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흠…….’
고은교는 이승우에게 넘겨주려던 소형 탐지기를 넘겨주는 대신 꽉 잡았다. 소형 탐지기를 받아 절벽 아래로 내려가려던 이승우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생각해 보니 승우 군을 혼자 보내도 되나 싶은데. 같이 내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이승우가 게이트 탐지기 같은 걸 써 봤을까? 의젓해 보이지만 이승우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햇병아리였다. 그리고 그 교양 수업, 학생들 수준이 정말 말도 못할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이승우라고 해서 아주 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의심스러운 눈길로 이승우를 훑자, 이승우가 빙긋 웃으며 소형 탐지기를 쥔 고은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래요, 그러면…….”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몸이 휙 올라가더니 시야가 달라졌다. 쑥 빠지는 엉덩이 아래로 단단한 뭔가가 안정감 있게 받혔다. 손인 듯했다.
“……승우 군?”
“네, 교수님.”
“지금 뭐 하는…….”
난데없이 안긴 채 들어 올려졌다.
‘아니, 업히는 방법도 있잖아!’
“내려갑니다.”
엘리베이터도 아닌 주제에 친절한 안내가 들려왔다. 당장 뭐라고 항의하려던 고은교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곧 두 사람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이승우는 계단이라도 내려가는 듯 천천히 허공을 디디며 내려가고 있었다.
“……이럴 거면 그냥 손만 잡아도 되지 않나요?”
“어깨라도 빠지시면 어떡해요.”
이승우가 태연히 귓가에 속삭였다. 겨울 바닷가이기 때문인지 공기가 몹시 쌀쌀한데 이상하게 뺨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고은교는 웅얼거리듯 항변했다.
“아니면 업는다든지…….”
“다음에는 그렇게 할게요.”
“약속했습니다.”
공손한 말투로 은근히 제멋대로다. 알고 있었지만 참 발칙하기 짝이 없다.
불평을 늘어놓아서 뭐 하겠는가?
그는 말없이 이승우의 품에 안겨 절벽을 살펴보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절벽에 특이점이 있는지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애써 휑한 발밑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절벽을 보다보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자연히 눈에 들어오게 된다.
‘……고소공포증이 있나?’
장이주였을 때는 없었는데, 고은교에겐 약한 고소공포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발밑을 내려다보자 살짝 몸이 떨리더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이승우의 품에 조금 더 달라붙었다. 그에 맞춰 이승우가 살짝 몸을 추켜 올려주었다.
“추우세요?”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할지 고민하던 그는 그냥 이승우의 말에 긍정하는 것을 택했다.
“……조금.”
“더 세게 안아 드릴까요?”
이승우가 놀리듯 말했다. 그는 어이없는 눈으로 자신의 에스퍼를 힐끗 쳐다보고는, 얼굴을 이승우의 가슴팍에 붙여 눌렀다.
“그냥 빨리 내려가.”
“…….”
웅얼대는 소리를 용케 들었는지, 몸이 급격하게 아래로 쏠렸다.
떨어지듯이.
그는 어디선가 이런 감각을 한 번 느껴본 적 있었다. 그게 언제였는지 막 떠올리려는 순간, 귀 옆으로 스쳐지나가던 바람 소리가 멈췄다.
삐, 삐, 삐, 삐-
신호가 그쳤던 탐지기에서 한 번 더 신호가 울렸다. 이승우는 도착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고은교는 게이트가 생기려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을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정말 신호가 잡히네.”
이승우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머리끝까지 기분이 고양되었다. 잔뜩 흥분한 채 그는 탐지기가 반응한 곳을 정신없이 응시했다.
놀랍게도 절벽의 가장 아래, 꽤 넓은 공간이 있었다.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단순한 구덩이라고 하기에는 좀 큰 공간 말이다.
이곳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은교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빠르게 말했다.
“내려 주세요.”
“미끄러지시면 어떡해요.”
그러면 계속 안고 다닐 생각인 건가. 어림도 없다.
“괜찮습니다.”
단호하게 말하자,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이승우가 고은교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파도가 계속 쳐서 바닥이 미끈거릴 줄 알았지만, 의외로 바윗결은 거칠었다. 그는 탐지기를 높이 든 채 신호가 오는 방향으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런 고은교의 뒤를 이승우가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뒤따라왔다.
“왜 반말을 하다 마세요?”
“뭐라고요?”
“아니에요.”
이승우가 갑자기 말을 붙이길래 고개를 들었는데, 그는 실없는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면 왜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 또 삑삑거리던 탐지기의 신호가 끊어졌다.
“흠.”
‘이곳이 맞는 것 같은데…….’
절벽 아래에 위치한 작은 동굴을 빤히 바라보던 고은교가 이승우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이승우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굳이 소리 쳐 부를 필요가 없었다.
“저 동굴에 게이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승우가 동굴 안쪽을 들여다보더니 고은교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신호는 잡히지 않는데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막힌 것 같아요. 혹시 이능력으로 동굴을…… 조금만 부숴 볼 수 있겠어요?”
이승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대답과 동시에 뒤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가 불러온 바람이었다. 이승우는 얼마나 큰 힘을 써야 하는지 파괴력을 가늠해 보는 듯했다.
“이거 문화재 같은 건 아니겠죠?”
힘을 쓰기 전에 이승우가 장난스레 말했다.
“아닐 겁니다.”
“세기는 어느 정도로 할까요?”
문득 고은교는 이승우의 능력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테스트해 보고 싶어졌다. 그가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자, 이승우 역시 눈을 깜빡이며 고은교를 응시했다.
“최대 출력으로.”
이승우의 눈이 살짝 접힌다.
이승우는 혹시라도 고은교가 바람에 휩쓸려 갈까 봐 고은교의 뒤에서 그를 붙잡아 안았다. S급 에스퍼, 그것도 원소 계열의 상급 에스퍼가 힘을 쓸 때는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순순히 이승우에게 협조했다.
불어오던 바람이 점점 심상치 않아지더니 물방울이 튀었다.
물방울?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가 헉 소리를 내며 이승우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호텔을 무너뜨릴 셈이에요?”
제주도 앞바다에서 허리케인을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승우는 그의 귀에 대고 ‘최대 출력이라면서요’라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순순히 힘을 흩뜨렸다.
“평범하게 해, 평범하게.”
고은교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머리 뒤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어찌나 바람의 세기가 강력했던지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리고 눈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바람은 더더욱 강해져서 돌풍이 되어 동굴 벽에 부딪혔다.
그는 적어도 쾅, 하는 소리가 나거나 혹은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람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흡수된 것이다…….
이승우가 신기하다는 듯 동굴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이 너머에 뭐가 있긴 한 것 같네요.”
고은교가 눈을 빛내며 동굴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그 뒤를 이승우가 달라붙은 채 따라왔다.
그들은 곧 바람이 흡수된 동굴 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살짝 두드려 봅시다.”
“음……. 제가 할게요.”
애초에 이승우를 시키려고 했다. 지금 동굴 벽은 육안으로는 그저 동굴 벽처럼 보이지만, 사실 동굴 벽이 아닐 수도 있었다. 게이트의 입구는 유기체처럼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까 이승우가 발산했던 파괴력을 그대로 품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은교처럼 연약한 피륙을 가진 인간이 손을 댔다가는 순식간에 찢겨 나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고은교의 승낙에 이승우의 팔이 뒤에서 뻗어 나왔다. 손은 동굴 벽을 가볍게 노크했다.
퉁, 하는 소리가 났다.
“안이 비어 있는 것 같아요.”
“흠…….”
게이트와는 관련 없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호기심이 샘솟았다. 고은교는 자신의 에스퍼에게 다시 지시했다.
“조금 더 세게 쳐 봐요.”
“네.”
이승우는 아까 노크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짝 주먹을 쥐고 동굴 벽을 두드렸다. 다만 같은 동작이었음에도 그 소리는 아까처럼 가볍지 않았다.
쿵, 쿵.
“꽤 단단하네요.”
신기하다는 듯 이승우가 말했다. 그리고 고은교를 돌아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눈짓이었다.
고은교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더 세게.”
“네.”
이승우가 다시 동굴 벽을 두드렸다…… 주먹과 벽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는 소리였다. 콰앙,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동굴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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