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54화 (54/132)

#54

에스퍼와 단둘이 미지의 게이트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정신이 긴장감으로 꽉 조여 있은 지 오래였다. 그나마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해 상황이 풀어지다 보니 별로 우습지 않은 말에도 웃음이 나왔다.

“읏…….”

고은교가 웃자 이승우는 그것을 승낙이라고 받아들였는지 다시 입술을 살짝 붙여왔다. 동시에 이승우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바뀐 것 같다는.

하긴, 누구라도 고은교라는 사람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성격이 바뀌었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이승우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승우라면 왠지 고은교가 사실 장이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더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하던 이야기를 뚝 끊어 버리고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을 테니까.

자신과 이승우와는 그 어떤 사이도 아니다. 서로 마음이 통한 적도 없고, 그들이 함께하게 된 경위는 단순히 이승우가 변덕을 부리며 이 관계 속에 뛰어들면서부터다. 그는 이승우가 어째서 마음을 바꾸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가이딩 때문에.

가이딩이 부족한 에스퍼가 자신의 가이드에게 느끼는 비이성적인 집착은 가이딩이 채워지면 사라질 것이므로 이건 정말이지 일시적인 변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고은교는 자신이 이승우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정말이지 이상했다.

관용인지, 연민인지 알 수 없는 이 감정. 마음이 물러지고 자신보다 한참이나 연하인 이 남자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다는 원인 불명의 욕구. 단순히 가이드로서의 미덕으로만 치부해 버리기에는 마음 한편이 설레었다.

그는 이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 건지 제대로 체감하고 있었으나…… 게이트 안에는 분명히 이러한 마력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기묘한 끈으로 엮어 버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금 연신 쏟아지는 입술을 받아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 잠깐.”

욕망에 따라 입술을 조금 벌리자마자 입 안으로 혀와 함께 모래가 들어왔다. 고은교가 인상을 찡그리며 이승우를 밀어내려 했으나, 이승우는 밀리는 대신 오히려 안으로 더욱 들어오려 했다.

“퉷, 잠깐…… 모래 먹는다고. 이승우!”

“네…….”

그의 대답은 거의 꿈결처럼 들렸다. 입술과 혀를 빨아 당기는 압력에 그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가이딩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승우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자신에게 매달리는 걸까.

마치 분유를 넣지도 않은 젖병을 쪽쪽 빠는 아기를 보는 느낌이었다. 조금은 안타깝고 조금은 괘씸했다. 그래, 게이트에 들어온 이후로 이승우는 꽤 많은 능력을 썼다.

안 그래도 가이딩이 부족한 상황에서 생존을 목적으로 능력을 꾸준히 썼는데, 마침 코앞에는 그와 파장이 잘 맞는 가이드가 있고, 지금 당장 가이딩을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졸릴 때 침대에 누워 있으면 당연히 자고 싶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고은교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가이딩을 했다. 그러자마자 이승우가 크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괜찮다는 듯 이승우의 물기 젖은 어깨를 살짝 짚었다.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어깨를 쓰다듬고 토닥였다. 지금은 정말이지 유사시의 상황이니 네가 원한다면 이렇게 가이딩해도 괜찮다는 진정한 의미의 허락이라는 것을, 그의 에스퍼가 깨달을 수 있도록.

그러자마자 물살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로 더 가까이 왔다. 코와 코가 맞부딪히면서 그들은 거의 부둥켜안았다. 가끔은 이가 부딪히기도 했다. 그럴수록 키스를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라 정신이 몽롱해졌다.

입맞춤은 더욱 깊어졌다. 혀가 입 안으로 깊숙이 유영하며 혀 밑의 물렁한 살을 애무하듯 훔쳤다. 굴러다니는 모래알들을 도저히 삼킬 수 없어 입술을 약간 떼자 이승우의 손가락이 그것들을 훔쳤다. 혀 위로 단단한 손가락이 느껴진다. 이승우가 그것을 호숫물에 버리자 그는 그것이 모래가 아니라 크리스털 알갱이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문제는 그들의 피부에 웬만하면 모래가 묻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승우의 손가락에도 그것들이 묻어 있었다.

고은교는 크리스털의 쓴맛에 신음했다.

“으…….”

물론 이승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교수님.”

보석을 물고 키스하는 날이 올 줄은 정녕 몰랐다. 그는 이승우가 자신을 끌어안은 채 목과 어깨, 팔과 다리 같은 살갗을 맞비비며 연신 한숨을 내쉬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은은한 조명 때문인지 이승우의 눈은 살짝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침 사이로 반짝이는 크리스털 알갱이들이 늘어지며 떨어져 내렸다. 고은교가 반짝이는 침을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걸 보며 이승우가 다시 입술을 물어왔다.

그는 이승우가 아주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빨면서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예민한 부위의 점막들이 비벼지면서 하는 가이딩은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키스를 하는 내내 발아래로 해파리가 간간이 그의 발가락을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이건…… 좀 위험한데…….’

너무 즐기게 되는 것 같다. 이런 곳에 앉아…… 키스 가이딩을 한다는 게, 이 행위 자체가 너무 기분이 좋았고…… 정말이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기분 좋은 게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냉철한 이성이 푸딩처럼 물러진다. 이대로 앉아 밤이 새도록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승우에게 어디까지 허락해 줘야 하나 생각했다.

단지 생각만 했는데도 이승우는 고은교의 의도를 알아들은 것처럼 굴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이승우의 손이 고은교의 무릎을 짚었다. 그것은 아주 부드럽게 무릎 연골을 어루만지다 그 위를 스치고 올라왔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느꼈다. 축축하게 젖은 손이 정성껏 씻은 목 뒷덜미를 감싸고 자신에게 한층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처음에 가이딩했을 때와 달리 아주 신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때 고은교에게 분명히 거절당했던 기억이 이 손에게 예의를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는 키스하다 말고 웃어 버렸다.

그때 입술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승우가 그의 귓불을 살짝 삼키면서 너무 짜다고 불평했다. 따뜻한 바람이 머리와 몸을 말리는 게 느껴진다. 동시에 포근하고,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승우가 그의 귓불을 깨문 탓이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서 섹스까지 하는 건 좀 아니지.

그는 가이딩을 하다 말고 능력을 쓰는 이승우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러게, 바닷물로 씻었을 때는 함부로 입 대지 말았어야지.”

“간된 것 같고 좋은데요.”

이승우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고은교는 그 말에 또 웃고 말았다. 자신이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은 아닌데, 지금은 이상하게 유난히 웃음이 나왔다.

“너 때문에 돌 하나는 먹은 것 같다.”

“…….”

“지금 이게 반성하는 얼굴이야?”

가까이에서 본 이승우의 얼굴은 조금 불그스름했다. 고은교는 그것이 이상해서 고개를 조금 기울여 이승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키스 때문에 숨이 막혀서 그런 건가? 아니, 에스퍼가 폐활량이 그 정도로 달릴 리가 없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는지 이승우가 시선을 내려 고은교의 눈을 피했다. 그는 황급히 자신이 아까 무슨 말로 이승우를 타박했는지 검열했다.

정말 자신에게 미안해서 이러는 건가?

“이승우 에스퍼?”

“아, 음……. 네.”

이승우가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렸다. 가리기만 한 게 아니라 고은교로부터 한 걸음 떨어졌다.

“왜 이래요? 어디 아픈 겁니까?”

고은교가 일어나자 호숫물이 출렁였다. 이승우는 작은 목소리로 아니라고 두 번이나 더 대답했지만, 끝까지 고은교의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

그들은 충분히 쉬었다고 판단했고, 더 늦기 전에 터닝 포인트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보스 방에서 싸울 시간을 충분히 고려했을 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득보다 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목이 몹시 말랐다.

안전한 곳에 호수가 있었지만 그건 민물이 아닌 바닷물이었고, 설사 민물이라 하더라도 정수되지 않은 물이었기 때문에 식수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몸을 바닷물로 씻어서인지 터닝 포인트를 떠날 때쯤엔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한층 더 간절해졌다.

그들은 탈수 증상이 심각해지기 전에 한시바삐 이 게이트를 탈출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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