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36화 (36/132)

#36

이승우의 눈은 그를 관찰하듯 샅샅이 훑어보고 있다. 왠지 소름이 끼쳤다. 이승우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 안전거리를 확보해도 이곳이 센터가 아니기에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자신을 한입거리로 보고 있는 이 에스퍼의 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려댔다.

그는 목울대를 움직여 침을 꿀꺽 삼키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자리에서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이 이상한 분위기를 깨트려야 했다.

“설마…… 서운해서 이러는 겁니까?”

“…….”

그 말에 이승우는 뭔가 생각하는 듯 오른쪽으로 눈을 굴렸다. 고민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를 것이다.

거짓말처럼 서러운 빛이 이승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네.”

네는 무슨. 연기하고 앉아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실 건가요?”

고은교는 묻기만 하는 게 아니라 더욱 바싹 붙어 오는 이승우를 엉겁결에 손으로 막았다. 이번에도 이승우는 순순히 막혀 주었다.

“아니…….”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자마자 표정이 싸늘해진다.

어쩔 수 없이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는 이미 이전에 우시현에게 찾아가기 싫다는 경종을 무시하고 가이딩실에 갔다가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또 맞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면, 음……. 이승우 학생, 아니, 이승우 에스퍼를요? 내 ‘my’에?”

“네.”

온순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 양심 없는 새끼…….’

협잡질에, 협박까지 해 놓고 ‘my’ 목록에 들여보내 달라니. 다시 생각해도 이건 상당히 열받는 일이었다. 그럴 목적이 있었으면 처음부터 잘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는 어쩔 수 없이 괘씸해하는 눈으로, 약간의 원망을 담아 이승우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승우가 미소 짓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고은교를 올려다봤다.

“죄송해요.”

“…….”

그건 자신이 했던 말을 무르겠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 계속해서 고은교에게 선택을 강요하겠다는 뜻이었지.

다만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니, 이승우를 ‘my’에 들였을 때의 이득을 셈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이승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만큼 이승우를 ‘my’에 들였을 때 얻을 이득도 상당했다.

이미 그는 고은서로부터 게이트 클리어에 도움을 받는 것으로 임시 라이선스에 대한 문제를 해결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본격적으로 현장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다. 센터의 현장 이능력자로서 활동한다는 것은 상급 에스퍼와 자주 마주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우시현과 이승우는 상급 에스퍼였고, 행여라도 척진 상대를 팀으로 만나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일은 무척 고될 것이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장에서는 갑자기 에스퍼가 필요해질 때가 많으니 쓸 만한 인맥이 중요하다.

이승우는 바람 에스퍼였고, 기동성이나 파괴력 측면에서 무척 쓸모가 많은 상급 에스퍼였다. 또, 만약 관계가 좋게 맺어진다면 그는 우시현의 친구이니 우시현과 고은교과 마주치지 않게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이승우를 ‘my’에 넣으면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 같긴 했다.

현장 가이드로서 실적을 내겠다는 것은 사감은 접어 두고 일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뜻이었다. 하루 이틀 일하고 그만둘 것이 아닌 만큼 사람을 맺고 끊는 데 신중해야 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혹은 상대가 잘못했다고 해서 척지고 돌아서는 순간 그만큼 손해 보는 일 역시 감당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이승우가 고개를 살짝 비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이 자세로 계속 대화를 해야 하는 걸까.

민망하기 짝이 없어 살짝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나려 했으나, 이승우가 물러나려는 허리를 콱 붙들었다. 하던 말을 마저 끝내라는 뜻이었다. 용케 까맣게 멍이 든 곳 아래 부근을 잡았다.

어쩐지 아까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더라.

망설이던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승우 학생, 아니 이승우 에스퍼가 진심으로 나를 원한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어요. 가이딩을 해 줄 수 있는 가이드는 넘쳐나니, 다른 가이드와 합을 맞추는 건 어때요?”

“저를 의심하실 만해요.”

“이건 의심이 아니라…….”

“다른 가이드는 많이 겪어 봤습니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이 아니면 안 돼요. 분명히 느껴져요. 왜 그동안 못 느꼈는지 의아할 정도로……. 교수님은 느껴지지 않나요.”

“…….”

그는 이승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들었다.

“저만 느끼고 있는 건가요?”

물론 느꼈다. 이승우를 처음 본 그때.

이승우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 감각. 파장이 가장 잘 맞는, 매칭률이 가장 높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마주쳤을 때 동시에 느끼는 ‘운명적인’ 감각이었다.

그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이승우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치 상대의 숨긴 무엇인가를 본 듯, 섬뜩하리만치 예리한 시선이 그의 뺨에 닿았다.

하지만 고은교는 이승우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며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느라 이승우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가이딩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몸이었는데.”

멍하니 중얼거리자, 이승우가 미소 지었다. 고은교가 돌아보자 거짓말처럼 입가에 가볍게 떠오른 웃음기가 그를 한층 더 매끄럽고 부드러워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것도 아세요?”

“……가이딩이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 다시 가이딩을 호출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러자 이승우가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미소였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 투정과 비슷한 맥락으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는 빠르게 해명하려 했다.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네, 교수님.”

“정말 아니라니까.”

“네.”

왜 말을 할수록 설득력을 잃는 것 같은 걸까. 쪽팔림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네가 아니라…… 정말 이건 사실대로 말한 겁니다. 나는 그래서 이승우 학생, 아니, 이승우 에스퍼가…….”

불시에 이승우가 그의 뺨을 만졌다. 깜짝 놀랐다. 맞는 줄 알았다…….

위협을 느끼고 몸을 움츠리자, 이승우가 만지던 것을 멈췄다. 그는 놀랍다는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이건,”

“죄송해요.”

즉각 사과한 이승우가 입맛을 다시며 그의 몸 위에서 물러났다. 물론 물러났어도 여전히 이승우의 얼굴 위에는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계속 그러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더 만질 것 같아서요.”

“…….”

“가이딩 요청은, 음. 교수님 말대로 가이딩을 오래 받지 못한 에스퍼에게 가이딩해 주는 일이 힘들다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가이딩하는 건, 가이드의 몸에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 일이라고요. 그래서 교수님이 힘드실까 봐……. 호출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후회 중이에요. 그게 마지막일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이승우의 말대로였다. 30분 가이딩 했지만, 그는 이승우를 가이딩하는 일이 무척 고되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이승우의 말에 따르면, 제 나름대로는 그의 몸을 생각해서 가이딩 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그가 설핏 눈썹을 찡그렸다.

“……가이딩 계획은 제가 짜는 겁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이승우 에스퍼가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면 안 됩니다.”

그런 건 아주 위험하다. 가이드의 몸 상태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무작정 가이딩을 해 달라고 조르는 에스퍼보다 더. 아니, 애초에 가이드를 생각해서 가이딩을 조절하는 에스퍼 자체가 있기는 한가? 그건 유니콘이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이승우를 바라보았다.

이승우는 대답 없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게 알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이승우가 순순한 녀석은 아니지. 그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여전히 조금 눈썹을 찌푸린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보다, 이승우 에스퍼의 체내 위험률 수치를 낮추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가이드가 동시에 가이딩을 진행해야 합니다. 가이딩을 조금 받더라도 자주 받아야 해요. 혹시라도 가이딩 약을 복용하고 있으면 잠깐 중단하세요. 여러 명의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약 기운과 상충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교수님 말고 다른 사람들은 가이딩을 할 줄 모르던데.”

“그건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억지로 가이딩 하면 어떻게든 몸 상태가 개선된다고 해서 받았는데 가이딩 약보다 못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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