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35화 (35/132)

#35

“병원은요? 지금 갈까요? 밤이라서 응급실밖에 없겠지만 간단한 처치는 해 줄 텐데.”

“……이미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승우 에스퍼, 이런 걸 물으러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자식이 아까 얼마나 세게 움켜 쥔 건지, 옆구리가 다 화끈거렸다. 병원 타령을 할 거면 이렇게 아프게 하지를 말든지. 우시현에게 걷어차인 지 며칠이 지난 옆구리는 까맣게 멍이 들어 있었다.

이승우는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자신을 만류하는 고은교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교수님 상처보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걱정 마세요.”

“…….”

그럼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아.

그런 생각을 귀신같이 눈치챘는지, 이승우가 물끄러미 고은교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고은교는 이승우의 입술에서 한숨 소리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우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올라간 옷자락이 스륵 내려온다.

복잡한 얼굴로 고은교를 내려다보던 이승우가 입을 뗐다.

“저도 지금 제 꼴이 우습다는 건 알지만…….”

“…….”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데.”

“……승우 군이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뭐라 더 말하려던 이승우가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몇 번 달싹거리던 입술에서 느릿느릿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염치없는 짓을 하고 있나요?”

“……알면서 왜 이러는 겁니까?”

당연하지만, 고은교는 할 말이 많았다. 이전에 이승우에게 가이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가이딩을 해 준 것은 맞았지만, 그게 그들의 본질적인 관계가 바뀌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좋아. 솔직해지겠다. 사실 아주 조금은 기대했다. 그들이 한 것은 일반적인 가이딩이 아니라 점막 가이딩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승우는 가이딩 이후 따로 연락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이승우에게는 고은교와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는 해묵은 악감정 또한 있지 않은가.

“설마 내가 기억상실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한 번 양보해서, 그날 일부러 날 맞히려고 물건을 떨어트린 건 아니라고 칩시다. 하지만 발목을 두 번 꺾이기 싫으면 계속 얌전히 굴라고 하던 건 분명 이승우 군이었는데요.”

“…….”

“어쭙잖은 걱정은 관두고, 여기까지 날아온 용건이나 말하세요.”

고은교가 냉랭하게 굴자 이승우의 눈빛도 조금 짙어졌다. 그는 밤하늘처럼 까만 이승우의 눈빛을 보며 이승우가 얼른 자신의 용건을 말하기를 기다렸다.

뜻밖에도 이승우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주 다른 말이었다.

“……아직 아프세요?”

“뭐가 말입니까?”

“발목 말이에요.”

“…….”

설마, 정말로 고작 그걸 물으러 온 건 아니겠지.

“그냥 궁금해져서.”

그의 눈이 가늘어지자, 이승우가 변명했다. 그리고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그의 발목을 살짝 건드린 다음,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고은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러한 간지러움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전혀.

예전에도 그랬으며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장이주였을 때는 엄격하게 아랫사람을 관리했고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일했다. 고은교일 때는 그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그를 무시하고 아주 싫어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평생 곱게 다루어진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는 거북함이 시키는 대로 이승우를 밀어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승우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까와 달리 이승우는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발목은 괜찮습니다. 진짜 용건은요?”

아까보다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거리였다.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이승우에게 퉁명스러운 어조로 묻자, 이승우가 물끄러미 그를 응시한다.

“가이딩해 주셨잖아요.”

“…….”

“저한테…… 가이딩해 주셨으니까. 저에게 마음이 생기신 것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my’ 목록을 못 봤습니까? 그쪽을 삭제한 지 꽤 됐는데요.”

“압니다. 봤어요.”

이승우가 덧붙였다.

“그래서 물으러 왔어요, 교수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왜 그러신 건지. 혹시 실수인 건지, 아니면…….”

“…….”

“아니면, 무슨 이유로 저를 끊어 낸 건지 알고 싶어서요.”

뒷말은 조금 작았고, 이를 악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는 당황했다.

왜 자신을 삭제했는지 궁금해 할 줄은…… 몰랐다. 이승우라면 그저 그러려니 할 것 같았다. 어떤 집착이나 욕망도 없어 보이는 그가, 고은교와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에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나는…….”

“…….”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승우에게 겨우 30분 가이딩을 해 준 것이 이렇게 큰 변화를 가져온 걸까?

그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승우를 응시했다. 그가 자신을 보자, 이승우 역시 눈을 마주쳐왔다.

선명하고 짙은 검은색 눈동자. 저 눈을 처음 봤을 때, 그리고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짧은 떨림을 느꼈다. 그때 그는 이승우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냥 마음이 바뀌었어요. 과거의 일을 뉘우쳤다고 하는 것에 가깝지요. 우시현 학생도 함께 해제했고, 더는 두 사람에게 내가 엮일 일 없을 겁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우시현 학생에게도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는 애써 과거의 잔상을 털어냈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게 그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쉬운 일이어야 했다.

이승우는 고은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시선에 호흡이 흐트러질 것 같아 고은교는 일부러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이승우의 어깨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 같은 것을. 세상에는 이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라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그걸 이승우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그때 이승우가 물었다.

“……그게 다인가요?”

“…….”

“시현이는…… 못 믿을 텐데.”

그래. 그랬다. 그 말대로였다.

“…….”

고은교는 살짝 눈썹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실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날, ‘my’ 목록에서 사라졌던 우시현이 제자리로 복귀한 날, 우시현은 자신이 농락당했다고 생각했고 당연한 순서처럼 고은교를 가이딩 호출로 불러 내 센터 안에서 분이 풀릴 때까지 그를 두들겨 팼다.

그런 쓰레기 같은 에스퍼가 그의 것이었다니. 고은교는 두 번 다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시현을 잘라 내기 위해 고은교는 꽤 많은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고은서로부터 게이트도 약속 받았고, 비활성화된 센터 애플리케이션의 ‘삭제’ 버튼도 활성화시켰으므로 하나를 잃고 둘을 얻은 셈이었다.

“그건 상관없어요. 우시현 학생은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내가 결정했고, 끝난 일이니까.”

그가 단호한 표정을 짓자 이승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남선재…… 때문인가요?”

무슨 소리지. 남선재?

“…….”

그는 갑자기 튀어나올 거라고 예측하지 못한 이름에 얼이 빠졌다. 남선재는 이제는 얼굴마저 흐릿해져 갈색 곱슬머리가 강아지처럼 귀여웠다는 인상만 남아 있는 학생이었다.

“정말 다른 에스퍼가 더 좋아지셨나 봐요.”

이승우의 말투에 조급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상관없는 학생의 이름을 거론할 정도로 이승우는 고은교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했다. 이건 이승우뿐만이 아니었다. 고은서의 반응도 동일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이에 고은교는 조금 더 단호한 액션을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승우 학생. 그만하세요.”

“그만할 수 없어요.”

고은교가 단호하게 나오자 이승우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고은교를 깊이 쳐다보는 눈동자에 그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이승우는 필사적이었다. 이승우에게 가이딩을 해 준 뒤, 그의 연락을 기다리던 고은교가 이승우에게 기대했던 바로 그 태도였다. 아니…… 아니다. 필사적인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이승우의 눈은 고은교를 파헤칠 것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숨기고 있는 사실을 샅샅이 읽어내려는 것처럼. 불가해한 것을 해독하려는 연구자처럼.

그는 이승우가 그런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해서 엉덩이걸음으로 물러나는 순간 이승우가 기다렸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한쪽 팔을 바닥에 짚으며.

그는 자신의 허리 옆에 놓인 팔과, 호소하듯 다가온 얼굴에 움찔했다. 이승우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가이딩을 해 주지 않으셨으면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적선하듯 가이딩을 해 주셔 놓고…… 이제 와 쓰레기 버리듯 버리시겠다니 어떻게 그만할 수 있겠어요.”

“…….”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단어 선택이 똑같다.

“교수님은 지조가 없으시군요.”

충실함과 포악함이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그 두 가지 상반되는 성질이 섞이자 목소리가 아주 기묘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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