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교수님, 이승우입니다. 지금 잠깐 통화 되세요?]
전화상의 이승우는 아주 예의가 발랐다. 마치 공통 프로젝트를 하는 팀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몇 번이고 눈가를 찡그렸지만, 일단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얼굴 보고 말씀 드리고 싶은데요.]
“……지금?”
[네, 괜찮으시면요.]
이승우의 목소리는 묘하게 침착했다. 하지만 내용이 전혀 침착하지 않잖아. 지금은 밤 10시, 아까 10시였으니까 지금 시간은 훨씬 더 지나 있었다. 온 집안을 뒤집어 놓으며 다용도실이 어디 있는지 찾느라 시간을 꽤 많이 보낸 탓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들은 늦은 밤중에 보자는 약속을 잡을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도 아니었고 친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부를 만한 상황은 딱 한 번뿐으로, 그와 이승우가 30분가량 키스인지 가이딩인지 모를 것을 헤어진 게 다였다. 그 이후로도 이승우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그는 이승우가 자신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승우는 정상이 아니다. 술이라도 마신 건가? 침묵이 길어지자, ‘교수님?’하고 이승우가 그를 재차 불렀다. 그의 음색에 약간의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는 그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승우가 지금 어떤 상태든 간에, 그를 교수님이라고 불렀는데 안 괜찮으면 어떡할 거냐고 유치하게 되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음…….]
유하게 거절하자, 이승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제가 그쪽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정말 잠깐이면 되는데.]
“…….”
생각해 보니 이승우도 썩 말이 통하는 상대는 아니었다. 말이 통하는 척하는 또라이에 불과했다. 그것을 깨달은 고은교는 전에 없이 냉랭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교수님.]
“끊겠습니다.”
무슨,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아무리 예의바른 것처럼 보여도 이승우는 이승우였다. 살살 달래는 시늉을 하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 그게 퍽이나 괜찮아지는 줄 아나 보다. 교수님이라고 부르든 말든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냐고 묻고 바로 전화를 끊었어야 했는데.
괜히 상대해 준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전화에 대해 잊어버렸다.
취침 전 샤워는 좋은 습관이다. 잡생각을 날려 주고, 몸을 개운하게 만들어 준다.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오던 고은교는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툭, 하는 소리. 빗소리는 아닌 것 같고, 무슨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같은데. 혹시 비가 오는 건가? 그는 일기예보에서 비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귀를 기울이던 그는 이것이 빗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 안에서 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거실인가?
소리가 묘하게 거칠고 불규칙적이었다. 아니, 지금은 들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인가 싶어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내는 일에 집중하는 순간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눈가를 좁힌 고은교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그 소리는 조금 둔탁했고, 동시에 가벼웠다. 마치 노크 소리처럼.
반신반의하며 그가 거실 불을 켰다.
“……뭐지?”
하지만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착각이었던 걸까?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던 그는 한 번 더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홱 고개를 돌린 고은교가 깜짝 놀라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의 거실 창문은 틸트앤턴 방식이었는데, 환하게 트여 있는 큰 창문은 열 수는 있지만 실제로 열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환기를 위해서는 대체로 옆에 달려 있는 조그만 창문을 사용했다.
그곳에 사람이 서 있었다. 환하게 비치는 창문 바로 앞에서.
“…….”
고은교가 자신을 돌아보자, 이승우가 다시 한 번 손등으로 정중하게 거실 창문 밖에서 노크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친 것 아니냐고 물으려는 입술에 힘을 주어야 했다.
거실 창문으로 다가가자, 이승우가 고은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창문 하나를 두고 이승우가 바로 앞에 있었다. 고은교가 창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면서. 지금은 정중한 척하지만, 창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저 창문을 깨트려서라도 안으로 들어올 거다.
‘집 주소는 또 어떻게 안 거지…….’
고은교의 개인 정보가 그렇게 값이 싼가?
그는 약간의 분함과 또 약간은 홀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큰 창문을 열었다. 이승우는 고은교가 창문을 반쯤 열어주자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는 그냥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이승우는 고은교의 집 주소를 알자마자 찾아온 것 같았다. 그는 바람 에스퍼였으니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날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우가 딛고 있는 발밑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아무리 그가 바람 에스퍼라는 걸 알고 있어도 가슴이 철렁했다.
“……좀 평범하게 방문할 수는 없습니까?”
“이편이 더 빠르거든요.”
창문으로 들어온 이승우가 집을 둘러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야 이편이 더 빨랐겠지, 고은교의 집은 37층이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 설치된 엘리베이터가 고속 엘리베이터라는 사실을 말해 줄까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바람을 타고 온 탓에 이승우의 머리카락은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학교에서는 항상 깔끔하게 하고 다녔기에 지금 이승우의 모습이 상당히 의외인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냐고 물어야 할까? 아니면, 어떻게 왔냐고 물어야 할까?
혼란스러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고은교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자, 이승우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왜 자꾸 웃는 거지. 약간 부루퉁해졌지만, 그는 일단 창문가에서 비켜서서 이승우가 거실 안쪽으로 좀 더 들어오도록 했다.
‘그래……. 어쩌겠어.’
일반적인 손님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승우는 심 비서 다음으로 이 집을 방문한 두 번째 손님이었다. 전화상으로도 용건이 있다고 했으니 용건을 마치면 어련히 알아서 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고은교는 냉장고에 뭐가 있었는지 머릿속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뭐…… 마시겠습니까? 일단 앉아 있어요.”
“괜찮아요. 귀찮게 해 드리려고 온 건 아니니까.”
이승우는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더니, 그에게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는 조금 당황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이 되지 않았는지, 성큼 다가온 이승우가 그의 팔을 잡더니 자신에게 확 가까이 끌어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술도 안 마셨으면 왜 이래?’
그는 크게 놀라 이승우로부터 물러서려고 했다. 물론 이승우의 억센 손은 고은교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얼굴이 왜 이래요?”
“……아.”
당연히 얼마 전에 우시현한테 두들겨 맞았으니까,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을 터였다. 이승우의 손가락이 상처를 건드렸는지 뺨이 욱신거렸다.
“누가?”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난 얼굴로 이승우가 입을 벌렸다가 빠르게 닫았다. 이승우가 상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고은교는 이승우와 훨씬 더 가까이에 있게 되었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 만한 거리였다.
“누가 이렇게……. 누구죠?”
이승우는 한 손으로는 고은교의 턱을 끌어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받쳐 거의 안아 들었다. 다시 말해 고은교로서는 난데없이 이 남자의 품에 바싹 끌어당겨졌다는 이야기다.
이런 건 면역이 없는데.
그는 너무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승우의 가슴팍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를 밀어내기 위해 힘을 줬다.
하지만 센터에서 그랬듯이 이승우는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상처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제 얼굴을 비틀어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래서 그는 번뜩이는 이승우의 눈을 정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만, 좀……. 비켜.”
“교수님.”
이 새끼 눈깔이 돌았다.
“아.”
밀어내려는 게 더 화가 났는지 손은 절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받쳐 든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윽…….”
“교수님?”
문제는 하필 그곳이 우시현이 걷어찬 자리였다는 것이었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처럼 꽉 안아 들었던 팔이 아픈 내색에 바로 풀렸다. 그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느라 놀란 얼굴의 이승우를 볼 수 없었다.
이승우의 품에서 스르륵 내려온 그가 주저앉아 몸을 떨었다. 이승우 역시 그가 웅크린 만큼 몸을 숙여 주저앉았다.
“거기에도 상처가 있는지…… 몰랐어요.”
이승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실내복을 들추며 상처를 확인했다. 그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린 채 이승우가 자신의 옷을 밀어 올리며 몸 이곳저곳을 만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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