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42화 (42/132)

#42

그건 정확히 1분 전에 고은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생각과 비슷했다. 그가 두 번이나 틀린 예측을 할 확률은 거의 없었고,

“제, 제주도.”

따라서 말을 더듬은 건 고의가 아니었다. 이승우가 물었다. 소유욕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이 짙은 감정이 담긴 눈, 그럼에도 다정한 말씨를 사용하여.

“겨울 바다 저도 좋아해요.”

“…….”

“누구랑…… 보러 가세요?”

맞는 것 같다. 플러팅.

고은교가 당황해하자, 이승우는 오히려 침착함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제주도 운운한 것은 맹세코 게이트 때문에 대강 둘러대려고 말을 꺼냈던 거지 정말로 휴가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은교는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대놓고 간지러운 말을 하는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다.

이승우가 손을 뻗어 고은교가 닦았던 뺨을 살짝 문질러 주었다. 그는 불에라도 덴 사람처럼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지만, 침착한 손은 아까의 난리 통에 묻은 먼지를 완벽하게 제거해 주고 나서야 떼어졌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와 여기저기 묻은 먼지들을 쭈욱 털어 낸다. 고은교는 너무 당황하여 이승우가 하는 대로 뿌리치지도 못하고 말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런 고은교를 보살피는 이승우의 모습이 꼭 아빠나 삼촌 같다.

이윽고 고은교의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이승우가 물었다.

“데려다 드릴까요?”

“……무슨.”

이게 동네 마실 갔다가 돌아오는 건 줄 아나? 제주도를 가려면 최소한 비행기를 타야 했다. 제주도가 아니라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의미인가?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짓자, 굽혔던 허리를 편 이승우가 한쪽 눈썹을 쓱 올렸다.

“제가 비행기보다 빠른데.”

‘뭐야…….’

이승우가 이런 농담도 할 줄 알았던가?

그건 확실히 이상했다. 매사에 진지한 것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능숙한 농담은.

고은교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자신이 웃었다는 것도 거의 자각하지 못했다.

“됐습니다.”

그리고 이승우의 손에 잡힌 자신의 팔을 잡아 끌었다. 손은 스르륵 풀렸다. 다음 순간 그는 등을 보이며 이승우에게 돌아섰고, 앞으로 걸어갔다.

고은교가 웃는 모습을 본 순간, 다시 한번 그의 웃음을 보고 싶다는 욕망은 마침내 고은교가 그에게 다시 웃어 줌으로써 사라졌다. 그리고 해소된 욕망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점점 사라지는 고은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이승우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웃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고은교가 자신의 농담을 듣고 웃는 날이 오다니.

*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단 한 명의 에스퍼를 ‘my’ 목록에 넣고 에스퍼와 연애라도 하듯 구는 녀석들이 있다고.

물론 진짜 연애는 아니다. 이능력자로 일찍 발현을 한 경우, 어린 녀석들끼리 모아 놓고 함께 교육 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나이가 워낙 어리다 보니 금세 친해진다고 들었다. 하나의 페어를 이루어 교육 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각별한 의리가 생기는 것에 가깝다.

가이드가 자신 외의 다른 에스퍼를 넣는 것은 배신이고, 에스퍼 역시 그 어떤 급박한 상황이 오더라도 다른 가이드에게는 가이딩 요청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가이드가 일반 가이드로 남기로 결정한다면, 정말 그 에스퍼에게만 가이딩을 해 주면서 평생 사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사실 그런 건 고등학생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다. 일반적인 성인 가이드라면 센터의 방침에 따라 매칭률이 높은 에스퍼들을 ‘my’ 목록에 넣으니까. 또 귀찮은 것이 싫고, 가이딩 수당이 필요 없는 가이드라면 자신이 꼼꼼히 따져 선정한 에스퍼에게만 가이딩을 해 주다 그 에스퍼가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치면 가이드를 그만두고 에스퍼와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

일에 미쳐 살았던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my’ 목록을 보고 있으려니…….

‘딱 그 짝이잖아.’

신규로 등록된 에스퍼, 이승우의 프로필이 파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승우만이 유일한 그의 에스퍼였다.

그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어이가 없어 코웃음 쳤다.

지금 같은 시기에 연애는 무슨……. 아니, 그리고 연애를 할 사람이 없어서 이승우와 한단 말인가. 지금이야 이승우가 묘하게 구는 면이 있지만, 또 처음에 가졌던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술렁였지만, 이대로 며칠 지나면 이런 감정은 금세 사그라질 것이다.

속 편하게 이승우에 대해 생각할 때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은 사람도 아니었다. 관계가 개선되기를 원했던 것은 온전히 게이트 때문이었지, 그가 했던 일을 잊어서도 그가 좋아져서도 아니었으므로.

그보다 신경 쓸 일이 있었다. 제주도 게이트였다.

곧 게이트가 생길 것이라는 탐지기의 예측과 달리 제주도는 계속 감감무소식이었다. 일단 게이트가 생겨야 자신도 제주도에 가서 팀원과 함께 게이트를 어떻게 클리어 할지 논의할 텐데, 게이트가 생기지 않으니 말 그대로 시간이 붕 떠 버렸다.

장이주였을 때는 일감이 무척 많아 붕 뜬 시간에 다른 일을 처리하면 됐지만, 고은교에게 주어진 일은 딱 하나뿐이었다.

무료하게 침대에 드러누워 시간을 죽이던 그의 휴대 전화에 불빛이 반짝 들어왔다.

“……뭐야?”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그리고…… ‘my’에 있는 에스퍼가 게이트에 곧 들어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머리털이 날리도록 벌떡 일어난 그는 황급히 외투를 찾아 문으로 돌진했다. 한쪽 팔에는 외투를, 다른 한쪽 손에는 휴대 전화와 차키를 챙겼다.

이승우가 방금 막 들어간 게이트는 C급 게이트로, 흔하게 생기는 둥지형 게이트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1분 동안 그는 센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이승우가 거미 둥지형 게이트에 들어갈 예정이며 이 게이트뿐만이 아니라 이 달에 이승우가 클리어 하기로 한 게이트가 하나 더 있음을 확인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수가 있나.’

거미 둥지 게이트의 난이도는 그야말로 최하였다. 사실 이능력자까지도 필요 없었다. 무장한 군인 열 명이 들어가 화기를 들고 들어가 싹 태워 버리면 게이트가 끝난다. 거미 여왕은 독이 있어 잡기가 까다로운 편에 속했지만 방독면을 쓰거나 화염 계열 에스퍼가 멀리에서 지원해 주면 그것도 문제없었다.

이렇게 쉬운 게이트를…… 이승우랑 같이 들어가서 곁다리로 클리어하고 나온다면?

제주도까지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지하 주차장까지 뛰다시피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SUV를 찾아 탄 뒤, 가능한 최대 속도로 튀어 나갔다.

그랬는데.

“입장 시간 끝났습니다.”

“……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냔 말이다.

“어차피 고은교 가이드님은 일반 가이드 아니셨어요? 당연히 못 들어가실 거라 생각해서 준비되는 대로 게이트에 들어갔는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기본 준비 시간도 지키지 않고 그냥 홀랑 들어가는 게 어디 있느냐고.

늘 FM대로 살았던 고은교로서는 분통이 터질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요즈음 하급 게이트는 고스펙 에스퍼를 투입하여 순식간에 끝내는 게 유행이라고 해도 그렇지,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이렇게 일을 진행해도 되는 건가?

“저 임시 라이선스 발급 받았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그러니까 이게 아 그러셨구나하고 끝날 일이냐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이승우가 자신에게 게이트 일정을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게 어찌나 약이 올랐는지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망할 ‘임시’ 딱지를 떼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렸다. 쉬운 길이 눈앞에 있는데,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승우에게 현장 가이드 임시 라이선스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이승우는 그냥 혼자 들어갔겠지…….

“하아…….”

미리 이승우에게 말해 두지 않은 그의 잘못이었다. 물론 이승우 역시 고은교에게 자신의 스케줄을 미주알고주알 말하지 않은 잘못도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우는 남에게 자신의 일정을 다 말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고 누구도 아닌 고은교의 잘못으로 지금까지 제대로 된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가이드에게 게이트 일정을 알려 주어야 한다는 걸 몰랐을 터였다.

빌어먹을 고은교의 업보.

‘됐다…….’

온 김에 이승우나 픽업해 가자. 어차피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나오면 온몸에 진이 빠져 제정신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때 되어서 이승우에게 자신에게 현장 가이드 임시 라이선스가 있음을 알려 주고, 게이트 일정이 있을 때 함께 가자고 말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거짓말처럼 조급함이 가라앉았다.

그가 여기까지 허겁지겁 달려왔던 것은 제주도 게이트가 확실히 생긴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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