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충분히 쉰 덕분인지 몸의 컨디션이 상당히 괜찮아졌음이 느껴졌다. 고은교는 이승우에게 안겨 걷는 대신 그와 가까이 붙어 걸었다. 보스 방에서는 이승우가 전력을 다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승우가 그를 안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따로 떨어져서 가는 편이 더 나았다.
보스 방에 들어가기 전에 호수에서 가이딩을 해 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사실 이승우는 고은교와 함께 보스 방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고은교가 터닝 포인트에서 남아 있다가 자신이 보스를 잡고 나면 그때 함께 탈출하기를 권했다. 보스 방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고은교는 이 말에 반대했다. 보스 방에서 큰 소리가 나면 분명히 남은 몬스터들에게 어그로가 끌린다. 물론 그들은 행여라도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게이트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소탕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놓쳤다면, 고은교는 그 몬스터를 터닝 포인트에서 상대해야만 한다. 터닝 포인트에는 몬스터가 없어 비교적 안전하다는 것이지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남은 몬스터가 있다면 이곳으로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아름다운 자수정 호수는 보스 방 바로 앞 통로나 다름없었으니 큰 소리가 나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 보스 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가이드는 일반인이므로 몬스터와 맨손으로 맞붙어 이길 수 없다. 아마 숨어 있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차라리 보스 방에 함께 들어가 보스 몹의 시선을 교란하며 이승우의 시야 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 고은교의 의견이었다. 그것이 통상적인 이능력자의 행동 지침이기도 했고.
게이트는 백번 조심해도 모자라는 곳이다. 결국 이승우는 고은교의 의견을 받아들여 함께 보스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동의했다.
마지막 방은 다른 방들보다 세 배쯤 컸다. 반짝이는 크리스털이 아니라 검은색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이었다.
“어둡네요…….”
이승우가 중얼거렸다. 고은교는 가볍게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보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옅은 유황 냄새를 맡았다.
심연처럼 어두운 곳에서부터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울음소리보다는 차라리 돌과 돌이 긁히는 소리에 가까웠다. 혹은 바람이 기묘한 모양의 돌 사이로 지나갈 때 나는 신음 같기도 했다. 아주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은 짐승이 내는 것 같기도, 혹은 악마가 뱉는 저주의 속삭임 같기도 한 소리였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 눈과 마주쳤다.
그것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주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의 보금자리를 침입한 그들을 발견하고, 급속도로 동공을 수축시켰다.
그건 파충류 같은 특성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 속에서부터 진동하는 듯한 코끼리 울음소리나 고래 울음소리 같은 기이한 소리로 울더니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등 뒤에서 푸른 수정이 빛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보스 몬스터가 어떤 형태를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굉장한 크기네.”
과장하지 않고 아까 본 거대한 호수만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 보스 몬스터의 크기를 쟀다.
보스 몬스터는 거대한 거북처럼 보였다. 아니, 저걸 거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몬스터가 등에 이고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에는 금방이라도 용암이 솟구칠 것 같은 분화구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실제로 그것이 네 발을 디디며 움직일 때마다 육안으로 보이는 뜨거운 수증기가 등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야말로 불거북의 형태였다.
“위험하겠는데요.”
이승우의 말대로 그것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보통은 몸집이 크면 그만큼 속도가 느려 오히려 공략 난이도가 낮아진다고 하지만, 이 녀석도 그렇게 만만한 녀석일지는 미지수였다. 고은교는 눈썹을 찌푸린 채로 불거북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승우가 고은교의 위치를 곁눈질로 확인했을 때였다.
불거북이 괴성을 지르더니 전조 없이 그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이승우는 아주 침착하게 고은교를 데리고 그 자리를 훌쩍 뛰어 벗어났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동굴 천장으로부터 종유석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동굴 입구 벽에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그 여파로 피부 위로 솜털이 올올이 섰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이승우가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고은교는 보스 몬스터가 예상한 대로 그렇게 빠르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에스퍼의 동체 시력으로만 잡아낼 수 있는 스피드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니까.
이승우는 불거북의 공격을 피하자마자 즉시 능력을 발휘했다.
제주도 게이트의 몬스터들을 괴멸시켰던 바람의 힘이 거대한 불거북을 덮쳤지만, 무게 때문인지 불거북은 바람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 골렘들처럼 갈기갈기 찢겨 나가지도 않았고 말이다.
강한 파괴력을 가진 무거운 몬스터와 바람 에스퍼라.
‘상성이 썩 좋지는 않군.’
그는 보스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게이트 벽 쪽으로 붙어 섰다. 기본적으로 이능력자의 진형은 에스퍼가 전방에, 가이드가 후방에 선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방이란 몬스터를 기준으로 더 가까운 쪽을 말한다.
특히 보스 몬스터의 경우, 단일 개체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 경우 에스퍼는 전방에서 가이드를 보호하며 게이트 공략을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에스퍼가 불안해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 사이에 거리가 있는 만큼 가이드는 보스 몬스터와도 더 멀어지고, 에스퍼가 능력을 마음껏 써도 가이드에게 영향이 거의 가지 않으므로 오히려 에스퍼의 움직임을 훨씬 원활하게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유사시에 가이딩하기에도 편리했다.
고은교가 보스 방 입구 쪽에 붙은 것을 확인한 이승우는 바람을 칼날처럼 만들어 절삭력을 높였다. 보스 몬스터는 골렘이 아닌 생명체처럼 보였기 때문에 몸이 반으로 갈라지면 죽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람의 칼을 휘두르자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동굴이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 일었다.
“……이런.”
이승우가 휘두른 결과물을 본 고은교가 탄식했다.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맞았음에도 보스 몬스터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그 뒤에도 몇 번이고 파괴력 강한 힘이 쏟아졌지만, 보스 몬스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먼지구름을 뚫으며 이승우에게 돌진했다.
아예 바람의 힘이 보스 몬스터에게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처음 이 게이트 문을 발견했을 때 게이트 문이 바람의 힘을 흡수한 것처럼 이 불거북은 바람을 그대로 흡수하는 성질의 표피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면 상성이 썩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악인데.’
이승우 역시 그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허공을 날아다니며 불거북의 시야를 교란하던 그가 이능력을 손에 두르고 새까만 주둥이로 돌진했다.
이승우가 날아오는 것을 본 불거북은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대로 이승우를 삼켜 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승우는 불거북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주먹으로 불거북의 턱을 후려갈겼다. 불거북은 조금 충격을 받았는지 머리를 살짝 흔들더니 이승우를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말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새까만 동공이 이승우에게 못 박혀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노려보았다’고 한 것이지.
불거북은 이승우의 바람 이능력을 흡수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승우의 주먹에 둘러진 이능력마저 흡수했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불거북을 때린 것은 온전한 이승우의 주먹이었다.
이건 좋지 않았다. 멀리에서도 이승우가 불거북에게 닿았던 손을 옷자락으로 감싸 쥔 것이 보였다.
척 보기에도 불거북의 표피 온도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듯했다.
그나마 희소식이라면 이능력이 아닌 물리적인 힘이 어느 정도 불거북에게 통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대로 꾸준히 물리적인 충격을 준다면 불거북을 공략할 수도 있겠으나 방금의 공격으로 이승우는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아마 손으로 불거북을 때려잡을 수는 없을 듯했다.
게다가 불거북은 물리적인 충격에도 보이는 만큼 아주 단단하게 방어력을 갖춘 것처럼 보였으니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보스 몬스터는 언제 머리를 흔들었냐는 양 다시 이승우에게 돌진했다.
이 싸움은 장기전이 되면 불리했다. 이승우를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승우가 무너지면 이 게이트는 실패였다. 실패라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떻게든 빠르게 불거북을 공략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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