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차영헌과의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이승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능력을 쓰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바람과 칼의 힘이 맞부딪힌다.
“뭐 하는…… 차영헌 에스퍼, 뒤로 물러나……. 이승우 에스퍼. 이승우!”
깜짝 놀란 고은교가 그들을 만류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눈이 맵게 느껴져 한 걸음 물러나자 힘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고은교는 그 자리에서 두세 걸음 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상급 에스퍼들은 그 수가 적고 희귀한 대신 아주 강력해서, 행여라도 그들끼리 부딪칠 경우 상상도 못할 사고를 초래했다. 괜히 에스퍼들은 영역 동물이니 그들 근처에 가지 마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건물만 붕괴되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을 놓고 두 에스퍼가 다투느라 인명 피해를 입혔다는 기사 헤드라인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싸움이 더 커지면 결코 사람의 힘으로 막아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에스퍼의 싸움은 무조건 초장에 말려야 했다.
그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은 뒤, 두 에스퍼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하세요.”
이 상황에서 정말로 더 기세를 올리면 그들 사이에 낀 가이드가 다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양측의 기세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차영헌이 화를 내며 훌쩍 뒤로 물러났다.
“차영헌 에스퍼야말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뭘 했다고, 나는 그냥…….”
“그게 뭐든 싫다고 했잖습니까?”
“내 말 좀 들어!”
답답하다는 듯 차영헌이 제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 답답한 게 누군데…….
황당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본 순간, 고은교는 차영헌이 자신에게 또 다가오려다가 멈칫 서는 것을 쳐다보았다.
아마 이승우가 막아섰기 때문인 듯했다. 뭔가를 깨달은 듯 차영헌이 잇새를 드러낸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명백한 질투였다.
……두통이 이는 것 같다.
“이 새끼야? 니 에스퍼가?”
“하……. 정말 언제까지 이 무의미한 대화를,”
“이 새끼냐고.”
그때 고은교는 대화를 나누려면 사람의 수준이 비슷해야 한다는 철칙을 깨달았다. 아무리 확실히 아니라고 말해 주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대화가 무슨 소용인가. 사실 이 경우는 차영헌의 말이 옳기도 했다. 이승우는 고은교의 에스퍼였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은교가 차영헌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 얘는 내 거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
“내 ‘my’ 목록 못 봤어?”
“그게 얘구나.”
차영헌의 눈이 번뜩거렸다. 이것으로 확실히 알았다.
‘우시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덤벼든 거냐, 차영헌…….’
입맛이 썼다. 마음대로 계약을 해지해 놓고, 어쩔 수 없이 ‘my’에 넣어 주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지금은 내 거라고 선포했으니 이승우에게 민망했음은 물론이었다. 조금 간절함을 담아 이승우를 올려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제발 장단 좀 맞춰 봐.’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이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게…….
‘……지금 상황이 웃겨?’
이 살벌한 분위기에서 웃고 있는 것은 이승우만이 아니었다.
“그러면, 네 에스퍼랑 싸워서 이기면 널 가질 수 있는 거지.”
차영헌 역시 실실 웃으며 제안했다. 그것을 제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신을…… 싸워서 이기면 가질 수 있는 전리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건 당황이고 뭐고를 떠나 눈살이 찌푸려지는 말이다. 차영헌의 마인드가 이렇게까지 최악이었던가?
이건 포켓몬 시합이 아니었다. 그는 승리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상품 같은 게 아니었고 말이다.
그가 인상을 확 찌푸리고 차영헌을 노려보았을 때, 차영헌은 한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는 듯 바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다정함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그 얼굴은 고은교가 장이주였던 시절의 차영헌처럼 열의가 있었다.
“포켓몬 시합이 하고 싶어? 그러면 트레이너를 데려 와.”
“…….”
그의 말에 차영헌은 물론 이승우의 입술까지 살짝 벌어진다. 두 개의 시선을 감당하며 그가 싸늘한 눈초리로 차영헌을 쏘아보았다.
‘싸워서 이겨? 이기면, 가이드를 가져?’
속이 이글이글 끓어올랐다. 그는 가이드를 상품처럼 취급하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가이드라면 누구라든 그럴 것이다. 감히 가이드를 그렇게 대접하겠다면 그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모멸감을 돌려줄 것이다.
때아닌 포켓몬 취급에 차영헌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가이드가 상품화되는 것에 민감하다면, 에스퍼는 무기나 수단 취급을 받는 것에 민감하다. 강력한 에스퍼일수록 그렇다. 그것을 증명하듯 차영헌의 얼굴에는 웃음기와 호승심이 싹 사라지고 무표정만 남아 있었다.
“넌 그 말을 후회하지 말아야 할 거야.”
그제야 아차 싶었다. 차영헌은 상급 에스퍼 중 가장 개처럼 싸움하기로 유명한 인간이었다. 소문을 들었을 때는 뜬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영 빈말은 아닌 듯했다. 움찔한 고은교가 이승우의 뒤에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섰다.
“차영헌 에스퍼! 물러서지 않으면 발포하겠습니다!”
그 순간, 카페테리아의 문과 깨진 유리창 바깥에서 얼굴과 몸을 방탄복으로 가린 대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마 차영헌이 ‘폭주’라는 것을 알고 미리 대비를 해서 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바로 달려오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을 발견한 차영헌이 쳇, 하고 혀를 차더니…… 고은교를 힐긋 돌아보았다.
마치 얼굴을 기억해 두려는 것처럼.
“차영헌 에스퍼, 순순히 투항하……!”
그러고 난 뒤 차영헌은 훌쩍 카페테리아를 넘어 저 멀리로 뛰어넘어갔다. 차영헌을 놓친 대원들은 곧바로 차영헌을 쫓아갔다. 그들은 차영헌이 가이딩을 받은 사실을 몰랐으니, 폭주한 그가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차영헌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던 고은교가 조용히 물었다.
“……갔어요?”
에스퍼의 시력은 일반인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차영헌이 완전히 가버렸는지 이승우의 눈으로 판단하면 더욱 정확했다.
“네.”
대답을 들은 그가 천천히 이승우의 등짝에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이승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줄줄 내뱉었다.
“……내 거라고 한 건, 이제 ‘my’에 다시 등록하기로 했으니까 한 겁니다. 뒷말은 차영헌 에스퍼를 속이려고 한 말이고요. 포켓몬 취급한 게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정정 서류는 제출해 뒀으니 센터로 올라가서 제 이름으로 등록하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잠깐만요.”
떠나려는 그를 이승우가 붙잡았다.
차영헌의 손길보다 훨씬 완만한 접촉이었다. 거부감 없이 뒤를 돌아보자, 도통 어떤 표정인지 알쏭달쏭한 표정의 이승우가 거기 서 있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
“같이…… 안 가시고요.”
이 민망한 상황 속에서 언제까지 얼굴을 마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고은교는 이승우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함께 센터로 올라갈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너무 쪽팔려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지만.
이승우의 눈치를 살짝 보자, 마찬가지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이승우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아까 한 말이 썩 고은교를 못 믿어서 한 말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건…….
“…….”
무심한 가이드에게 말 한마디 붙여 보려고 눈치를 보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서류는 이미 등록했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설마, 착각이겠지. 고은교는 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하도 어이가 없어 살짝 웃었다.
“아…….”
그렇게 이승우는 고은교의 눈가에 비친 웃음기를 보았다. 그건 이승우의 마음속 심지를 깊게 잡아 당겼다.
고은교는 이승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사실 이승우의 생각이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것에 가까웠다. 이승우는 고은교의 앞에서 비키지 않은 채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이승우에게 할 말이라고는 ‘비키라’가 전부였으므로 그냥 침묵을 택한 채 서 있었다.
잠깐 동안 그들은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걸까? 서둘러 서류 등록을 하러 가지 않고. 혹시 정말 자신을 못 믿겠으니 같이 가 달라는 뜻인가?
고은교는 의아해했다.
한참 만에, 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이승우가 말했다.
“……휴가, 어디로 가세요?”
고은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의도를 모르겠는 질문이었다.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이승우의 얼굴을 살피자 난감해하는 표정이 잘 정돈된 얼굴 위로 스쳤다. 그러면서도 이승우는 끝끝내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조금은 초조해 보이는 기색……?
……누가 보면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플러팅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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