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29화 (29/132)

#29

“……저녁은 먹고 왔겠지요?”

“하.”

이번에는 그나마 대답……이라고 할 만한 게 돌아왔다.

코웃음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이게 어딘가, 라고 생각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우시현보다는 코웃음을 치는 우시현이 조금 덜 무서웠다. 우시현이 얼마나 화를 낼지 상상하는 것보다는 화를 내는 우시현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덜 무서운 것처럼.

어쨌거나 모든 일은 막상 부딪혀 보면 별거 아닌 적이 훨씬 많았다. 우시현이 얼마나 고은교를 적대하든지, 그가 고은교로 살기 시작한 이상 반드시 한 번쯤은 부딪혀야 할 것이었고.

그러니 피한다는 선택지는 옳지 못하다. 그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가이딩부터 하고 용건을 이야기할까요?”

“…….”

그가 가이딩을 먼저 하자고 제안한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우시현이 에스퍼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에스퍼들은 가이딩을 하고 나면 기분이 부드러워진다. 욕구 불만인 상태의 흡연자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난 뒤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는 가이드의 본능에 따라 에스퍼의 경직된 마음을 먼저 풀고 대화를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말을 붙였지만 우시현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말 붙이는 입장에서도 점점 할 말이 없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불편한 기분은 더더욱 팽배해져서, 나중에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아니, 아무리 싫은 녀석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남은 시간 동안 서로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거냐고.

“…….”

“…….”

우시현은 그럴 생각인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2분을 견뎠다.

7시 정각이 되자마자 그는 타이머를 켰다. 우시현은 아주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듯 고은교가 내민 손을 노려봤지만, 어쨌거나 결국에는 고은교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한 번 숨을 마신 다음 가이딩 기운을 슬쩍 돌려보았다.

‘윽……. 이건 너무 심하잖아.’

이승우와는 처음부터 파장이 아주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실제로도 그랬고 말이다. 조금 이상한 점은, 센터 애플리케이션에서 확인할 때 이승우와 고은교는 둘 다 파장이 40~50% 대로 나와 있었다. 40~50%는 안 맞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잘 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 그냥 그럭저럭인 파장 수치였다.

우시현도 이승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파장 수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실제로 느끼기에는 우시현과 고은교의 파장은 40%는커녕 그 절반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건 ‘리듬게임’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10퍼센트 미만의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 주는 것과 비슷한 느낌 말이다.

그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어쨌거나 우시현과의 가이딩은 가이드도, 에스퍼도 유쾌하게 느낄 수 없는 가이딩이었다.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의 손을 잡자마자 이승우가 멈칫했던 것처럼, 우시현 역시 그랬다. 이승우와는 달리 고은교와의 접촉이 불쾌하게 느껴져서겠지만. 이러나저러나 우시현은 그에게 손가락 하나 대기 싫어하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까지 온 이상 가이딩은 해야 했다. 이승우처럼 한 번도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한 것 같은 끔찍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우시현 역시 몸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체내 위험률 수치가 고위험군인 에스퍼다웠다. 리듬게임이라도 좀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에스퍼라는 소리였다.

본격적인 가이딩을 시작하자, 고은교와 우시현은 거의 동시에 눈썹을 찌푸렸다.

‘아, 진짜 토할 것 같네.’

이렇게 안 맞는 가이딩은 정말이지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았다. 고은교는 대체 왜 우시현을 좋아한 걸까. 얼굴이 잘생겼다고 다가 아닌데…….

‘……하.’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비록 타의지만, 자신의 ‘my’에 들어온 에스퍼에게는 가이딩을 해 주어야 했다. 그가 고은교인 이상, 그리고 우시현이 고은교에게 가이딩 호출을 한 이상 그는 우시현에게 가이딩을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우시현의 가이드였다.

그는 묘하게 구역질이 나는 느낌을 참으며 빠르게 가이딩을 시작했다. 가이딩을 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가이딩을 받는 우시현도 기분이 더럽겠지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것이 있는 법이었다.

“씨발.”

우시현이 욕했다.

‘……내 가이딩이 그렇게까지 엉망인가.’

눈동자를 힐긋 들어 우시현을 잠깐 쳐다본 그는, 더욱 빠르게 ‘리듬게임’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천천히, 공을 들여서 가이딩을 할 때가 아니었다. 사람이 아닌 호랑이의 손을 붙잡고 있는 불안함이 들었다.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해 줄 때마다 그는 늘 안전하지 않은 곳에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래서 ‘my’에 들일 에스퍼를 고를 때는 오랜 기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검증이 된 에스퍼를 골라야만 했다. 지금 와 후회해 봤자 자신이 한 일도 아니었으니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몇 번이나 가이딩을 하고 있는 손을 놓아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가이딩을 때려 넣고 있었는데…….

“……아.”

손이 뿌리쳐졌다.

아주 신경질적인 손놀림이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뿌리쳐진 손을 상체로 당겨 왔지만, 곧 그의 얼굴은 우시현처럼 분노로 얼룩졌다.

‘누구는 기분이 안 더러운 줄 아나…….’

우시현은 고은교가 원해서 지금 가이딩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머리에 총이라도 맞지 않은 이상 도저히 그럴 수 있는 파장 수치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렵게 가이딩하고 있는 와중에 연속된 거부 반응으로 인해 그 역시 기분이 확 나빠졌다.

도저히 가이딩을 속행할 수 없을 만큼.

드물게 화가 난 고은교가 입을 열었다.

“이게 뭐하자는…….”

“너 지금 동정하냐?”

“뭐?”

눈 깜빡할 사이였다. 으르렁대는 사나운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동정하는 거냐고, 고은교 이 씹새끼야.”

*

한쪽이 강하게 조여져 있으면 다른 한쪽은 풀려 있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다시 말해 한쪽이 풀리기 시작하면 다른 쪽을 조이고 싶어진다는 이야기였다.

고은교에게 묘한 감정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것이 고은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지난 9월, 고은교가 가이딩을 빌미로 달라붙다 못해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기 위해 강의실에 나타났을 때, 우시현은 아주 오랜만에 사람을 향한 살의를 느꼈다. 단순히 자신이 만나 주지 않아서 그를 만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랬어도 기분이 더러웠을 텐데, 고은교는 어떻게든 그의 졸업을 유예시키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혹은 그가 자신에게 빌빌거리며 기는 것을 보기 위함이었거나.

우시현은 고은교가 싫었다. 얼마나 싫었냐면 방바닥을 기어가는 바퀴벌레보다 더 싫었다. 어딜 가든 바스락대며 나타나 혐오스러운 더듬이를 보이며 알짱대는 것을 눌러 죽이듯 고은교를 그냥 죽여 버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한 토 나오는 짓을 꼽으라면 정말 수천 가지는 될 테지만, 우시현이 그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건 자신에게 집착하는 고은교였다.

그 새끼는 자신을 볼 때면 언제나 광기에 차서 반들거리는 눈으로 봤다. 우시현은, 글쎄, 말하자면 그런 시선에 익숙했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이들은 늘 고은교보다 덜하거나 더했다. 언제나 그를 갖고 싶다는 듯 눈을 빛냈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면 질투심으로 인해 뇌와 눈이 고장 나 그를 죽일 듯 노려보거나.

하지만 고은교는 그중에서 제일이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했고, 우시현이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지점이 가장 역겨운 부분이었다. 어떻게든 지금 드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또라이 새끼. 우시현이 발을 핥으라고 한다면 고은교는 아주 기쁘게 그럴 수 있는 놈이었다.

우시현을 뉴스에서 우연히 본 고은교가 어떻게든 우시현을 제 손에 넣기 위해 발악하는 과정은 정말이지 지루하고 끔찍했다.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우시현이 넘어오지 않자, 고은교는 사람을 써서 우시현을 납치하려 했다. 물론 사람을 아무리 쓴다 한들 상급 에스퍼인 우시현을 납치하는 일 같은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납치 시도를 하다니. 자신을 재워 놓고 무슨 짓을 하고 싶었기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짓까지 한단 말인가. 그 시도로 인해 고은교는 우시현으로부터 확실한 경계를 샀다. 고은교는 일반인과 완전히 달랐다.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될 손에 권력이 들어간다면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몸소 겪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시현은 그때 완전히 고은교에게 학을 뗐다.

그런 고은교가 가이드라는 사실은 정말이지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이드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되는 거라고 하니까. 우시현은 분명히 기계가 오작동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고은교가 무슨 수를 쓴 것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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