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그는 멈칫하며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엇인가가 머릿속을 조금씩 갉작이는 것 같은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승우인가? 그를 내버려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간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저기 서 있는 건가?
아니겠지.
“그 정도로 바보이려고.”
자주 하지도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바로 사람 말소리가 들린다.
“저는 도련님께 볼일이 있습니다.”
“그 볼일이 뭐냐고 묻고 있는 건데 못 알아들으시나.”
“그걸 왜 그쪽에게 말씀드려야 합니까?”
“제가 교수님 에스퍼니까요.”
그곳에는 살짝 웃음기 띤 표정으로 심 비서를 압박하고 있는 이승우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하는 심 비서가 있었다.
문에 심 비서가 더 가까운 것으로 보아, 심 비서가 초인종을 눌렀고 근처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승우가 심 비서에게 자초지종을 캐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은교는 아까 했던 갈등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이 미친 녀석이 또 스토커 짓을…….
“이승우 군. 지금 대체 뭐 하는 겁니까?”
“……교수님.”
이승우는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지만, 기가 차서 속아 줄 마음도 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심 비서님. 들어오시죠.”
고은교가 심 비서에게 몸을 틀어 말했다. 그러자 이승우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다.
“교수님,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낯선 사람과 밀폐된 공간에 있는 건 아주 위험한…….”
“심 비서님은 아는 분입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제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승우 군, 아니, 이승우 에스퍼야말로 여기에서 뭐 하는 겁니까? 내가 누구랑 만나는지 감시라도 하는 거예요?”
“…….”
“이러는 게 불쾌하다고 방금 말한 것 같은데. 저번부터 느꼈지만, 내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해 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금 당장 상황을 모면하려고 아니라고 말하는 게 괘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이 상황을 제대로 정리해야겠다고 느꼈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절의 표현을 진작 알아듣고 자제할 일을, 이승우는 몇 번이고 그의 눈치를 봐 가며 모르는 척해 왔다.
이승우가 가이드를 오래 만나지 못했고, 하필이면 첫 번째로 만난 가이딩이 가능한 가이드가 인생에서 딱 한 번 만날 수 있는 페어 가이드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고 있다. 이승우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았으나 그를 불쌍히 여겨 그의 가이드가 되어 주기로 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이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자신에게만 그러는 거라면 어느 정도 용인해 줄 수 있겠으나 어떤 상황에서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안 된다.
“그럼 가세요.”
팔짱을 낀 채 이승우를 노려보자, 머뭇거리던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 보겠습니다.”
심 비서는 말없이 객실로 들어가는 고은교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 전에 왠지 모르게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승우도 돌아갔으니 복도에는 아무도 없어서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저 분이 이승우 에스퍼입니까?”
“아, 네.”
“도련님을 무척 아끼는 분이시군요.”
“……그런가요.”
아니라고 하기에 뭣한 광경이긴 했다. 짤막하게 대답한 고은교가 뒷목을 쓸었다. 그러자 심 비서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에스퍼들은 다 자기 가이드에게 유별나다고 듣긴 했습니다. 비지니스 파트너라고는 해도, 알고 보면 더 챙겨 주지 못해서 안달이라고요.”
“음…….”
그렇다면 그렇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말을 안 듣는 게 성가셨다. 몰래 비행기 티켓을 끊어 따라온 것도 기가 찼고. 지금도 몰래 그의 객실 근처를 감시하다가 모르는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려 하자 당신 누구냐고 을러댄 게 딱 보이는데.
하지만 이런 걸 말해 봤자 푸념으로밖에 안 들리겠다 싶어 고은교는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아, 좋아요.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더 좋은 방에 모셨어야 했던 건데…….”
“아니요. 더 큰 방은 부담스러웠을 겁니다.”
애초에 심 비서에게 일반 객실로 예약을 부탁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심 비서로부터 게이트에 들어갈 때 필요한 가방을 받았다. 말이 가방이지, 안에 침낭이 들었기 때문에 무게며 크기며 등산 배낭에 가까웠다. 심 비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방을 건네면서도 다시 한번 고은교에게 물었다.
“드실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는 거뜬하죠.”
하지만 거뜬하지 않았다.
배낭을 가볍게 들고 한 번 매보려던 고은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생각보다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가서 팔이 볼썽사납게 떨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
고은교의 근력이 장이주의 근력보다 형편없을 줄은 몰랐다.
“지금이라도 게이트 팀을 부르는 게 어떨까요.”
“……괜찮습니다.”
이를 악물며 억지로 배낭을 맸지만, 심 비서의 걱정스러운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장이주였을 땐 내가 배낭을 맨 적이 없었네.’
혼자서 게이트를 클리어 하러 다닌 것은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작전 팀과 의료 팀, 서포트 팀이 따로 있었다. 당연하지만 배낭 같은 것은 서포트 팀에서 알아서 했다. 심지어 장기적으로 게이트에서 머무를 게 예상될 때에는 텐트 수준이 아니라 컨테이너 박스를 활용해 간이 집을 짓기도 했다.
물론 그러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일반적으로는 이 배낭을 매고 게이트에 들어가야 한다. 다만, 장이주의 경우 아주 많은 에스퍼들을 ‘my’에 있었다. 평판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온갖 게이트에 들어가 실적을 낼 수 있었던 건 ‘my’에 있는 에스퍼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장이주는 에스퍼들의 게이트 일정을 손수 관리해 주면서 그들과 함께 게이트를 클리어해 왔다. 물론 센터 가이드로서 들어갈 수 있는 게이트도 있었다. 아주 드물게 ‘my’에 있는 에스퍼가 하나도 없는 게이트에 들어갈 때도 배낭을 들 일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장이주는 ‘리듬게임’을 할 줄 아는 가이드였으니 그의 환심을 사려는 에스퍼들이 아주 많았다. 오히려 그 틈을 타 장이주의 새로운 에스퍼가 되려고 야단이었다. 그땐 더 에스퍼들이 장이주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러니 그는 자기 손으로 자기 배낭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예, 그럼.”
심 비서는 아주 깔끔한 사람이었다. 구질구질하게 한 번 더 묻지 않고, 게이트에 도움이 되는 물품을 전해 준 그는 바로 객실을 떠났다.
‘……아무래도 게이트 신호가 안 잡히면 게이트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니까.’
고은교가 심 비서의 안중에 없다기보다는 자신이 전해 준 배낭을 고은교가 쓸 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고은서가 꾸려 준 이능력자 팀 역시 제주도에서 철수했고 말이다. 행여나 정말로 제주도 게이트가 생기더라도 고은교는 단신으로 들어가지 않을 테니 이것 역시 문제가 없었다.
고은교도 그렇게 생각했다.
제주도 게이트가 열릴 확률이 희박하다 생각했고, 그랬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주도에 왔다. 혹시라도 게이트가 열릴 만한 조짐이 보이면 심 비서에게 연락해 이능력자 팀을 다시 불러올 생각이었다.
자신은 이능력자 팀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가면 된다. 듣기로 이능력자 팀에는 지원팀이 따로 있었으니 배낭은 굳이 챙기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만약을 위한 물건이었다. 게이트를 들어갈 때 배낭이 없는 건 영 이상하므로 일단 챙겨 놓은 습관에 가까웠다.
고은교는 생각에 잠긴 채 무거운 배낭을 호텔 구석에 놓았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간단히 씻은 고은교는 태블릿을 꺼내 게이트 신호가 잡혔던 곳을 신중하게 재확인했다. 어디부터 확인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듯했다. 그의 눈이 제주도 지리를 빠르게 훑었다. 게이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곳보다는 호텔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근히 동선을 만드는 게 훨씬 경제적일 것 같았다.
조식을 먹기 위해 이동하는데, 문득 이승우가 생각났다. 스토커라도 되는 듯 항상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녀석이 웬일로 없나 싶었던 것이다.
‘아니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승우는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흠…….”
아무리 이승우라 해도, 본래 자존심이 대단한 녀석이니 심 비서가 보는 앞에서 면박을 주어서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어쩌면 그대로 서울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입맛이 조금 찜찜했다. 이렇게 서로 얼굴을 붉힌 채 서울로 보내도 되나 싶었다.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
이승우도 슬슬 자신이 비정상이라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고 있나 당황스럽겠지. 물론 고은교는 이승우가 왜 그러는지 대충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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