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여기는 꼭 크리스털 동굴 같네요.”
이승우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얼굴에 잔뜩 묻은 모래를 닦아 내던 고은교가 대꾸했다.
“멕시코에?”
“네.”
멕시코에 있는 수천 개의 크리스털 동굴 게이트 군집은 게이트 하나하나가 엄청난 가치를 품고 있었다. 다만 그만큼 대단히 위험하기로도 정평이 났다. 일반인보다 강한 이능력자라 하더라도 그들을 보호할 잠수함 혹은 방호복과 산소통이 없으면 클리어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기로 악명 높은 게이트였다.
고은교 역시 그 게이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멀리도 갔군요.”
“바람 에스퍼가 있으면 클리어가 수월해 지령이 자주 내려와요. 여름 방학 때 시간을 내서 다녀왔습니다.”
하긴, 바람 에스퍼가 있으면 적어도 폐를 태우는 산성 공기와 장기간 수중 잠수가 필요한 상황 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의외로 게이트는 지형지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신이었더래도 그런 위험한 게이트를 클리어할 때 이승우가 있는지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여름 방학 때 굳이 시간을 내서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오다니. 웬만한 의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굉장하네요.”
고은교가 중얼거렸다. 이승우는 별로 대단할 것은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각 나라와 기업에서 괜히 원소 계열 에스퍼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와 달라는 요청이 이렇게 많다니, 그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이승우를 훑어보았다.
크리스털 동굴 게이트는 주로 마그마로 형성된 지형에 생겼다. 그곳에서는 실제로 자연적으로 생성된 크리스털 동굴을 볼 수 있었다.
이승우는 그곳에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크리스털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위험했지만 그만큼 황홀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도.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는 이승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대한 크리스털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석고와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바닥을 걸으며 골렘들을 부수고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거대한 동굴은 일단 클리어만 하면 굉장한 부산물을 뱉어냈다. 현재 멕시코를 먹여 살리는 건 다름 아닌 이 크리스털 동굴 게이트 군집이었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별생각 없이 불쑥 말하자, 이승우가 그를 흘긋 바라보았다.
“왜 안 가셨어요?”
“그냥, 일정이 워낙 많아서……. 그리고 멕시코는 장기간 비행을 해야 해서 몸에 무리가 간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가 말하는 것은 장이주였을 시절의 이야기였다. 멕시코는 너무 멀어 적어도 열네 시간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러시군요.”
이승우가 뜻 모를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정이 많으시기는 했죠.
워낙 낮은 목소리라 고은교는 듣지 못했다.
“어땠습니까?”
“네?”
“크리스털 동굴 게이트 말입니다. 이곳이랑 비슷한 것 같은가요?”
그 말에 이승우가 살짝 미소 지었다.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관광지 같아요.”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멕시코에 생기는 게이트가 유달리 위험하다고 듣기는 했지만……. 고은교는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네. 발밑으로 마그마가 흘러가는 게 보이는 데다 그냥 숨을 쉬면 몸 안이 익을 정도로 공기가 뜨겁거든요. 특히 발목까지 물이 차 있는데, 그 물은 계속 끓어서 에스퍼가 계속 신경 써 주지 않으면 화상 입기 십상이에요.”
“흠, 그래서 가이드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는 거군요.”
“제대로 된 가이드(Guide; 안내원, 길잡이)가 있으면 탐험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죠.”
그 말에 고은교가 피식 웃었다.
“방금 그건 본인을 말하는 겁니까?”
“네.”
머리에 묻은 석회 가루를 털어내며 이승우가 웃었다.
그들은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며 게이트를 천천히 공략해 나갔다. 게이트의 크기가 큰 만큼 방의 갯수가 많았지만 이승우는 확실한 화력으로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방 안의 몬스터들을 박살 냈다. 혹시라도 몬스터가 남아 있는 것 같으면 두 개 분의 방을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몬스터들을 모두 제거했다.
게이트 작전을 진행하는 이능력자의 수는 단둘. 마지막 방, 보스 방에서 보스를 잡다가 남은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끌게 되면 아주 곤란했다. 가이드를 지킬 에스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승우가 반드시 보스 몬스터와 일 대 일로 대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후방에 남겨진 가이드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가능성은 반드시 0퍼센트로 줄여야 했다.
열여덟 번째 방을 막 나섰을 때, 고은교는 급속도로 차가워지는 공기를 느꼈다.
“이건…….”
푸른빛과 보랏빛이 도는 수정들이 동굴 천장에 가득 박혀 있었다. 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탁 트여 있는 공간이었다. 휴대 전화의 후레쉬로 길을 밝혀 가던 이승우가 불을 껐다. 휴대 전화의 배터리를 아껴도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해저 동굴 게이트는 그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몇 개의 방을 제외하고, 시력이 필요 없는 수중 생물에게나 적합한 어두운 방들이 여럿 있었다. 심지어 어떤 방을 잇는 통로는 빛이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에스퍼의 눈으로도 앞을 분간할 수 없다고 했다.
다행히 이승우가 휴대 전화를 지참한 채 게이트에 입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구간에 휴대 전화의 후레쉬를 이용하여 적들을 섬멸하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이승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곳이 터닝 포인트인 것 같네요.”
이승우는 이미 이곳이 터닝 포인트인 것을 알고 있었는지, 별다른 표정 없이 대답했다.
“네. 앞에 방이 하나만 남아 있어요.”
마지막 방은 무조건 보스 방이었다. 바람 에스퍼가 확인해 준 내용이니 의구심을 품지 않아도 될 듯했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서 체감상 체력과 시간을 그렇게 많이 쓰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느끼기로 이승우는 너무 유능한 에스퍼였다. 가이드를 품에 안고 움직여야 한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각 방을 통과하는 실력이 정확하고 깔끔했다. 능력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완급을 조절하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게이트를 클리어해 나갔다.
보스 방이 코앞이라니, 고은교는 처음 이 게이트에 떨어졌을 때 느꼈던 막막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게이트의 크기는 확실히 A급에 준할 만큼 거대했다. 하지만 들이는 공에 비해 시료로 개발될 여지가 많아 보이니 클리어할 목표값이 뚜렷한 게이트라 할 만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승우와 함께라면 말이지.
“좋네요. 이건…… 호수인가?”
“한 번 볼까요?”
보스 방 앞은 안전하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들은 함께 호숫가로 갔다. 자수정이 박혀 있는 천장 아래, 거대한 호수가 자리해 있었다.
그 아래로 구멍이 뚫렸는지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와 동굴 안을 채우며 수정의 빛과 공명해 한층 동굴 안을 환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는 잠깐 멈추어 서서 이 환상적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해파리들이 은은한 빛을 뿌리며 호수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 물에 독성이 없다는 의미다. 적어도 생물이 살고 있으므로.
“짜네요. 바닷물이에요.”
그사이 호숫물을 맛본 이승우가 말했다. 이 게이트는 해저 동굴이 분명했다.
“씻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은교 역시 호수에 가까이 다가갔다. 주변에 몬스터의 기척이 감지되지 않는 모양인지 이승우 역시 어느 정도 긴장을 푼 것이 느껴졌다.
호수가 있어서 이렇게 공기가 시원한 걸까?
그는 텁텁한 입 안을 혀로 훑으며 호수 근처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신발을 벗어 뒤집자 모래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러지 않아도 이 짧은 거리를 걸어오는데 양발이 버석버석해 발이 불편한 참이었다. 이승우의 품에 들려 여기까지 왔으니 이렇게까지 신발 안에 모래가 쌓인 줄도 몰랐다.
그걸 본 이승우가 키득거리더니 옷을 훌떡 벗고는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첨벙, 첨벙이는 소리가 났다.
고은교는 눈썹까지 튄 물방울을 닦으며 이승우가 헤엄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호수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었다. 호수 중간까지 간 이승우는 거의 어깨까지 잠겨 있었다. 그는 이승우가 잠수해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자신 역시 호수 안으로 발을 담갔다.
한순간에 모래와 돌 알갱이가 물살에 쓸려 내려간다.
“아…….”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숫물은 얼음처럼 시원하고 맑았다. 단순히 발을 씻고 있을 뿐인데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호수 안으로 들어오자 저만치 헤엄쳐 갔던 이승우가 곧바로 돌아왔다. 게이트 안에 있는 내내 이승우는 지금처럼 자신을 과보호할 것이다. 그것이 조금 안쓰러운 동시에 믿음직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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