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38화 (38/132)

#38

그는 미리 심 비서가 준비해 둔 서류를 챙겨 센터로 출근했다. 그리고 고은서의 회사, S&T를 외부 협력체를 등록하고, 어디 게이트를 클리어 할지, 팀의 이능력자 구성원은 누구이며 어떤 방법으로 클리어 할지에 대해서는 전부 공란으로 두었다. 이 정보를 등록하는 이상 센터도 제주도 게이트에 대해 알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알짜 정보를 얻게 되면 센터가 그 게이트를 자기들끼리 홀랑 먹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쪽이 ‘임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철저히 제주도 게이트에 대한 것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양아치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임시 라이선스를 가진 일반 가이드가 드문 것은 물론, 스스로 게이트를 찾아내서 임시를 정식으로 만드는 일반 가이드는 정말 흔치 않았기 때문에 센터 직원은 몇 번이나 이쪽을 힐끔거리며 봤다. 고은교가 이곳에 서 있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라는 듯 서류 처리를 하는 이능력자들의 시선을 독차지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는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필요 서류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문을 나섰다.

“수고하세요.”

오늘, 이승우가 직접 집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그에게 센터에서 보자고 했고, 이승우에게 자신은 지시를 잘 따르는 에스퍼를 원한다고 거듭하여 강조했다. 다행히 이승우는 그의 말을 똑바로 알아들은 눈치였다.

어쨌거나 그는 원래 센터에 가려던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알려 주었다. 굳이 이승우에게도 다른 게이트 정보를 오픈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승우는 학생이었지만 3학년부터 활동한 센터의 이능력자였고, 국장이 그렇게 이승우를 싸고 돈 것으로 보아 분명 국장과 꽤 안면이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승우는 친센터 이능력자라는 뜻이었다.

게이트에 관한 정보는 아무리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다. 그것이 비록 고은교가 되고 난 이후 최초로 ‘my’에 들이기로 결정한 에스퍼, 이승우라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서류 처리가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무척 빨리 끝났다. 아무래도 회사의 이름값 덕분인 것 같았다.

손목 워치로 시간을 확인한 그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어차피 이승우를 ‘my’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다시 센터로 돌아와야 했다. 삭제는 서로의 센터 애플리케이션으로 언제든지 가능했지만, 등록은 아니었다. 무분별한 등록 및 삭제를 막기 위한 센터의 방침이었다.

그는 센터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센터의 커피 맛집이다.

딸랑.

익숙한 종소리였다. 그는 내근직 업무를 볼 때면 항상 이 카페에 와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봤다.

‘오랜만에 듣는군.’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계산대로 가서 늘 시키던 메뉴를 시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해서 부탁드립니다.”

“네, 주문 받았습니다.”

이제는 아무 걱정 하지 않고 고은서가 준 카드를 쓸 수 있었다. 지금은 이 카드에 생활비 일체를 의지하고 있지만, 현장 가이드로서 입지를 쌓다 보면 이것 역시 바뀌게 될 것이다. 사람이라면 어떤 것에든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줄 알아야 했다. 고은교는 잠깐 자신의 향후 오 년 이내 계획을 점검해 보았다.

그나저나 그사이 아르바이트생이 바뀌었다. 설마 커피 맛도 바뀐 건 아니겠지?

빈 테이블로 걸어가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그는 버릇처럼 손가락을 테이블에 톡톡 두드리며 카페 밖 풍경을 구경했다. 카페 인테리어가 한쪽 벽면이 유리창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뭐지?’

아주 멀리에서 뭔가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희끄무레한 형체는 얼핏 보기에 길쭉한 번데기처럼 보였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팔로 막았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카페 유리창으로 무엇인가가 번개같이 뛰어들었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업무를 보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튀어 나갔다.

“테러, 테러다!”

“누, 누구 신고 좀 해 주세요!”

소매에 묻은 유리조각을 털며 그 역시 탈출을 위해 일어났다. 이능력자가 너무 많은 시대이다 보니, 센터에 반감을 품고 테러를 하는 ‘빌런’들의 수가 나날이 늘어 국가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센터의 보안을 뚫었을까. 센터는 나라의 이능력자들이 집결해 있는, 국가 보안과 상통하는 곳이었다. 이곳을 뚫었다는 것은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때, 도망가려던 그의 시선 안에 날아온 무엇인가가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그는 멈칫하며 자리에 멈춰 섰다.

시한폭탄은 꿈틀거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폭탄이 아니다.

그래, 그것은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밖에서 날아온 것은 테러 물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대포탄처럼 날아온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긁힌 곳 하나 없는 사람. 그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배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잠든 것처럼 기절해 있었다.

‘……차영헌?’

그것도 심지어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차영헌을 왜 모르겠는가. 차영헌은 그의 에스퍼였다. ……장이주의 에스퍼 말이다. 그가 관리했던 이십 여명의 에스퍼 중 하나이자 틈만 나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애벌레 같던 녀석이었다.

이 녀석은 가이딩을 안 해 주면 바닥에 드러누워서 꿈틀꿈틀 기어 다녔다. 하루 종일.

장이주에게는 말 잘 듣던 녀석들도 많았지만, 징그럽게 말을 안 듣는 걸로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는 녀석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런 녀석일수록 안부가 궁금했다. 가이딩은 잘 받고 있을지, 받는다면 어떤 가이드에게 받고 있을지…….

그런데 이런 식으로 안부를 알게 되다니.

가이딩이 부족해지면 자신이 인간 로켓이라도 된 듯 사방을 부수고 다니다가 센터까지 들이받는 녀석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가이딩이 고갈되었다는 걸 꼭 티 내야 만족하는 개망나니 에스퍼들이 있는데, 차영헌은 바로 그 개망나니 무리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녀석이었다.

차영헌은 마치 죽은 것처럼 자신이 부순 카페 잔해 사이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어떻게 봐도 폭주 증상이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자, 그가 아닌 다른 가이드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테러인지 뭔지 모를 것에 휘말리기 전에 비명과 함께 도망가기를 택할 터였다. 가이드라면 그 무엇보다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줄 알아야 했다. 자신의 손에 달린 에스퍼가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차영헌이 정말 폭주하면서 날뛴다면 그 역시 지금 이 자리를 피해야 했으나, 그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한때나마 차영헌의 가이드였던 적이 있는 사람이다.

별 수 없이 그는 잠든 것처럼 보이는 차영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카페 안은 겁먹은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가 오직 그와 차영헌뿐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우선 차영헌의 의식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차영헌을 불러 보았다.

“……차영헌 에스퍼?”

물론 기절한 것처럼 보이는 차영헌에게서는 그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조금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차영헌을 살폈다. 그리고 누운 차영헌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몸의 맥박이 정상적으로 뛰는지 점검했다. 그래도 다행히 맥은 정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한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구급대원이 제때 올까?

냉정히 생각해 보자. 이곳은 센터이므로 얼마 되지 않아 구급대원이 파견되겠다는 결론이 섰다.

하지만, 구급대원이 온다 하더라도 차영헌에게 가이딩을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가이딩 하기 까다로운 에스퍼 중 하나였으니까. 장이주라고 해서 차영헌과 썩 상성이 잘 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도 그는 차영헌에게 ‘리듬게임’만 해 주었다.

고은교의 몸으로도 하면 되지. 그깟 리듬게임. 지금 애가 죽기 직전인데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

그는 가볍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차영헌의 목을 살짝 감싸 쥐었다. 일단 차영헌의 몸 내부가 얼마나 꼬였는지 확인만 해 볼 생각이었다.

“……윽.”

역시나…… 엉망진창이군.

가이딩 길이 어떤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늘과 땅이 바뀌는 수준으로 꼬여 있는 몸의 혈맥을 살피며 그가 나오려는 토악질을 참았다. 평소 차영헌의 성질머리가 어찌나 더러운지, ‘리듬게임’이 가능한 상급 가이드들은 차영헌에게 가이딩을 잘 해 주지 않았다. 차영헌의 가이딩 부족 현상은 그놈의 성질을 부린 결과다.

물론 그에게는 귀엽게 굴려고 노력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자신도 차영헌에게 가이딩해 주는 일 따위는 없었을 터였다.

그는 늘 하던 대로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기운을 차영헌에게 맞춰서 때려 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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