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이승우가 말하는 건 아무래도 상급 가이드가 매칭률이 현저히 낮은 에스퍼에게 공급해 주는 억지 가이딩, ‘리듬게임’을 말하는 것 같았다.
리듬게임도 전혀 소용없다니. 그는 그런 에스퍼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이딩 알러지’라는 기상천외한 병도 있는 마당에 리듬게임이 통하지 않는 에스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이렇게 태연히 자신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조차 힘겨울 텐데.
이승우의 몸 상태를 최초로 확인했을 때, 그는 본능적인 동정심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티 내지 않고 그가 힘들까 봐 걱정했다니. 그래서 연락을 하지 않았다니. 만성 가이딩 부족 에스퍼가 그럴 수는 없는 거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너그러워지는 마음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my’에 없어도 가이딩을 요청할 수 있는 건 알고 있겠지요?”
“……네.”
이승우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시간이 있으면 해 줄 테니 자주 요청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이만 가보…….”
“교수님.”
살짝 잇새로 흘러나오는 듯한 부름이었다. 얌전한 척하고 있지만, 결코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모르는 척 이승우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이건 꽤 불공평하네요. 저만 그런 걸 느꼈다니 말이에요.”
“그런 것?”
“계속 모른 척하시겠다면 더 물어보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차피 교수님이 아니면 가이딩을 받을 수 없는데, 그렇다면 센터 방침상 교수님의 ‘my’ 목록에 배정되지 않을까요?”
“…….”
아.
그래, 맞다. 매칭률이 현저히 낮은 에스퍼에게 주어지는 최소 가이딩 보장권. 그게 있었다. 바로 그것으로 고은교는 우시현과 이승우를 쥘 수 있었다. 본래 그 약칙은 가이드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스퍼가 사용하는 것이지.
이승우는 고은교가 했던 짓을 똑같이 해서라도 그를 손에 넣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약간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이승우를 응시했다. 살짝 눈을 내리깐 채 말하던 이승우가 시선을 들어 올려 고은교를 마주 보았다.
“교수님께 싫은 소리를 들어가면서 억지로 가이딩을 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교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저는 교수님을 원하고 있어요. 그걸 가이딩 했을 때…… 분명히 느꼈고, 지금도…… 이렇게 교수님과 가까이 있으면.”
“…….”
“느껴져요.”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그건 마치…… 이승우가 그들 사이에 놓인 줄을 들고 당기는 것 같다. 느릿느릿한 목소리였지만 공기 중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넘실거렸다. 줄을 놓치는 순간 모든 것이 이승우에게로 확 기울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건 정말이지 면역이 없어 견딜 수가 없다고, 그는 재차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버렸다.
“……네, 그러면?”
“그래요, 알겠어요. 그렇게 합시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서로 파장이 잘 맞는 이능력자들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는 처음 이승우을 봤을 때 몹시 강한 인력을 느꼈고, 이승우가 자신을 적대시 하는 상황이 너무 이상해서 그때의 일이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승우 또한 그 ‘끌림 현상’을 확실히 인지했다면 그를 밀어낼 필요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그는 유독 자신에게 끌리는 에스퍼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었다. 가이드인 그가 이승우에게 그런 ‘끌림’을 느낀 건 처음이었지만 말이다.
그의 생각이 맞다면, 앞으로 이승우는 다른 에스퍼처럼 그에게 착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어차피 과거의 고은교는 이승우를 묶어 두고 조금도 가이딩을 해 주지 않는 최악의 짓을 저질렀다. 이제 그가 고은교가 된 이상, 이승우에게 속죄를 좀 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이승우는, 어느 정도 행동과 말에 교정이 필요해 보이지만……. 그건 앞으로 차차 바꿔 나가면 될 일이었다.
‘최소한 우시현처럼 막무가내로 때리지는 않겠지.’
그는 주저앉아 있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이승우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런 이승우를 내려다보며 고은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알겠으니까…… 센터로 가서 등록 요청하세요. 그러면 됐습니까?”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셨을까.”
이상하다는 듯 이승우가 중얼거렸다. 그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열려 있는 창문을 닫았다.
머릿속을 과포화 상태로 만들며 어렵게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 피곤한 정신을 쉬게 하고 싶었다.
“나갈 때는 문으로 나가세요. 정상적으로.”
“교수님.”
창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이승우가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상급 에스퍼 중에서도 등급이 높은 에스퍼들은 신체 능력이 일반인과 달랐다. 특히 이승우는 바람 에스퍼라 그런지 한번 마음먹고 움직이면 그 속도가 아주 빨랐다. 앞으로는 이런 움직임에 익숙해져야 하는 걸까?
이승우만 고은교에게 맞추어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은교 역시 이승우에게 적응하며 자신을 변화시켜야 했다. 그걸 새삼 복기하며 고은교가 이승우에게로 몸을 돌렸다.
“말해요.”
우호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고은교의 태도에 이승우는 일단 한 걸음 물러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가 예리한 눈빛을 감추며 어딘지 간절하게 들리는 어투로 물었다.
“저를 속이시려는 건가요? 내일이 되면 없는 일이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라고 대답하시겠지만.”
영 믿을 수가 없다는 눈길이었다.
그래, 어쨌든 고은교는 고은교라서 믿을 수가 없다 이거지.
자신의 에스퍼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건 상당히 불만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는 이승우를 한 번 더 이해해 주기로 했다.
“정 그러면 내일 같이 센터로 가요. 그럼 됩니까?”
“…….”
“이제 그만 가요. 나도 자야겠으니.”
*
센터 내부의 이능력자가 아닌 사설 기업, 즉 외부의 이능력자와 함께 일하려면 그 전에 센터에 협력 업체에 대한 서류 등록을 해 두어야 했다.
정확히는 일반적인 기업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 반드시 센터가 필요했다.
게이트의 시료가 개발됨에 따라 어떤 시료는 석유의 천 배의 가치를 지니기도 했고 전기, 물, 화학 원료 등 가치가 높은 대체 에너지, 부산물들이 가득 적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시료가 지구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채굴 광산이었다.
따라서 게이트의 가치가 천문학적으로 올라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료가 전혀 없는 게이트마저도 개발지 혹은 쓰레기 매립지로라도 사용할 수 있으니 일단 게이트가 생겨났다 하면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자연히 게이트가 생기기 전부터 어디에서 어떤 게이트가 생기는지, 또 묻혀 있는 시료는 어떤지 추측할 수 있는 기기와 시스템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물론 게이트가 발생하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게이트가 언제, 어떻게 생겨나는지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만 게이트가 생기기 전에는 어떤 전파 혹은 징조 같은 것이 감지되는데, 그것을 통해 가능성이 있는 곳마다 이능력자가 대기하고 있다가 게이트가 생기면 들어가 클리어해 부산물을 획득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게이트의 시료들, 더 나아가서는 게이트의 소유권을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본래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국가 소유다. 과거, 게이트를 클리어 하려면 이능력자의 목숨을 걸어야 했을 때,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야 했다. 게이트를 통해 발굴되는 시료가 모두 국고로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다만 지금, 이능력자의 수가 대단히 많아진 상황에서 게이트의 이권을 노리는 단체들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문제는 정부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게이트를 모두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이능력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부는 게이트를 감시, 관할하는 역할을 모두 센터에 맡겼다. 센터는 정부 소속 이능력자들이 있는 시설이다.
모든 사기업 및 단체는 미리 센터에 협력체로 등록을 하고, 센터에서 근무하는 이능력자와 함께 게이트를 클리어 하기만 하면 게이트의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지금 고은교의 경우에는 이미 본인이 센터의 가이드이므로 협력체 등록만 하면 모든 절차가 완료된다.
“고은교 가이드가 여기는 웬일…….”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여간에 이상하리만치 유명 인사인 몸이라니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처리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