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40화 (40/132)

#40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차영헌의 얼굴이 점점 밝아진다.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뭔가가 쏘아졌다. 언제 누워 있었냐는 듯 벌떡 일어난 차영헌이 그것을 쳐내려다가 도리어 밀려 날아갔다. 가까스로 얻은 가이드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그의 손목을 놓은 채였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놀랍게도, 차영헌을 공격하고 고은교를 보호하듯 당겨 안다시피 한 것은 이승우였다. 그는 이 말을 어디선가 한 번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그것은 쏟아지는 양동이와 판넬에서 자신을 지켜낸 남선재가 건넸던 말이었다. 순간 그는 이승우에게 강렬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이승우에게 쓰러지듯 기대었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 이승우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폭주 에스퍼가 있다고 해서 급하게 와 봤는데…….”

“…….”

“왜 말씀이 없으세요. 다치셨어요?”

“괜찮습니다.”

이승우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고은교의 발목을 부러뜨릴 듯 잡은 채 얌전히 굴라고 말하던 차가운 얼굴과는 너무나 다른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의 진짜 얼굴일까.

두려운 건지, 미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이승우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런, 씨발…….”

먼지 구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차영헌이 욕설을 내뱉었다. 흠칫 놀라 그쪽을 바라보자, 이승우가 손을 뻗어 고은교를 자신의 등 뒤로 밀어 숨겼다.

그는 이런 식의 보호를 아주 숱하게 받아 봤기 때문에 이승우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숨겼는지 정확히 알았다.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몬스터를 만나게 되면 일반 사람은 반드시 위축된다. 몬스터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의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가이드가 위협을 느끼는 순간 에스퍼는 마치 가이드의 마음과 공명이라도 한 것처럼 그를 보호하려 한다. 에스퍼 역시 이능력자이기 전에 사람이므로 위협에 반응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에스퍼에게는 가이드 역시 동일하게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일단 에스퍼는 위협을 마주하면, 그것에 시선을 떼지 않으며 가이드를 제 시야 안에 두려 한다. 시야에 가이드가 없다 하더라도 제 가이드가 두려움을 느낀 것같이 보인다면 소위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즉각 알아차리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어떤 에스퍼는 자기 자신보다 제 가이드를 더 우선하여 보호하기도 했다. 자신의 몸은 자신의 통제를 따라 주지만 가이드는 본능적인 컨트롤이 되지 않는 타인이기 때문에 변수가 있다고 여겨 더더욱 과보호하게 되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몹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부적절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항상 자신을 과보호하려는 에스퍼들에게 호통을 쳐 왔다. 자기 가이드에게 신경 쓰느라 몬스터에 소홀하면 그것은 팀의 전력 누수로 이어지거나 심하면 부상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보호는 아주 시의적절하다고 할 만했다. 이곳은 게이트가 아니기 때문에 몬스터가 없었고, 지금 고은교는 누군가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가 어색하게 이승우의 뒤통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차영헌의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뭐 하는 새끼냐?”

“그쪽은 누구십니까?”

“나?”

차영헌이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다 살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햇병아리 새끼가 주제넘게 삐약거리는 꼴을 다 보네…….”

“…….”

“쟤는 리듬게임 안 해도 돼?”

이승우는 굳은 얼굴로 차영헌을 주시한 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리듬게임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눈앞의 에스퍼가 질문을 던진 게 본인이 아닌 고은교라는 걸 맥락을 통해 알게 되었을 터였다.

이승우에 대해 두 가지 모순적인 감정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차영헌이 괘씸했다.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자신의 가이드가 되라고 협박을 받는 건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그 이승우마저 아닌 척 귀엽게 굴며 해 달라고 부탁씩이나 하지 않았던가.

우선 그는 먼지가 묻은 턱을 닦으며 이승우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래요.”

그가 대답하자 차영헌이 언제 웃었냐는 듯 웃음소리를 뚝 멈추었다.

“그래?”

아주 스산한 기세였다.

차영헌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고은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예전이었다면 차영헌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자신에게 냉정하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다른 에스퍼보다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 달라고, 자신이 가장 말을 잘 듣고 충성스럽게 구는데 왜 더 좋아해 주지 않느냐고 떼를 쓰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이렇게 강압적으로 구는 게 아니라.

“그쪽이야말로 지금 이게 무슨 꼴입니까? 가이딩을 못 받으면 센터에 이야기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지, 상관도 없는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면 됩니까?”

“상관이 없다니. 왜 상관이 없어?”

차영헌이 입술 끝을 씩 올려 웃었다.

“나를 네 ‘my’에 올리면 나도 네 에스퍼가 되는 건데.”

“싫습니다.”

“왜? 가지고 있는 에스퍼가 너무 많아서?”

“…….”

차영헌의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 석상처럼 굳어 있는 이승우를 향했다.

“수를 좀 줄여 줄까?”

그 말에는 아무래도 소름이 끼친다.

물론 이승우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호승심이 일었는지, 차가운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어디 한번 해 보…….”

“잠깐만요, 이승우 에스퍼.”

고은교는 차영헌에게 맞서려는 이승우를 붙잡았다.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과거에 차영헌과 함께 게이트 작전을 많이 나갔다. 그만큼 차영헌의 능력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차영헌의 능력은 「자객」. 즉, 암살 특화였다. 물리 계열 에스퍼가 앞에서 주의를 끌면 몰래 몬스터의 등 뒤로 돌아가 등에서부터 심장을 꿰뚫고 목숨을 앗아가는 은밀한 칼날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차영헌이 말하는 ‘죽이다’는 그 무게부터가 달랐다.

정말로 고은교가 이 자리에서 ‘그래, 내가 담당하는 에스퍼가 하나도 남지 않으면 너를 내 에스퍼로 삼아 주겠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이승우를 죽이려 들 터였다.

“그쪽,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나도 내 말을 잘 들으면 거칠게 굴지는 않아.”

현재 자신에게 보이는 차영헌의 모습이 과거의 차영헌과 간극이 벌어질수록 고은교는 자신의 마음이 닫히는 걸 느꼈다.

“제가 말을 듣지 않으면, 누굴 죽이기라도 하시게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 저질이군요 차영헌 에스퍼.”

“…….”

먹잇감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승우를 응시하던 차영헌의 표정에서 금이 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서늘한 고은교의 말에 놀랍게도 차영헌은 허둥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금이 간 표정 사이로, 진짜 차영헌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마치 무엇인가를 급히 좇는 듯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내 이름을 알아? 나를 알고 있어?”

무엇 때문인가 했더니……. 그래, 이승우도 모르는 차영헌의 이름을 고은교가 알고 있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일단 그는 이 사실을 모르는 척 잡아떼기로 했다.

“이름만 압니다.”

“이름만 안다고? 그런데 어떻게…….”

그다음 말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차영헌은 입술만 살짝 움직여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눈을 부릅뜨고 고은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니, 쳐다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차영헌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은교에게 다가오려 했지만, 이승우에게 막혀 그럴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아주 애타는 시선으로 고은교를 바라보았는데, 그건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된 것처럼 보였다.

“너 같은 사람을 알아. 그분도 너랑 똑같았어……. 너는 분명히 내 가이드야.”

그분이라면…….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도대체 자신의 말 어디에서 장이주의 향수를 느꼈는지 알 수 없으나, 차영헌은 몹시 확신에 차 보였다.

고은교는 혀를 차는 심정으로 차영헌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도 참 딱하다.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를 찾지 못해서, 장이주에게까지 굴러왔다가 이제는 장이주의 느낌이 나는 가이드를 제 가이드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꼴을 한다.

하지만 장이주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는 차영헌이 가진 희망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 주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장이주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차영헌도 자신의 가이드를 찾을 수 있겠지.

“아직까지 그 소리입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차영헌 에스퍼처럼 제멋대로인 에스퍼는 딱 질색이라서요.”

“…….”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누굴 죽인다고 협박하는 에스퍼는 제 쪽에서 사양입니다. 그런 질 나쁜 협박을 들어주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저는 제 말을 잘 듣는 에스퍼를 원하지, 제가 에스퍼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

“그럼 이만.”

이승우를 데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차영헌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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