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51화 (51/132)

#51

고은교는 잠시 고민했다. 그는 최대한 냉정하게 판단하려 했다.

이승우는 중요한 전력이다.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그에게 안겨서 이동한다면 이승우는 고은교가 신경 쓰이고 불편해 제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꿔서 생각하면, 고은교 역시 중요한 전력이었다. 이승우의 유일한 가이드였으므로.

고은교가 가이딩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다면 이승우 역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게다가, 이승우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고은교를 주시하며 그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봤을 때, 이승우는 지금 몹시 초조해하고 있는 것을 넘어 스트레스 반응까지 보일 수 있었다.

애초에 이승우는 고은교가 자신의 가이드라는 것을 알아본 이후로 늘 그를 과보호하려 했다. 그런 고은교와 단 둘이 게이트에 떨어져버렸으니, 지금 얼마나 그 속이 끓고 있을 것인가.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에스퍼의 스트레스를 방치하면 차라리 같이 죽자고 덤벼들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럽시다.”

결국 고은교가 백기를 들었다. 아니, 버티려고도 안 했다. 그는 순순히 이승우에게 몸을 돌려 팔을 벌렸다.

일정한 신체 접촉은 그들의 불안감을 떨어트려 줄 것이다.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이승우는 고은교를 바로 마주 안아 올렸다. 절벽에서 하강할 때와 비슷한 포즈였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안긴 채 이동한 적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아주 어색한 접촉이었지만, 이승우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익숙해졌다.

고은교가 제대로 자리를 잡자 이승우 역시 고은교만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사방을 살피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오감을 통해 게이트의 규모나 보스방의 위치 등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고은교는 이 상황에서까지 미숙한 가이드인 척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이승우에게 대놓고 물었다.

“보스방은 어디 있는 것 같아요?”

“음…… 잠시만요. 아직 바람이 돌아오지 않아서.”

고은교를 안은 채 걸으며 이승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으레 그렇듯 보스방은 게이트의 가장 마지막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미로 같은 형태의 게이트가 드물지 않아서, 이 수정 동굴도 여러 갈래의 길이 꼬아져 있었다. 다만 이승우는 바람 에스퍼였기 때문에 능력을 사용해 올바른 길을 찾아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 크기면 적어도 A급 게이트는 되는 것 같네요.”

“네.”

“그나저나 꽤 편리한 능력이군요. 게이트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건.”

고은교가 능력을 칭찬하자, 이승우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장이주였을 때 이승우가 곁에 있었다면 더 많은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자신이 과로사하지 않았다면 좋은 페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때도 이승우가 자신을 선택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곧 세 갈래 길이 나왔다. 이승우는 망설임 없이 왼쪽 길을 선택했다.

“몬스터는 어떤 종류인 것 같습니까?”

“글쎄요…….”

불안의 여파인지, 아니면 능력을 쓰고 있어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인지 이승우의 대답은 유독 느리고 짧았다.

이곳은 바닷가 동굴 안에 생긴 게이트였다. 겨울답지 않게 공기 중 습도는 높았고, 발걸음 소리가 둔탁할 뿐 아니라 이따금 찰박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으로 보아 웅덩이도 군데군데 고여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방이 나타났다.

당연히 몬스터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이 이상했다. 입구와 통로는 캄캄해서 거의 사물이 식별되지 않았다.

“들어가 봅시다.”

“네.”

짧게 대답한 이승우가 첫 번째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고은교는 이승우가 바짝 긴장해 있음을 근육의 경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달도 해도 없었지만, 첫 번째 방은 상당히 밝았다. 야광주 같은 것들이 동굴 천장에 가득 박혀 환하게 방 안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생각대로였다.

이 게이트는 수정 동굴처럼 이루어져 있었다. 곳곳에 고드름처럼 종유석들이 수없이 자라나 있고, 그것은 몹시 반들반들하여 야광주의 빛을 반사시켰다. 종유석 끝마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났다. 바닥에 생긴 웅덩이는 종유석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고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천장에서 물처럼 흘러내린 종유석들은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바닥에서 솟아오른 돌덩이와 합쳐져 기묘한 모양을 이루었다.

자세히 보니 종유석 역시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자수정인가?’

굉장한 시료가 묻혔을 거라고 듣기는 했는데, 보석이라니…….

보석에 관심이 없어 이 보석 동굴의 보석들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석을 시료로 둔 게이트는 늘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팔려나갔다. 그는 마치 이세계로 떨어진 듯 환상적인 풍경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문제가 없다면…… 이대로 통과합시다.”

이제 이승우는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는 몹시 신중해 보였다. 이승우의 태도는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어떤 몬스터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공략할 수 없는 종류도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첫 번째 방을 가로질러갔다.

그때까지도 방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막 첫 번째 방을 통과하려 했을 때, 자수정 종유석인 줄 알았던 것들이 꾸득, 꾸득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

기민하게 몸을 돌린 이승우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들 주변으로 바람이 모여드는 게 느껴졌고, 이승우는 일말의 당황도 없이 자수정 골렘들을 하나씩 침착하게 박살 냈다.

하지만 골렘들은 박살 내면 박살 낼수록 몰려들었다. 진동으로 생물체 반응을 느낀 듯했다. 골렘의 종류에는 보석 골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돌 골렘 역시 있었다. 심지어, 부서진 골렘들은 저들끼리 합쳐져 다시 일어서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던 고은교가 속삭였다.

“몬스터 안에 핵이 있는 것 같은데……. 가슴이나 배에 색이 조금 다른 돌이 있습니다.”

“아주 가루로 만들어야겠네요.”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고은교를 안은 채 훌쩍 뛰어오른 이승우는 가볍게 첫 번째 방 끝에 착지했다. 그런 다음, 방 한가운데에 강력한 허리케인을 불러일으켰다.

골렘들은 비명도 내지 않고 강력한 바람의 중심부로 빨려 들어갔다.

그 안에서 골렘은 핵이고 뭐고 믹서기 안의 야채들처럼 완전히 갈렸고, 그렇게 갈려버린 골렘들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승우 군은…… 강하네요.”

그 광경을 지켜본 고은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가 이상하게 기억이 날락 말락 했다. 이 능력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니다. 그럴 리 없었다. 그는 분명히 장이주였을 때 이승우를 알지 못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본 거지?’

이런 기분을 언젠가 한 번 분명히 느꼈던 것 같은데. 혹시…… 꿈에서였나? 운명의 에스퍼이니 꿈에서 한 번 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그렇게 그들은 첫 번째 방을 통과했다.

*

두 번째 방 역시 첫 번째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골렘의 종류와 수가 바뀌었다. 종유석 대신 거꾸로 매달려 있던 박쥐의 형태를 띤 골렘들이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

크기가 작아지면 몬스터가 약해졌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작고 강력한 몬스터는 까다롭다. 스피드가 빠르고 예민해서 위협을 느끼면 잘 숨어 있다가, 가이드의 뒤로 돌아와 공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상급 에스퍼가 없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겠지만, 골렘형 몬스터에 익숙해진 이승우는 그들을 순식간에 갈아 버렸다. 단 한 마리도 이승우의 공격을 피해 가지 못했다. 천장에서 돌 박쥐였던 것들의 잔해가 비처럼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과연 이승우는 강력한 에스퍼였다. 그는 완벽하게 고은교를 보호하면서 몬스터들을 제거했다.

“콜록, 콜록.”

그렇지만 사방으로 날리는 먼지만큼은 이승우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랬다. 정말이지, 먼지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동굴 천장에서 부스러진 잔해들이 공기 중으로 둥둥 떠다녔다. 그런데 돌과 수정체인 골렘들이 전부 갈리면서 먼지가 되는 상황이니, 그야말로 모래로 이루어진 비를 맞으며 다니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곳은 동굴 안인지라 모래로 만들어진 비를 피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는 모래가 공기처럼 익숙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됐다. 닦아도 닦아도 어차피 다른 방으로 옮길 때마다 똑같은 상태가 되었으므로 귀찮게 털어낼 필요 없이 그냥 먼지를 뒤집어쓴 채 다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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