부터 가이딩 호출로 알림이 미친 듯이 울릴 줄 알았다.
그는 이승우가 자신을 다시 호출한다면 기꺼이 나갈 생각이었다. 그가 고은교의 가이딩을 바라는 것 같으니, 이승우에게 ‘너만 괜찮으면 가이딩을 주기적으로 해 주겠다. 단, 앞으로 이런 식으로는 가이딩 하지 말아 달라’는 말도 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호출이 오기만 한다면.
‘왜?’
하지만 이승우는 그를 호출하지 않았다…….
‘왜지?’
가이딩에 넋이 나가 어떻게든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던 절박한 모습을 기억하는데.
하루, 이틀, 일주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온갖 잡념이 머릿속에 떠돌아다녔다. 듣기로는 가이딩이 고갈되어 있는 에스퍼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이 따라가기 힘들다고 했다. 아주 드물지만 어떤 에스퍼는 자신의 가이딩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바뀌는 걸 몹시 혐오해서 두 번 다시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보통은 가이딩을 모르면 몰랐지, 일단 한 번 알고 나면 모르기 전으로 돌아가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러니 이승우도 그렇게 싫어하던 ‘그’ 고은교에게 키스까지 한 것일 테고, 만일 그것을 후회하게 되었다면 아마…….
더 이상 고은교에게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토록 꺼려하고 싫어하던 고은교에게 가이딩을 빌미로 매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게 이승우의 자존심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몹시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이승우의 태도를 존중하기로 했다.
억지로 키스당한 건 자신인데 왠지 차인 것도 자신인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허, 참.’
뜻하지 않게 점막 가이딩까지 해 줬는데,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이가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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