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보고 싶었다니……. 설마, 내가 자길 보고 싶어서 온 줄 아는 건가?’
이승우는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 것은, 이승우가…….
‘이 녀석…… 왜 이렇게 안심한 얼굴이야?’
그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심각해 보이는 얼굴도 아니었다. 게이트를 막 클리어하고 나온 터라 분명 지쳤겠지만, 능력을 너무 써서 탈진했다거나 괴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럴 만한 게이트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런 얼굴이 고은교를 보자 극적으로 변화했다.
그동안 이승우가 고은교에게 심적으로 기대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이렇게 쉽게 마음을 연 건지…….
“…….”
그래, 이승우가 마음을…… 연 것 같다.
순간적으로 지나간 생각에 놀랐던 고은교는, 자신을 품 안에 밀어 넣은 채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낯선 남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승우는 저번에 고은교의 아파트에 찾아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스킨십을 하다가 스스로 당황해서 손을 거둬들인 적이 있었다. 그때 고은교는, 당연하지만 결코 이승우에게 조금의 곁도 내주고 싶지 않았었다. 아마 그런 마음이 이승우에게도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간절하게 찾아왔으면서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던 거겠지.
‘지금은…… 나도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건가.’
이승우가 오해할 만했다. 게이트에 들어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차를 끌고 이승우를 데리고 가려는 것처럼 나타났으니까.
마치 일반적인 가이드가…… 자기 에스퍼한테 그러는 것처럼.
그는 머쓱한 얼굴로 가이드들이 제 에스퍼를 데려가는 광경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승우도 이렇게 마음 놓고 어리광을 부리는 걸까 싶었고…… 그게 왠지 조금 측은하게 느껴졌다. 아마 예전의 고은교는 이승우에게 절대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적 없었을 테니까. 고은교뿐만이 아니라 이승우에게는 그 어떤 가이드도 이렇게…….
‘아니, 잠깐.’
이승우의 등을 어색하게 토닥여주며 차문을 열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가이드가 아니더라도 어리광 부릴 상대 정도는…… 있을 수 있지 않나.’
여자 친구라던가…… 부모님이라던가.
자신이 뭐라도 된 듯 이승우를 애틋하게 생각하던 마음이 금세 행방을 잃고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약간의 쪽팔림이 남았을 뿐이다.
대충 뒷좌석에 이승우를 밀어 넣은 고은교가 운전석으로 돌아와 차를 출발시켰다. 도착지는 센터였다. 그곳에 이승우를 내려주고 자신이 현장 가이드-임시 라이선스를 취득한 가이드임을 밝힌 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이딩 하실 건가요?”
“예?”
이승우를 치료실에 밀어 넣고 게이트 종합 검사(게이트 종합 검사; 게이트를 클리어한 뒤 게이트를 나온 모든 이능력자들이 일괄적으로 받아야 하는 검사 과정 일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닥터에게 받은 차트를 안내데스크에 가져가 제출하는데, 그것을 받아 든 직원이 물었다.
“차트 보니까 이승우 에스퍼가 가이딩이 필요한 상황일 것 같은데……. 아, 당연히 하시려는 줄 알고 여쭤봤어요. 가이딩실 예약 지금 해 드리려고요. 이왕 안내데스크까지 오신 김에 한꺼번에 일 처리하시는 게 편하지 않으실까 해서.”
“…….”
가이딩을 할 생각은 못 했다. 하지만 이 친절한 직원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애초에 이승우는 가이딩이 몹시 필요한 상태였다. 거기에 지금 게이트까지 갔다 왔으니 상태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생각해 보니, 이 상황에 게이트는 왜 클리어 하러 간 거야……?’
물론 계속 게이트 작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경력상으로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승우는 아직 젊고, 상급 에스퍼라 이렇게 실적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가 아니면 클리어할 수 없는 게이트가 즐비한 상황에서 굳이 무리할 이유는 없었다. 아마 신입이라 그런 걸 잘 몰라서 그랬나 싶었다.
어쨌든 고은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나이에 실적을 쌓으면 확실히 나중에 도움이 된다. 많은 경험은 결국 그 이능력자의 보증 수표가 되는 셈이니까. 왜 국장이 이승우를 챙겼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매사에 열심이니까 그랬나 보다.
그러고 보니, 그때 발표 수업 때도 고은교의 무리한 요구에 해내겠다고 장담했었지. 물론 정작 발표 수업은 빠졌지만……. 이승우는 준비 리포트며 시험지 답안이며 완벽하지 않은 게 없었던 학생이기도 했다.
이건 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스스로 실적 쌓는 것을 좋아한다니, 파트너 에스퍼로 딱이었다.
“예. 부탁드립니다.”
“B276번 방입니다.”
이왕 이승우를 책임지기로 했고, 정식으로 ‘my’에 등록한데다, 어쩌면 앞으로 꾸준히 이승우와 합을 맞춰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는 이승우와의 관계가 좋아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김에 이승우의 오해도 바로잡으면 좋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챙겨 주어야 할 텐데, 지금 챙겨 주는 게 뭐 대수라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가이딩실에 앉아 이승우가 기본 검사와 치료를 마치고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수님.”
늘 그랬듯 미소를 띤 얼굴로 이승우가 다가왔고…….
왔냐는 말을 할 새도 없이 그가 고은교의 어깨를 쥐고 고개를 내렸다. 대답하려던 말은 입술에 막혀 사라졌다. 대신 그 사이로 말캉한 혀가 파고들어왔다.
“읏, 잠깐…….”
서로 입술을 대고 있어서 말소리가 이상하게 뭉그러졌지만, 제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제지하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이승우는 당장 떨어지는 대신 아쉬운 사람처럼 미적거렸다.
그 틈을 타 얼른 입술 사이로 손을 끼웠다. 손등에 물기 어린 여린 감촉이 느껴진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음……. 인사?”
이런 인사가 어디 있어? 여긴 대한민국이다. 프랑스가 아니었다.
손바닥을 사이에 두고 입맞춤이 가로막힌 이승우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게이트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잖아요.”
그래서 감격이라도 했다는 건가.
그는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건 맞지만, 할 말이 있어서…… 지금은 가이딩을 하려고 기다린 겁니다.”
“이러지 말까요?”
“예.”
“싫어요.”
“…….”
이 새끼가 왜 이래? 싫다고 할 거면 왜 이러지 말까요? 같은 소리를 한 거냐고.
사람을 놀리려는 거냐고 물으려는데, 어깨를 쥐고 있었던 손이 풀리더니 이승우가 둥글게 그를 껴안았다.
분명 방금 게이트에 갔다 왔을 텐데, 이승우에게는 우드 계열의 향수 냄새 같은 게 났다.
“농담이에요.”
“…….”
“안기만 하는 건 괜찮으세요?”
이승우가 귓가에서 웅얼댔다. 아직 가이딩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슨 작은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폭 껴안기는 경험은…… 정말로…… 너무 어색해서, 하마터면 이승우를 밀어낼 뻔했다.
‘아차.’
잘해 주기로 했다. 이승우를 써먹으려면, 본래의 목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채 두어 번 이승우의 어깨 부근을 두드려 주는 시늉을 했다. 그런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흠. 저기, 승우 군. 아니, 승우 에스퍼.”
“네.”
안긴 채 그를 불러서인지 그의 부름에 이승우는 부드럽게 답했다. 왠지 대화가 잘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헛기침을 한 고은교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현장 가이드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어요.”
“네?”
“그러니 앞으로 혼자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
‘임시’라는 말은 쏙 뺐지만, 굳이 말 길어지게 그런 정보를 알려 줄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는 이승우가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승낙의 말은 할 것이라 생각했다. 초짜 가이드를 달고 다니는 게 처음에는 내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와 일하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현장 가이드에 비해 자신의 파트너 가이드가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이승우는 말이 없었다.
설마 잠든 건가?
머리를 뒤로 젖혀 그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 거기에 있다.
“그런 걸 왜 갖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예?”
당황한 탓에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왔다. 이승우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교수님, 게이트는 위험해요.”
상냥하게 말하지만 마치 그의 가이드 라이선스를 당장이라도 빼앗고 싶다는 눈이었다. 어린아이의 손에 위험한 것이 들린 걸 보는 어른의 눈길 말이다.
“현장 가이드 라이선스 같은 거…… 평생 쓰실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그러실 거죠?”
이승우는 다정한 목소리로, 고은교를 은근히 압박했다. 고은교는 이승우가 자신과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을 떠나, 아주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네.”
“앞으로도 혼자 게이트에 들어가겠다는 뜻입니까?”
고은교의 말에 이승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불쾌하다는 의미라기보다 말의 진의를 알 수 없어 곤란해 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혼자서 들어가지 않아요. 게이트는 팀을 이루어서 들어가거든요.”
“내가 그 팀에 들어가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
아, 그래.
제주도 비행기 표나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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