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다시 센터 애플리케이션에서 검색을 해 봐도 고은교 이상 이승우와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는 없었다. 자신 역시 과거의 고은교가 싸지른 똥을 치우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이승우에게 제대로 된 가이딩을 해 주며 이승우의 삶을 정상 궤도로 돌려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연락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이승우는 어쨌거나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흠…….”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니까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쩐지 찜찜한데.
고은교는 한숨을 푹 내쉬며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려 본 것이 처음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때였다.
휴대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휴대 전화를 들었지만, 발신인은 저번과 동일했다.
고은서.
고은서가 누구였더라 하는 의문도 잠깐, 곧 그는 고은서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고은교의 몸으로 처음 눈을 떴을 때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일로 너와 집안의 연은 끝이라며 악담을 퍼붓고 끊은 고은교의 혈육(으로 추정되는)이었다.
‘뭐지? 그때 아주 집안의 연을 끊을 것처럼 전화를 하지 않았나……?’
그때의 경험은 너무 강렬한 것이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당황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고은교.]
처음 전화했을 때 무작정 거칠게 화를 내던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고은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정하게 들렸지만, 그건 사실 그녀의 목소리 자체가 냉한 편이라 그런 것 같았다. 말투는 어느 정도 너그러워진 것 같다고 하면…… 착각일까?
그때 신랄하게 그를 비꼬고, 힐난하던 목소리는 그가 대답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기까지 했다.
“……네.”
전화기 너머로 흠, 하는 차분한 목 울림소리가 들렸다.
[한국대 수업이 의외로 적성에 맞았나 보지? 학생들이 준 강의 평가는 별로였지만, 실제 수업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던데. 그렇게 열심히 할 생각이었던 건 몰랐네. 평소처럼 우시현 에스퍼한테 미쳐서는, 그 녀석을 보려고 일부러 위탁 강의를 맡은 줄 알았어.]
“…….”
[이제 마음을 좀 고쳐먹었니?]
이 말에는 도대체 무엇이라 대답해야겠는가?
그는 ‘원래’ 고은교가 고은서와 어떤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전혀 몰랐다. 때문에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몰라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 대답을 하자.
“예. 뭐.”
너무 무뚝뚝했나? 그래도 연을 끊겠노라 목소리 높이기 전까지 따로 카드도 챙겨 주며 돌보아 주던 혈육인 것 같았는데. 뭔가 애교 섞인 말이라도 덧붙여야 할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그래.]
고은서는 고은교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지, 아니면 자신의 애교에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한 건지, 고은교의 강의에 대해 짤막하게 평했다.
학생들의 리포트와 녹화 파일을 봤고, 그렇게 썩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은교가 처음으로 사고를 치지 않고 제대로 완수한 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는 말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한 명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아니지. 남선재 딱 한 명만 인정해 주었던 강의를 타인이 칭찬해 주자 조금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 그리고 ‘별로요’, ‘네’, ‘감사합니다’라고 간간이 대답하며 고은서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전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제 전화가 끊어지나 싶은 순간, 고은서가 선심 쓰는 말투로 보상을 주겠다고 했다.
“보상이요?”
[그래, 심 비서가 카드 주러 갈 거야.]
카드!
그건 확실히 눈이 번쩍 뜨이는 보상이었다.
그는 바로 들뜨려는 엉덩이를 내리눌렀다. 처음 이 몸에서 눈을 떴을 때 더도 덜도 말고 현상 유지만 하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라도 이 몸에서 내쫓기고 진짜 고은교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은교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뿐더러, 앞으로의 삶이 욕심났다.
그래, 욕심. 욕심 말이다.
더 잘 살고 싶은 것. 다시 현장 가이드를 하는 것. 아픈 몸이 아닌 건강한 몸으로 열심히 살고 싶다는 건전한 욕망. 그는 상급 가이드로서 실적을 내는 것은 아니더라도, 현장 가이드로 복귀해서 가이드로서의 일을 하고 싶었다. 성취감은 언제나 그가 인생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고은서가 주는 카드가 있다면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고 현장 가이드가 되기 위한 준비에 힘을 쏟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듣자하니, 요즈음 우시현 에스퍼가 네 말을 잘 듣지 않는다지? 알아보니 멋대로 네 ‘my’ 목록에서 이탈했다더구나. 다시 제자리로 돌려 뒀다. 네가 그놈에게 미쳐 있는 게 별로 보기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좋다는 놈이니.]
“……예?”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 끊는다.]
그는 멍하니 눈을 껌뻑거리며 전화가 끊어진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
몹시 초조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말고는, 정말이지 할 수 있는 게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날 이승우는 그에게 가이딩을 받고 난 뒤 두 번 다시 가이딩 호출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my’ 목록에 여전히 그가 있는 것은 확인했다. 반면에 우시현은 자신의 의지대로 ‘my’를 벗어날 수 있다는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일 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고은교의 ‘my’를 탈퇴했다. 그것 역시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시현이 그대로 있다.
바로 그 자리에.
고은교의 ‘my’ 목록에…….
“하…….”
이건, 이건 꿈이다. 꿈이어야 했다.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도련님?”
사무적인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은서가 보낸 장신의 남자를 응시했다. 고은서의 측근이라는 ‘심 비서’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처럼 차가운 인상의 남자였지만, 말투만은 친절하고 예의가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고은교의 출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어디 대단한 기업 회장의 자식인 건 확실한 것 같았다.
물론 이제 와서 고은교가 속한 대기업이 어딘지, 그 대기업의 가계도는 어떤지 눈앞의 남자나 고은서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말 그대로 자신이 고은교가 아니라는 것을 시인하는 일이니까. 어쩌면 정말로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 남자는 고은서의 지시로 고은교에게 카드를 전달해 주러 이 집까지 온 참이었다.
“괜찮아요. 카드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예. 전무이사님께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은서는…… 전무이사인 모양이었다. 목소리는 대단히 젊은 것처럼 느껴졌는데 의외였다. 아니, 의외가 아니겠지. 낙하산들은 대부분 젊었다.
“……아닙니다.”
심 비서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반응이 늦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닌데? 고은교가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심 비서가 헛기침을 했다.
“나중에라도 필요한 게 생기시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 주십시오.”
“아, 네. 참, 그리고 심 비서님. 전무이사님께 우시현 에스퍼 일에 대해서 꼭 제 말 좀…… 재고해 달라고 말씀 드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현관문까지 심 비서를 배웅한 그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속절없이 다시 우시현에 대한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성공적으로 악연을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런 식으로 우시현과 다시 이어지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국장은 그를 다시 오해하게 될 것이다. 한 번 벗어난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강제된 우시현은 길길이 날뛰겠지.
“하…….”
자신이 우시현이라도 그럴 것 같았다.
고은서가 전화를 끊자마자 고은교는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그러지 말아 달라고 하려 했지만, 고은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나 그녀는 이런 일로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라고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 그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중에는 읽지도 않는 걸 보니, 고은교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싫다고 하는데, 왜 들어 주지를 않는 거냐고.
처음에는 빨리 우시현을 다시 ‘my’에서 탈퇴시키기만 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은서와 연락이 두절됨에 따라 대처는 불가능해졌다.
‘빌어먹을 버튼 같으니…….’
그때, 센터로 갔을 때 국장에게 담당을 옮겨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활성화 된 삭제 버튼을 다시 활성화해 달라고 말했어야 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에스퍼들의 자율에 맡겼으니 이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아니다. 에스퍼들은 잘못이 없다. 자신 때문이다. 그간의 행실 때문에 또다시 업보가 돌아온 것이다.
젠장, 망할 고은교.
그는 초조함에 손톱 끝을 물어뜯다가 깜짝 놀라 멈췄다. 자신에게는 이런 나쁜 버릇이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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