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53화 (53/132)

#53

고은교는 저도 모르게 이승우의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흰 뺨에 달라붙는 것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그의 얼굴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그는 이승우처럼 윗옷을 벗고 몸 전체를 씻어 내는 대신 발과 손을 씻은 뒤 꼼꼼하게 얼굴에 묻은 모래를 닦아 냈다. 손이 호숫물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피부가 푸른색으로 보였다. 그것이 신기해 연신 물 안에서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이승우가 그의 근처에 가까이 다가왔다.

“수영하실 거예요?”

“아니.”

이 신비로운 해저 동굴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고은교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이승우에게 대답하고, 호수 안으로 좀 더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호숫물은 거의 찰랑이지 않았다. 다만 이승우가 움직일 때마다 파문이 일었다.

그는 생전에 꼭 동굴처럼 생긴 게이트에 가고 싶었다. 사실, 그의 버킷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게이트는 없었다. 그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싶어 했다.

언젠가는 가이드가 아니라 에스퍼로 발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멕시코에 있는 수중 동굴 수백 개가 하나의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게이트가 아니라 실제 동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고은교가 덧붙여 중얼거렸다.

“멕시코의 수중 동굴들은 하나의 암석에 수백 개의 구멍이 난 것이나 다름없어요. 이 게이트란 것도 어쩌면 수천, 수만 개가 하나의 원형으로 연결되어 있는 걸지도 모르지.”

“…….”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게이트를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해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가요.”

다른 세계……. 이승우가 고은교의 말을 곱씹어 보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옛날부터 게이트가 좋았어요. 새로운 세상이란 걸…… 늘 동경해 왔거든요.”

“…….”

그가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던 이유는 한결같았다. 그의 생이 아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생물에게 삶이란 늘 고통을 피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었으므로.

게이트에 있을 때면 잠깐이라도 그 지겨운 현실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게이트 안에서 아프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는 그 특수한 환경이 주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리고 그 자유에 서서히 중독되었다.

“승우 군은 어때요?”

“…….”

“왜 현장 에스퍼가 되었습니까?”

철벅, 하는 소리가 났다. 이승우가 움직이고 있는 소리였다.

그는 이승우가 자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대신 호숫물 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흰 다리와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승우는 고은교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영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교수님은…….”

“…….”

“가끔 다른 사람 같아요.”

그 내용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에, 고은교는 너무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다. 호숫물에 팔을 넣어 씻고 있던 모습 그대로.

낮게 가라앉은 이승우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전에 제가 알던 교수님의 모습과 지금 모습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이럴 때면 교수님이 정말 다른 사람인 건 아닌가…….”

“…….”

“그런 생각을 해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무슨 소리냐고 물어야 하는 걸까? 왜 대답은 하지 않고, 이상한 말을 하는 거냐고 웃어야 할지도 모르지.

그것도 아니면…….

사실 내가 진짜 고은교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고 말해야 하는 걸지도.

고은교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호숫물 아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진짜 고은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이승우는 어떻게 반응할까.

화를 낼까?

아마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을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상하죠.”

뜻밖에도 이승우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 말에 고은교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제 옆을 바라보았다. 물에 젖은 이승우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자신이 품고 있는 비밀을 이대로 말해 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건 그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질서였다.

이승우는 생각보다 그와 가까이 앉아 있었다. 게이트의 지형이 일반적이지 않아 목소리의 울림이 밖과 같지 않은 듯했다. 이토록 가까운데 마치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린다는 게 이상했다.

고은교는 입술로 후, 하고 숨을 뱉어냈다. 그는 호숫물에 비친 제 얼굴이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조금 안심했다. 동시에 우스웠다. 이 얼굴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지금에 와서는 고은교의 몸에 완전히 적응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고은교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날카로운 의문에는 어쩔 수 없이 취약했다.

그는 호숫물에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 흥건한 물기를 털며 말했다.

“그건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요. 이전의 내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거니까.”

“……네.”

이승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정한 손이 고은교의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을 살짝 훔치고 떨어졌다.

그의 손은 미지근한 듯 차가웠고 축축한 흙냄새가 났다. 그 순간 고은교는 이승우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못 견디게 궁금해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이승우를 빤히 바라보자, 이승우는 꼭 무슨 말을 더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가 이내 다물었다. 미심쩍은 것 같기도 하면서 전혀 모르겠다는 의문을 담은 듯한 저 표정.

문득 그는 이승우가 알고 있는 고은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왜 좋지 않았어요?”

“글쎄요.”

그건 꽤 많은 의미를 함축한 대답이었다. 고은교는 이승우가 한 대답에서 그걸 당신이 모르지는 않을 거라는 다정한 책망을 읽어냈다.

고은교는 이승우가 무엇인가 조금 더 첨언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승우가 한 말은 아예 다른 것이었다.

“가이딩해 주실래요?”

어이없는 표정을 하자 이승우가 개구지게 웃는다. 이승우에게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웃음이었다.

그럼에도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잘 정돈된 인상을 지닌 미남의 소년기를 얼핏 엿본 듯한 느낌이었다.

가이딩을 해 달라는 말에 알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승우가 당연하다는 듯 그에게로 허리를 구푸린다.

이놈의 버릇을 초장부터 잘 들였어야 했는데.

그는 즉시 손을 들어 올려 이승우를 막았다. 그리고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가이딩할 때는 함부로 스킨십하지 마세요.”

“네.”

이승우는 아주 순순히,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가이딩을 해 주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고은교가 가이딩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습에서 고은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 그에게 가이딩을 해 주려 했을 때 이승우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굴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이드가 가이딩을 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니. 앞으로는 이승우와의 신뢰를 깨트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비지니스적으로나마 형성한 관계를 견고하게 유지하리라. 이승우는 그래도 되는 에스퍼였다. 사실, 가이딩을 받고 싶을 때 거절당해도 되는 에스퍼 같은 건 세상에 없었다.

동정심이 아니었다면 이승우와 이런 관계를 맺지도 않았겠지만, 결론적으로는 그의 손을 잡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고은교는 이승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승우는 고은교의 손을 잡는 대신 내민 손의 손목을 잡고 고은교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몸이 기울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니까 가이딩을 시작하지도 않은 바로 그 순간에 이승우가 고개를 틀어 고은교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고 문질렀다.

쪽, 쪽.

외설적인 소리가 난다. 미끄러지듯 그가 몇 번이고 키스를 감행했다. 고은교는 너무 당황해서 이승우가 하는 짓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승우의 입술에서 미약한 열기가 느껴졌다. 촉촉하고 말랑한 혀가 고은교의 입술과 그 틈을 정성들여 핥았다.

고은교는 끝까지 입을 열어 주지 않다가 이승우를 밀쳐 냈다. 그러자 이승우는 순순히 입술을 떼어 냈다.

그가 물었다.

“지금 뭐 합니까?”

“키스요.”

뭘 잘했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대답하는지 모르겠다. 고은교는 눈썹을 찌푸리며 이승우를 노려보았다.

“내가 방금 뭐라고 경고했지요?”

“가이딩할 때는 함부로 스킨십하지 마시라고.”

“그런데 지금 뭐 한 겁니까?”

이승우의 눈이 보기 좋게 접힌다.

“아직 가이딩 전이잖아요.”

어이없는 기분이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허, 하고 탄성을 뱉은 그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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