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58화 (58/132)

#58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을 보호하듯 감싼 이승우를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그 짧은 순간에 이승우는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자신에게 달려와 고은교를 보호했다. 눈을 뜨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돌에 제대로 깔렸으면 몸의 어디든 박살 났을 것이다.

이승우는 고은교를 보호하느라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잊은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정신을 잃었을 리 없었다.

그는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고은교는 하얗게 질린 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이승우의 얼굴을 수없이 두드리며 정신없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일어나요, 이승우 에스퍼.”

하지만 그에게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덜컥 겁이 난 고은교가 이승우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하…….”

아주 옅은 숨이 느껴졌다. 이승우는 죽지 않았다. 그래, 살아 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는 애써 냉정하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둘 중 누구도 죽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를 잡았으니 게이트 역시 성공적으로 클리어했다. 이승우가 죽지 않은 것을 확인했고, 또 이승우가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짜내어 자신을 보호한 것을 확인했으니 그를 깨워서 밖으로 나가자. 그러면 된다. 그러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승우…… 승우야. 제발 눈 좀 떠봐.”

하지만 이승우는 아무리 몸을 흔들고 뺨을 때려도 눈을 뜨지 않았다. 설마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걸까?

이승우를 깨우기 위해 그를 부르던 고은교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홱 치켜들어 임시 탈출 포탈이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탈출 포탈이 사라졌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임시 탈출 포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탈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임시 탈출 포탈이 남아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삼십 분.

최악은 면했지만, 지금 상황 역시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고은교는 일단 어떻게든 기절한 이승우를 데리고 게이트를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우선 자신의 몸부터 챙겨야 했다.

그는 스스로의 몸을 돌 더미에서 빼내느라 고군분투했다. 종유석에 들이받은 어깨가 빠질 듯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마침내 돌 더미에서 몸을 빼낸 고은교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오른쪽 발목에서 어마어마한 통증을 느끼고 그대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다리가…… 제대로 접질린 것 같다. 부러진 것은 아닌 것 같고. 최소한 덜렁거리지는 않으니까.

“젠장…….”

그래도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퉁퉁 부어오른 오른쪽 다리를 확인한 고은교가 입술을 사려 물었다.

여기에서 힘을 더 쓰면 다리가 부러지든, 혹은 영영 다리를 못 쓸 것 같지만……. 그게 어느 쪽이든 목숨보다는 덜 귀중할 터였다.

그는 손이 까져 부르트든, 피가 나든 말든 이승우 위에 떨어져 있는 돌을 허겁지겁 치웠다. 그리고 돌을 반쯤 치웠을 때,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이승우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의 팔을 잡고 당겼다. 하지만 이승우는 마치 좁은 틈에 꽉 끼인 듯 몸이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 낑낑대며 이승우의 팔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하지만 여전히 이승우의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고민 끝에 고은교는 이승우의 남은 몸을 뒤덮고 있는 돌들을 밀어내기 위해 용썼다. 그러나 돌은 치워지지 않았다.

“이게 뭐…….”

망할.

거대한 종유석이 이승우의 두 다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거대한 종유석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그의 힘으로는 이승우를 빼낼 수 없었다.

“승우 군, 제발 눈 좀 떠봐요. 승우 군.”

그러나 애타게 불러도 이승우에게 나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때, 고은교는 탈출 포탈로부터 쏟아져 나오던 빛이 천천히 흐려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다. 그들이 기절해 있을 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린 것이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탈출 포탈은 이대로 사라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죽여 없앴던 몬스터들은 보스 몹을 제외하고 리젠 되어 이 안을 배회하게 될 터였다.

게이트를 정복한 첫 번째 탐사대에게 주어지는 베네핏은 이 순간 이득이 아니라 그들의 목을 죄는 올가미였다.

고은교는 지금 이승우를 버리고 나가면 자신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삼 일이 지나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포탈이 생성되어 그는 구조대와 함께 이승우를 구하러 들어올 수 있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이승우가…… 살아 있을까?

종유석 무더기에 묻힌 채, 이토록 얌전히 기절해 있는 이승우가?

고은교는 몇 번이나 임시 탈출 포탈과 이승우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치열하게 갈등했다. 자신이 이곳에 남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생각해 보자.

이승우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은교를 싫어하는 것에 가깝다. 가이딩이 아니었다면 고은교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고은교를 향한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무례하게 고은교의 면전에 대고 가이딩 기계 취급을 하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일부러 고은교에게 쏟아지던 악의를 방관했던 남자를 잊지 못한다. 심지어 이승우는 학기 마지막 날, 그의 발목을 쥔 채 이걸 다시 부러뜨려야 얌전히 있을 거냐고 손수 협박하기까지 했다. 애초에 고은교는 이승우와 어떤 긴밀한 관계도 맺을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 이승우와 갈라지게 될 테니, 그전까지 상급 에스퍼인 그를 잘 이용해 먹어야겠다 생각했을 뿐.

하지만…….

고은교는 동시에 자신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던 입술을 기억한다. 차영헌을 막고, 고은교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집착적으로 보호하려 하다 기어이 제주도 게이트까지 따라오고야 만 이승우를 기억한다. 교수님은 느끼지 못 했냐고, 자기만 우리의 운명을 느낀 거냐고 묻던 이승우를. 고은교는 그런 이승우에게 연민을 느꼈다.

고은교를 구해 주겠다고 말하던 결연한 얼굴. 떠나기 전 뒤를 돌아보면서 했던 마지막 한 마디.

먼저 저를 구해 주신 건 교수님이에요.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하.”

거짓말처럼 다급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고은교는 영영 눈 뜨지 않는 연인을 바라보는 신의 심정으로 이승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늘 후회의 연속이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란 건 그냥 후회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지 정말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란 건 없는 것이었다.

고은교는 천천히 이승우의 옆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돌바닥이 통증으로 뜨거워진 발목을 식힌다. 그는 손바닥으로 피곤한 눈과 볼을 연신 비볐다. 그리고 임시 포탈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정말로 나가지 않을 거냐고 묻는 듯 임시 포탈은 세 번 반짝이며 푸른빛을 냈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졌다.

*

이건 미친 짓이다. 고은교는 이승우의 곁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일단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비란 대비는 모두 다 했다. 이승우를 몬스터들에게 숨기기 위해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손이 닿는 대로 종유석을 주워 왔다. 그리고 기껏 치워 낸 돌들을 다시 쌓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두 사람 주변으로 조그만 방공호를 만들었다.

그는 가이드이기 때문에 결코 몬스터와 싸울 수 없었다.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죽게 되는 것은 무조건 그일 것이다. 멀쩡하지도 않은 몸으로 싸움 비슷한 것이라도 했다간 그는 얼마 못 가 죽게 될 것이다.

게다가 리젠 되는 몬스터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이론적으로 이 몬스터들은 사흘 동안 죽여도 죽여도 계속 같은 자리에서 생겨났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흘 동안이나 이 게이트에 숨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보스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면서 동굴이 반쯤 무너졌고, 덕분에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생긴 것이 천운이었다. (물론 동굴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사히 탈출했을 테지만.)

만약 고은교가 게이트에 남아 몬스터를 잡는 강행 일정을 겪어 봤다면 좀 더 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은교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그는 최대한 자신이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몬스터들로부터 몸을 숨겼다. 다만 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 몬스터들에게 통하는지 알 수 없어 몹시 불안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말 이런 것뿐이었다. 이승우와 함께 이곳에서 가만히 숨어 있는 것 말이다.

자신에게도 첫 탐사대가 누리곤 했던 베네핏을 겪은 적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그들은 훨씬 더 안전하게 숨어 있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며칠 동안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를 잡으며 경험치를 올리기에는 너무 많은 병을 앓고 있었다. 의사가 정해 주는 날짜 안으로 병원을 가지 않으면 몸 상태가 극적으로 나빠지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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