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32화 (32/132)

#32

‘울 줄은…… 몰랐는데.’

처음 고은교의 몸에서 깨어났을 때, 뒤통수를 깨먹고 병원에서 간단한 타박상에 바를 약을 받아 온 게 신의 한수였다. 고은교는 그때 받은 약을 아주 살뜰하게 써먹고 있었다.

고은교는 시꺼멓게 혹은 퍼렇게 멍이 든 얼굴과 몸에 약을 발랐다. 그러면서 가끔씩 한숨을 내쉬었다. 약통이 손 안에서 달그락거렸다.

글쎄, 잘 모르겠다. 그때 우시현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숨소리도 달라지지 않고, 눈시울도 붉어지지 않았는데 우시현이 울었다. 아마 가이딩을 한 직후라 감정이 부드러워져서 그랬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고은교가 그만큼 우시현에게 막대한 스트레스를 줬기 때문에, 단지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깊은 어딘가가 누그러졌거나.

언제 우시현이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라, 그는 최대한 빨리 자신의 몸을 추슬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구급상자를 찾아 화장실 거울을 통해 상처를 확인하며 대충 처치를 마쳤다. 병원을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치료 방법이겠지만 너무 지쳐서인지 병원까지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그깟…… 어린 에스퍼에게 몇 대 맞았다고 온몸이 욱신욱신 쑤셨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고은교는 센터의 전산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센터 애플리케이션, ‘my’에 비활성화되어 있던 삭제 버튼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길게 두고 볼 것도 없이 우시현을 ‘my’에서 삭제했다.

다행히 과정은 별것 없이 간단했다. 심 비서로부터 제대로 그의 뜻을 전달했다는 연락이 왔다. 고은서가 또다시 우시현을 제 목록으로 돌려 두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그러자마자 바로 다시 우시현을 삭제해 버리면 된다고 연신 생각했다. 그때는 우시현이 호출해도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1초 정도 고민하고, 하나 남은 ‘my’의 에스퍼 이승우도 삭제했다.

‘이승우를 남겨 두면…… 제 친구를 괴롭힌다고 또 나를 두들겨 팰지도 몰라.’

또 이렇게 불려 나와 미친 듯이 맞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렇게 두 번 터치 한 것으로 우시현과 이승우가 단숨에 없어졌다.

‘my’ 목록이 텅 빈 것이다.

‘새로운 에스퍼를 매칭하세요!’

“하…….”

이 일이 국장에게 어떻게 전해질지 모르겠으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보아하니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닌 듯한데, 고은교가 이 일로 소송을 걸더라도 어떻게든 센터에서는 우시현을 보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겉으로만 보기에 적당히 경고를 하고 치우거나.

솔직히 말해 우시현 측에서도 고은교로부터 받은 온갖 불이익이 있을 터였다. 당연히 증거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완벽하게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우시현을 그냥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시현과는 최대한 더 엮이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그날 밤 국장 직속 부서로부터 연락이 오기는 했지만, 무시했다. 자신에게 연락을 할 거였다면 고은서에게 압력이 들어왔을 때 했어야 했다. 그는 국장에게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고은서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다음 날 아침이었다.

[국장한테 들었다. 우시현을 옮겨 달라고 한 게 너라면서?]

“아…….”

여보세요, 라고 말하기도 전이었다. 그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연락을 하고 싶었을 때는 바쁘다는 이유로 받아 주지도 않더니, 자신이 용무가 생기니까 전화가 오는 게 황당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고은교 주변에는 제멋대로 하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말할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이제 우시현 에스퍼에게 아무 감정 없습니다. 우시현 에스퍼도 그렇다고 했고요. 그래서 서로 갈라지기로 한 겁니다. 굳이 우시현 에스퍼를 억지로 제 ‘my’에 넣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잠시 침묵했다.

[나까지 속이려는 거야?]

“예?”

[뭐가 됐든, 어떻게든 우시현을 손에 넣고 싶다고 했잖니. 우시현이 너를 싫어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멀리 돌아갈 필요 없이 가지게 해 준대도.]

“…….”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고은교는 너무 오랫동안 우시현을 짝사랑했고 어떻게든 우시현을 자신에게 묶으려고 발악해 왔다. 그 기나긴 과정을 고은서가 모르리라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고은서는 고은교의 부탁을 수도 없이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고은교는 이렇게 간단히, 단순한 ‘변심’이라는 이유로 우시현과 헤어지겠다 말해서는 안 되었다는 거다.

그래서 우시현이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그는 입가를 손가락으로 긁으며 생각했다. 글쎄, 우시현은 단순히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슨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고은서의 이목을 돌리고 싶어 조금 안달이 날 뿐이었다.

“그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단순 변심으로는 이 마음을 설명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런 방향은 어떨까?

[……다른 것?]

고은서의 목소리는 분명 떨떠름했지만, 고은교가 새롭게 관심을 보인 ‘다른 것’을 묻는 것을 택했다.

원하는 대로 화제가 흘러가려는 것 같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유도했던 대로였다.

고은교가 처음 우시현을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그건 분명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감정이었겠지. 본래 감정이란 그런 것이니까.

게다가 그건 일반적인 지고지순함이 아니라 소유욕에 가까운 집착증이었다. 그러니 그 대상이 바뀌었다는 말은 우시현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예. 아시다시피 우시현은 제가 아무리 관심을 나타내도 저를 싫어했으니까 질릴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런 것보다…… 게이트 현장에 관심이 생겨서요.”

[너는 게이트 같은 건 관심 없는 애잖아?]

“…….”

고은서는 생각보다 고은교에게 관심이 많았다. 바쁘게 눈을 움직이던 그가 방 가득 붙어 있는 우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이거다.

좋아, 착한 우시현이 그에게 계시를 내려 주었다. 착한 우시현이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때리지도 않는 사진 속 우시현을 말한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현장에…… 관심 있는 에스퍼가 생겼습니다. 얼굴도…… 괜찮고, 성격도 자상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괜찮은지 실제로 확인해 보려구요.”

[……그래? 그렇게 괜찮은 놈이야?]

“……네, 아마도.”

방금 막 떠오른 대로 내뱉은 거라 저도 잘 모르지만요.

“아무튼, 국장님을 통해 임시 라이선스를 발급받았는데 정식 라이선스를 발급받으려면 게이트를 클리어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적당한 게이트가 없어서……. 혹시 제가 클리어 할 만한, 독점이 안 된 게이트가 있을까요?”

[흠…….]

그의 말에 고은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괜한 소리까지 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은서가 굳이 그에게 게이트 정보를 넘겨 줄 것 같지 않았고, 게이트는 아주 값비싼 현물이었다. 행여라도 고작 말 한 마디로 정식 라이선스를 취득하려 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고은서가 안 된다고 거절하면 어쩔 수 없다면서 낙담한 척을 하면 될 거라고 여겼을 뿐이다.

그때, 휴대 전화 너머에서 고은서가 누군갈 불렀다. 곧이어 한층 멀어졌던 목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네가 갈 만한 미개발 게이트가 하나 있긴 해. 알다시피 어디든 요즘 생기는 게이트라면 어떻게든 독점하고 싶어서 난리거든. 1급 대외비인데, 제주도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어. 섬에 생긴 게이트라 시료도 희귀하고 가치 있을 것이고, 등급도 나쁘지 않아서 현재 우리 기업 에스퍼와 가이드가 근처에 대기 중이야. 한 달 내로 터질 것 같은데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아서 한둘쯤은 구경 가듯 가도……. 고마워, 심 비서.]

아닙니다, 전무님. 한 번 들어봤던 희미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

[아무튼, 한둘쯤은 마실 나가듯 나가도 괜찮겠지.]

“…….”

등급이 나쁘지 않다는 건 최소한 B등급 이상의 게이트라는 의미다. 당연하지만 게이트 안에 들어갈 최고 엘리트 전력에 ‘한둘’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뚱멀뚱 있으면 팀에 굉장한 피해가 된다. ‘한둘’을 보호해야 하는 인력도 빼야 하는데다가, 그 ‘한둘’은 불침번도 서지 않고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 방해만 될 테니까. 이능력자라면 모두 알고 있을 법한 상식이었다.

물론 고은서는 일반인이 아니라 그런 자세한 내용은 모를 테지만, 일반 가이드가 현장에 함부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정신 차려서 예쁘다며 칭찬해 준 혈육이 난데없이 자기가 꾸려 준 게이트에서 비명횡사하기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말인즉슨, 게이트를 그냥 압살할 정도의 전력을 고은교 하나를 위해 지원해 준다는 의미에 가까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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