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고은서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마땅히 와야 하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무의식 중에 손톱을 물어뜯지 않기 위해 손을 꼭 말아 쥐고 있어야 했다.
자…….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
분명한 타의지만, 어쨌거나 우시현이 ‘my’에 돌아온 지금, 그의 변명은 부질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내렸던 결정 역시 의미가 퇴색되리라.
이제 와서 다시 고은서가 ‘강제’를 풀어준들 우시현은 또다시 자신이 고은교의 ‘my’에서 벗어난다면 강제적으로 본래 위치에 돌아올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우시현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그를 삭제하면 어떨까? 이 비활성화된 삭제 버튼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서, 자신이 우시현을 삭제하면 될 것이다.
그래, 그러면 되잖아. 그리고 혹시라도 우시현에게 연락이 닿는다면 문제가 생겼었다고 하면 된다. 자신은 정말 희망고문 같은 건 할 생각이 아니었다고,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어서 그랬던 거라고 덧붙이면 더 좋으리라.
차분하게 생각하니 별것 아닌 일이었다. 어제는 너무 넋이 나가서 스스로 처리할 생각을 못 했다. 우선 센터로 가서 자신의 센터 애플리케이션에 문제가 있다고 설명한 다음 삭제 버튼을 활성화시키고, 우시현을 삭제하자.
바로 외투를 챙겨 입고 막 나가려는 순간 알람이 울렸다.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휴대 전화를 뒤집었다.
가이딩 호출이었다.
……우시현의.
어두운 표정으로 센터를 한 번 올려다 본 그는 최대한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웬일인지 오늘은 센터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불그죽죽한 얼굴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를 향해 힐긋힐긋 시선을 줬지만 굳이 다가와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의외로 ‘고은교’를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들은 고은교에게 다가오는 대신 눈살을 찌푸리거나 그를 모르는 척했다. 누구 하나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이가 없었다. 고은교가 어디를 가든 계속 힐끔거리며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절대로 좋다고 말할 수 없는 태도들이었다.
타인의 시선들 속에서 그는 움직였다. 생각해 보니 국장의 호출 때문에 센터에 왔을 때도 그랬던 것 같았다.
불유쾌한 시선이 목덜미에 남아 있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센터에서 고은교의 평판이 좋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센터 가이드에게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던데 상황은 들었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
이것도 우시현이나 이승우의 짓일까? 하지만 이승우는 그가 자신을 오해했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고은교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할 때 그닥 좋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때 ‘사람들’이란 장이주였던 자신을 대하던 사람들을 말한다.
그는 장이주였을 때 게이트, 센터, 병원을 오가느라 모든 시간을 다 썼고 그래서 자기 자신의 평판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정확히는 그런 하찮은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친구를 사귀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눈치를 살피고, 웃고, 떠드는 건 삶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누군가의 가치를 매기는 순간은 자신이 직접 겪어보거나, 아니면 이력서를 볼 때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소문 때문에 편견을 가지고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소리다.
아프지 않으니 정말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되는군, 그래.
그는 국장을 찾아가는 대신 바로 전산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는 층을 찾아 올라갔다. 국장에게는 이미 허락을 받아 놓은 안건이기도 했고, 고은서가 바꿔 놓은 문제에 대해 심 비서를 통해 전달했으니 버튼 활성화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문제는 오늘이 토요일이라 고급 인력들은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혹시나 싶어 당직을 서고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들어올린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 센터 앱에 문제가 있어서요.”
“무슨 문제요?”
“삭제 버튼이 안 눌립니다. 회색으로 비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여기.”
직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고은교가 보여 주는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한번 볼게요.”
“네.”
고은교의 휴대 전화를 가져가 ‘my’ 목록을 확인한 직원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삭제 버튼을 눌러 본 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말이네요. 왜 이러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요.”
“네, 부탁드립니다.”
일이 간단히 해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급격하게 안심이 되었다. 다른 컴퓨터로 확인을 해야 하는 건지 직원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여러 번의 확인을 거치는 듯했다. 그는 초조하게 서서 직원의 확인을 기다렸다.
“죄송하지만 고은교 가이드님 맞으시죠?”
“맞습니다.”
“이것, 고은교 가이드님 요청으로 비활성화된 것이라고 적혀 있네요.”
“……네?”
“가이드님 요청으로 삭제 버튼 관리 등급을 낮추어 놓은 상태라고요. 센터 앱의 등급 조정은 팀장님 권한이라 바꾸시려면 다음 주 월요일에 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
‘고은교의…… 요청이라고…….’
이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는 완전히 얼빠진 얼굴로 서서 직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슨 이유로 고은교가 자신의 권한을, 에스퍼 삭제 버튼 권한을 내려 두었을까.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가…… 무력을 써서라도, 혹은 고은교의 휴대 전화를 훔쳐서라도 센터 애플리케이션을 켜서 에스퍼 삭제 버튼을 누르려고 수없이 시도한 결과겠지. 그러니 스스로 전산실까지 걸어와서 삭제 버튼 권한을 내려 달라고 요청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시도는 아마 우시현의…….
‘어쩐지 이상하더라.’
고은교의 애플리케이션만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이건 그냥 고은교의 결정이었던 거다. 왜 그걸 미리 알지 못했을까.
됐다. 그만두자. 지금 더 생각해서 뭐 하겠어.
그는 파리하게 질린 채로 손을 말아 쥐고 꾹 힘을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깜빡했네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다음 주에 다시 오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직원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는 멍하니 뒤돌아 전산실에서 나갔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
하지만…… 우시현에게 상황 설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자유의 몸이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사실은 질 나쁜 농담이었다고, 대뜸 뒤통수를 맞게 된 사람에게 그게 아니라는 말 정도는 해 줘야겠지.
절대 좋은 꼴은 못 볼 걸 알면서도 그는 의무감에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이상하게 4층 전산실에서 12층 가이딩실까지 가는 길이 멀고 험한 것 같았다. 이대로 영원히 복도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이딩실 문을 열자, 차갑게 얼굴을 굳힌 우시현이 느슨하게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이번엔 진짜 우시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이승우처럼 대놓고 늦게 오지 않았지만, 미리 와서 고은교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그에게 큰 유감이 있어 무슨 짓이든 하기 위해 일찍 온 것일 테니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우시현이 뭐라고 쏴댈지 모르겠다. 그냥 이 문을 도로 닫고 그대로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번쯤은 이 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고, 이번 일만큼은 그가 진정 원해서 벌어진 일도 아닌데 도망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늘 그랬듯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신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우시현은 의외로 조용했다. 단지 싸늘한 눈초리로 방만하게 앉아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지만, 일단 우시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우시현은 저번 호출, 그러니까…… 우시현의 이름으로 가이딩을 호출했으나 실은 이승우가 왔던 그 시간 그대로 그를 호출했다. 그래서 사실 이번에도 이승우가 여기 있는 건 아닌가 조금 기대하기도 했다.
7시가 되기까지 약 4분이 남아 있었다. 째깍째깍 흘러가는 초시계 소리만이 방 안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가이딩은 반드시 정해진 시각에 시작해서 정해진 시각에 끝내야 했다. 그는 습관대로 7시가 되기까지 기다리려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자신은 가이딩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우시현에게 변명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우시현 에스퍼.”
“…….”
우선 이 끔찍한 침묵을 타파해 보기 위해 말을 걸었지만,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층 더 싸늘해진 눈빛만 돌아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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