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33화 (33/132)

#33

‘……고은교, 생각보다 굉장히 편애 받고 있었잖아?’

왜인지 고은교의 성질머리가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은근히 오냐오냐 해 주다 보면 누구라도 삐뚤어질 것 같은데…….

어쨌거나,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그는 눈만 깜빡거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자연스럽게 의심을 사지 않고 이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을까…….

[왜 대답이 없니?]

“네, 네. 좋아요. 좋습니다. 꼭 하고 싶습니다.”

대답을 요구하는 말에 그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무조건 좋다고 대답했다. 휴대 전화를 간절하게 꽉 쥔 것은 물론이었다. 왜 자신이 제주도 게이트에 들어가야 하는지 30분 내외 PPT도 준비하여 상대를 설득할 수 있었다. 진심이었다.

[그럼 널 우리 기업 이능력자 팀에 넣어 주마.]

완벽했다. 그렇다면 모르는 에스퍼를 일일이 찾아가서 같이 게이트를 클리어 하자고 부탁하러 다닐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재빨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뭘.]

전화는 금세 끊어졌다. 고은서는 예전에 그랬듯 속전속결이었다. 이렇게 쿨하고 멋진 혈육을 가지고 태어나다니, 고은교는 원래의 ‘고은교’가 한순간이나마 미칠 듯이 부러워졌다.

고은서는 심 비서를 통해 게이트 관련 자료를 주겠다고 했다. 끊어진 전화를 들고 고은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옛날에는 어떻게든 게이트 하나를 따내겠다고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는데……. 이렇게 말 한마디로 게이트를 따내다니,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고은서의 말대로 며칠 뒤 심 비서가 찾아왔고, 그는 간단한 브리핑을 곁들이며 게이트 관련 자료를 넘겨주었다. 고은교는 게이트 자료를 빠르게 훑어보며 심 비서의 말을 들었다.

제주도 근처 게이트는 A급 이하의 게이트일 확률이 높다. 또한 희귀한 시료가 적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신 굉장히 까다롭거나 규모가 큰 게이트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제주도 게이트에 진입하는 이능력자 팀은 한 팀이었다.

‘제가…… 부 팀장이요?’

‘예.’

낙하산도 이런 낙하산이 없었다. 정상적인 루트라면 막내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능력자 팀 생활을 고은서가 아주 깔끔하게 청산해 준 것이다.

이런 게…… 우시현에게 두들겨 맞은 보상이라면, 그는 세 번도 더 두들겨 맞을 수 있었다.

그는 씰룩이는 입술을 들키지 않으려고 힘을 줬다. 심 비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에게 팀 명단 또한 넘겨주었다.

팀원은 일곱 명이었다. 곳곳에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센터 이능력자로 일하다 보면 여러 기업의 이능력자들과 협력해야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고은서의 말대로 알짜배기 실력자들로만 이루어진 명단이었다. 그때 심비서가 말했다.

“따로 연락하실 필요 없이, 팀원 전원이 도련님께 맞추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예?”

“주중으로 팀원 전원이 도련님께 인사드릴 겁니다. 아, 빠르게 인사를 받고 싶으시면 주말에라도 바로 연락하라고 전달해 둘까요?”

“아니에요. 무슨 말씀입니까.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개도 안 물어 갈 소리야.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에 괜찮다고 거듭 말했지만 심 비서는 오히려 기상천외한 소리만 해 댔다.

“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팀에 발령 받으셨는데 무엇이든 허투루 하실 수는 없지요. 아, 우선 팀원들과 만나보시겠습니까? 소집 명령을 내려 둘까요?”

“아니에요. 정말,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지금…… 이 베테랑들한테, 새파랗게 어린, 그것도 이제 막 현장에 발을 들여 놓은 햇병아리한테 인사를 시키겠다는 소리야?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진다.

“정말 괜찮습니다, 심 비서님.”

거듭, 거듭 안 된다고 말하자 심 비서는 약간 마뜩찮은 표정을 지으며 겨우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팀원들과 따로 인사하시는 일 없이 게이트 작전을 진행하는 날 간략하게 도련님을 소개하고 게이트에 작전을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예.”

정말 어렵게 말이 통했다 싶은 순간, 심 비서가 또 헛소리를 했다.

“아, 평소 하고 싶으시던 작전 같은 게 있으면 팀장에게 전달하시면 됩니다.”

“아…… 괜찮은데. 게이트에 대한 전문가는 이분들이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임시 라이선스를 가진 초짜가 무슨 작전을 내놓겠느냐고.

물론 그는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던 S급 현장 가이드 장이주였고, 하고 싶은 작전은 물론 제주도 게이트처럼 희귀한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통할 효율적인 작전 역시 수백 가지는 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몸은 고은교가 아닌가. 굳이 팀원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제 의견을 밀어붙일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일단 임시를 정식 라이선스로 전환하고 나면 앞으로도 기회는 많을 텐데, 사람들에게 굳이 미움을 왜 사겠는가.

“도련님, 못 본 사이 많이 소심해지셨군요.”

“…….”

왜 사기업 이능력자들이 굳이 거액의 연봉을 걷어차고 센터로 다시 돌아오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

심 비서는 앞으로 현장 가이드로 활동하려면 큰 차가 편할 거라면서, 차키를 보관해 놓는 다용도실에 SUV 차키도 하나 뒀다고 말했다. 그는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하시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집을 떠났다.

‘차가 있었다고?’

학기 수업을 하는 내내 지하철을 타고 다녔던 고생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 있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즉시 다용도실을 찾았다.

온 집안을 돌아다닌 결과,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벽이 다용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벽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문이었다.

“오…….”

다용도실 안은 흡사 보물섬 같았다.

차키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쪽에는 손목시계와 한정판 신발 같은 잡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하나만으로도 수천만 원대를 호가할 것 같은 손목시계를 집어 들어 쳐다보던 그는 얌전히 손목시계를 제자리에 두었다.

‘이게 전부 내 거라는 거지.’

명품을 사서 모으는 취미가 없었기 때문에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을뿐더러,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 물건들이 제 것 같지 않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이렇게 잘못 만지다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비싼 물건에 기스를 낼 것 같다.

그는 그냥 빠르게 용무만 마치고 다용도실에서 나가기로 했다.

대부분의 차키는 주욱 나열된 고리에 걸려 있었고, 심 비서가 두고 간 것으로 보이는 차키는 시계들이 포장된 유리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SUV 차키를 손에 쥔 그는 조심스럽게 다용도실을 빠져나왔다. 자석이 붙는 소리처럼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다용도실 문이 닫혔다. 살짝 다용도실을 밀어보자, 문이 언제 닫혔냐는 듯 부드럽게 열렸다.

이것 참…… 꼭 이능력 같다.

현관문 통로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음걸음마다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시계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는 갑자기 신용 카드가 뚝 끊겨도 쩔쩔 맬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무척 든든했다.

침실로 돌아와서 심 비서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휴대 전화를 들었을 때는 확실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휴대 전화 화면을 보자 부재중이 남겨져 있다.

그는 별생각 없이 그것이 심비서나 혹은 고은서, 아니면 국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부재중 통화 목록을 눌렀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스팸일까?

전화번호를 삭제하고 차단할까 말까 고민한 바로 그 순간, 다시 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무심코 손가락을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교수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깜짝 놀라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승우?”

[네.]

믿을 수 없었다. 진짜 이승우였다.

이승우가 어떻게 그의 번호를 알았을까? 고은교만 이승우의 번호를 몰랐지, 이승우는 고은교의 번호를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고은교는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뜻밖의 상황에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교수님?]

“…….”

이제 와서, 도대체 왜……?

그간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승우는 그와 우시현의 일을 모르고 있는 걸까? 안다면 우시현에게 자세한 일을 묻지, 왜 굳이 그에게 전화를 한 걸까?

고은교에게 가이딩을 받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그는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그리고 떼어 냈던 휴대 전화를 다시 천천히 귀에다 댔다. 일단 휴대 전화를 들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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