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 이후의 일은 아주 일사천리였다. 연습이라도 한 줄 알았다. 이승우는 조금도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택시를 잡았고, 따로 다니자는 고은교의 말에 그러자고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놓고 다른 택시를 잡으려는 고은교를 막아 세웠다.
“같은 호텔인데, 지금부터 굳이 다른 택시를 타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러고는 아주 뻔뻔하게 고은교가 예약한 호텔의 이름을 댔다. 그는 황당한 얼굴로 이승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호텔까지 따라서 예약한 겁니까?”
그는 당연히 이승우가 겉으로는 아니라고 말할 줄 알았다. 사람에게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 뻔뻔한 놈이 이 따위로 대꾸를 하는 것이다.
“갑자기 구하느라 꽤 애먹었어요. 빈 방이 정말 없던데, 마침 스위트룸이 공사 중인 호텔이어서 다행이죠.”
“…….”
“바닷바람이 워낙 세서 그런지 창문이 깨졌다고 하더라고요.”
“…….”
“전 에스퍼라 상관없어서 그 방을 운 좋게 잡을 수 있었어요.”
미친놈이.
“아, 벌써 도착했네요.”
바닷바람이 세기는 뭐가 세. 호텔 창문을 깨트린 주범이 바로 이승우라는 데 고은교는 자신이 한국대에서 받은 월급을 전부 걸 수도 있었다.
이승우가 야무지게 휴가 준비를 해 온 게 웃긴 건지 어이없는 건지, 아니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승우가 자신을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몰래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나온 것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객실 프론트에서 각각 방 카드키를 받았다. 스위트룸은 20층까지 올라가야 했고, 고은교는 일반 객실은 예약했기 때문에 9층이었다.
“어차피 방이 다르니 캐리어는 제가 들겠습니다. 이런 배려는 해 주지 않아도 됩니다, 이승우 에스퍼.”
“방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필요 없습니다.”
일부러 딱딱하게 말하며 캐리어 손잡이를 끌어다 쥐자, 이승우는 선선히 웃음을 흘릴 뿐 고은교가 자신의 캐리어를 가져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대신 은근하게 속삭였다.
“저는 방 같이 써도 좋은데. 바람은 막아 드릴게요. 어떠세요?”
“나는 싫어요.”
“아쉽네요.”
엘리베이터는 금세 9층까지 올라갔다. 그 짧은 사이에도 이승우는 수작질을 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냉담하게 대꾸한 뒤 캐리어를 질질 끌며 내리려는데, 그때까지도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던 이승우가 말했다.
“스위트룸이 구경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오셔도 돼요.”
“괜찮습니다.”
그가 이를 꽉 깨문 채 대꾸했다.
만약 그동안 이승우가 그를 충실히 도왔다면 그는 이승우에게 제주도 게이트를 같이 클리어해 보자고 말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승우와 같은 방을 잡고, 그와 게이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겠지.
지금의 사태는 이승우가 유도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자는 것은 안 된다고 죄다 파투를 냈으면서 이럴 때면 사람을 꾀어내려는 것처럼 친근하게 군다.
그는 어른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승우가 스위트룸에 올라가는 대신 자신을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도저히 한마디 해 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데려다줄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약간 시근거리는 목소리에 이승우는 조금 놀란 듯 멈추어 섰다.
“그냥…… 잘 들어가시는지만 보려고요. 안 되나요?”
“…….”
또 일부러 당황한 척, 불쌍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당해왔다. 안다. 아는데…….
“……죄송해요, 교수님.”
“…….”
이승우는 무척 간사했다. 고은교조차 자신이 주눅 들고 불쌍한 태도에 취약한지 몰랐는데, 이승우는 몇 번의 경험으로 고은교를 파악해내더니 금세 그것을 써먹으며 고은교를 쥐락펴락했다.
어쩌면 간사한 건 이승우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란 것일지도 몰랐다.
너무나 괘씸해서 열받아 죽겠는데도 불구하고, 불쌍해지기로 작정한 이승우와 마주하면 차마 단호하게 말할 수가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아…….”
“무거우시죠? 들어 드릴까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돌리자, 용케 고은교가 체념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승우가 재빨리 곁으로 다가와 캐리어를 받아갔다.
저게 아까까지만 해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죄송하다고 말한 사람의 얼굴이냐. 이 모습이야말로 이승우가 내내 고은교의 눈치를 보면서 끼어들 틈을 재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복도는 금세 끝났다. 객실이 코앞이었다.
“어차피 마음대로 가져갈 거면서 왜 묻습니까.”
이승우가 빙긋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무거우시잖아요. 몸도 약하신 분이.”
“…….”
고은교의 몸은 장이주였을 때에 비하면 아주 강골인 수준이었다. 고은교에게 ‘약골’이라고 부를 정도면, 장이주를 봤을 땐 아주 시체로 봤겠다 싶었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이승우를 흘겼다. 웃는 낯짝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캐리어를 끄는 이승우의 손에서 자신의 캐리어를 휙 가져갔다.
“……교수님?”
“이제 정말 따라오지 마세요. 이러는 거 아주 불쾌하니까.”
“아, 교…….”
“변명도 하지 마.”
웃는 이승우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자신의 캐리어를 든 채로 객실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꽝 닫았다.
급하게 예약한 것치고 객실 컨디션은 상당히 괜찮았다. 사실 고은교 혼자라면 해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비행기 표와 호텔, 모두 심 비서가 하루 전날 급하게 구해 준 것이었다. 그는 심 비서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짐을 풀었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눕자, 고작 비행기 한 시간쯤 탔다고 몸이 나른해졌다. 그는 누운 상태로 휴대 전화를 집어 들어 게이트 신호가 잡혔던 제주도 지리를 훑어보았다. 택시를 타고 가서 근처를 둘러보면 될 것 같은데…….
물론 그가 간다고 해서 잡히지 않던 게이트 반응이 온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근처를 돌아본다면 다년 간 단련한 짬밥으로 이 게이트가 ‘될’ 게이트인지 ‘아닌’ 게이트인지 판단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도 영 모르겠으면 그때 포기하면 되는 일이고.
시간은 많고, 급할 건 없다. 그는 게이트 신호가 잡혔다고 표시된 동그라미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박아 넣은 뒤, 팔다리를 쭉 펴고 드러누운 채 몸을 빙글 돌렸다.
“좋네…….”
그래.
정말 좋았다.
조금 추워졌다고 기침도 나지 않고,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다. 밖에 좀 오래 있었다고 해서 쓰러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아프지 않다.
사실 그는 요 몇 달 동안 고은교의 몸을 자신의 몸처럼 생각하며 지냈다. 다시 원래의 고은교가 돌아오면 어떡하냐는 식의 걱정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고은교가 벌여 놓고 사라진 일이라 억지로 강의를 떠맡았지만 무사히 잘 마무리 지었다. 국장과 훌륭히 거래를 해서 임시지만 현장 가이드 라이선스를 취득하기도 했고, 지금은 게이트를 클리어 하기 위해 답사 차 제주도까지 왔다.
이건…… 고은교의 것이 아닌 자신의 실적이었다. 그가 이루어 낸 성취였다. 아프지 않은 몸으로는 정말이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한계 없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행운이었다. 장이주였던 그는 이 모래처럼 널려 있는 고은교의 시간들이 행운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반짝인다고 했다.
습관처럼 남은 인생의 계획을 짜면서 그는 삶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몇 번이고 느꼈다.
은연중에 완전히 ‘진짜’ 고은교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에게 돌을 던져 파문을 낸 것은 다름 아닌 이승우였다.
정확히는 그의 말이 그랬다.
‘몸도 약하신 분이.’라는 말은, 마치 그에게 원래의 몸도 아닌데 왜 그렇게 뻔뻔하게 자기 몸처럼 쓰시냐는 말처럼 들렸다.
이렇게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우의 면전에 대고 문을 쾅 닫은 것은 심술이었고 화풀이였던 게 확실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고은교가 ‘원래의 내 몸을 돌려줘’라고 한들, 순순히 이 몸을 돌려주겠다고는 못하겠다.
자신은 살고 싶었다. 분명 삶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록 처음은 타의였어도 억지로나마 조금씩 살아가면서 이 삶을 제대로 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승우의 별것 아닌 말에 정곡이 찔린 듯 발끈하게 된 것은 아마 이것 때문이었으리라. 고은교 자신이, 스스로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옳지 못하다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되짚어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통째로 욕심내는 걸 보면.
이 욕심이라는 것은 또 사람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드는 것인지.
“후…….”
갑자기 게이트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졌다. 휴대 전화를 옆으로 내려놓고 팔로 얼굴을 덮으며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딩-동.
“……뭐야?”
딩-동.
호텔의 벨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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