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목이 마르다.
“물…….”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주변을 더듬었다. 입술에 미지근한 무언가가 닿는다. 물. 물이다. 본능적으로 입술을 벌리자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액체가 입 안을 적셨다. 수분은 순식간에 입과 목을 적시며 안으로 들어온다.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다.
한 방울이라도 더 마시고 싶어서 물컵을 더듬어 잡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뭐라고 속삭였다.
‘안……. 급하게 마시면…….’
목소리는 희미하게 멀어진다. 동시에 물도 사라졌다. 물, 제발…… 물 좀 줘. 헐떡이는 입술 사이로 젖은 천이 물렸다. 그는 정신없이 천을 빨았다. 이 정도로는 도저히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비정하게도 손가락이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천을 가져간다.
‘탈수……. 기억 때문에…….’
손가락은 축축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에 묻은 물기를 핥았다. 그러자 옅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건 비밀로 해 드릴게요.’
무엇을, 왜? 드문드문 들리는 목소리는 구름 잔뜩 낀 날씨처럼 흐리다. 분명히 가까운 곳에서 들렸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꿈결처럼 멀어진다.
정신이 다시 가라앉는다. 어둠 속으로.
고은교가 발작이라도 하듯 깨어났을 때는 이미 환한 대낮이었다. 그는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다 이곳이 게이트 밖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이 천국이 아니라면, 자신은 리젠 되는 몬스터들을 피해 이 몸과 이승우를 지켜 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그래, 이승우.
이승우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 바쳐 지켜 낸 보람도 없이 어디인가 안 좋으면 어쩌지 싶은 생각도 잠깐, 그는 에스퍼이니 적어도 나보다는 괜찮으리라는 심술궂은 생각이 머리를 쳐든다.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붕대에 둘둘 감긴 오른쪽 다리가 눈에 띈다. 잘못하면 이 다리를 다시는 못 쓰는 것 아닌가 게이트 안에서 겁먹었던 것이 떠올랐다.
‘부러진…… 건가?’
고민 끝에 왼쪽으로 비스듬히 서서 일어나 보았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 힘주어 걸음을 내디뎠다. 다행히 바닥에 쓰러져 뒹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좀 욱신대기는 하지만 멀쩡하게 기능한다.
그러는 순간 누군가 병실 문을 열면서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당연하지만, 이승우였다. 그의 눈이 빠르게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네, 기자들 물려 주시고…… 잠깐만요.”
괜찮나 보네.
“일어나셨어요? 교수님.”
그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이승우를 조금 뿌듯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손수 지켜 낸 자신의 에스퍼였다. 그사이 머리가 조금 자란 건지, 이승우의 머리카락은 귀를 살짝 덮고 있었다.
이승우는 조금 멋쩍은 얼굴이었다. 그를 이해한다. 대부분은 에스퍼가 가이드를 지키니까 이 역전된 상황이 머쓱하게 느껴진다는 것쯤이야. 하지만 이승우는 수많은 게이트를 클리어하다 보면 이런 예외적인 상황 역시 생긴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날짜가 어떻게 됩니까?”
“5일이요. 삼 일 내내 기절해 있으셨어요. 어디 아픈 곳은 없으세요?”
“괜찮습니다.”
몸이 찌뿌둥하기는 하지만 그건 삼 일 내내 잤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히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이승우가 다가왔다.
그가 손을 내민다. 잡고 지탱하라는 듯.
못 걸을 정도는 아닌데 왜 굳이……라는 생각도 잠깐, 고은교는 순순히 이승우의 팔을 붙잡았다.
“내 몸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는지 이승우의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타박상이 약간.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요. 오히려 탈수 증상 때문에 위험했다고 했습니다. 교수님이 걱정하신 대로요.”
“오른쪽 다리는?”
“금이 갔는데…….”
다리에 금이 갔다고? 하지만 그는 분명 정상적으로 일어나서 걸을 수 있는 것을 확인했다. 조금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그 모든 일을 겪고 난 다음 ‘욱신거린다’ 정도로 끝날 부상이라면 대단한 행운이라고 할 만했다. 이상하다는 듯 오른쪽 다리를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센터에서 치료 팀이 와 감쪽같이 붙여 놨다고 했습니다. 치료 에스퍼는 외과의보다 낫다고 들었는데 과연 사실이군요.”
병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와 이승우의 말을 대신해 주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병실 안으로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심 비서님?”
“예.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심 비서는 그를 위해 제주도에 호텔을 예약해 주고, 배낭까지 가져와 준 고은서의 비서였다. 육지로 간 줄 알았는데 제주도까지 와서 병문안을 해 주다니, 아무리 상사의 지시 때문이라 한들 감동적이었다.
이 묘한 감동을 깨트린 것은 이승우였다.
“교수님이 깨어나신 걸 봤으니 돌아가셔야죠.”
이 태도는 조금…… 딱딱하지 않나? 물론 이승우는 처음부터 심 비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연히 호텔 객실 앞에서 심 비서에게 누구냐고 낮게 윽박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저는 도련님을 모셔 가려고 왔습니다만.”
하지만 심 비서 역시 만만찮은 상대는 아니었다.
“그쪽보다는 제가 낫지 않을까요?”
“아니오. 제가 나을 겁니다. 그 변변찮은 게이트에서 도련님 하나 똑바로 보필하지 못한 이능력자보다는 제가 낫겠죠.”
“뭐라고 했습니까?”
……만만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서로를 잡아먹을 기세다. 분위기가 왜 이래? 그는 당황한 얼굴로 중재에 나섰다.
“그, 두 사람…… 내가 잠든 사이에 친해졌나 봅니다.”
“친해지기는요.”
이승우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척 보기에도 친하다기보다는 원수지간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애써 이승우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대신 심 비서에게 게이트 후처리에 대해서 물었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었다.
“제주도 게이트 시료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 센터와 자사에서 협의하여 운반 중입니다. 제주도 게이트를 무사히 클리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고 전무이사님께서도 도련님의 업적에 상당히 놀라셨습니다.”
“…….”
이걸 ‘업적’이라고까지 표현해야 하는 걸까.
그는 이승우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사실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게 ‘업적’이라면, 그것을 해내는 것은 가이드가 아니라 에스퍼가 들어야 하는 찬사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승우가 게이트 안의 몬스터를 다 죽였지, 혼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면 몬스터는커녕 게이트 클리어는 생각지도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승우는 언짢은 기색 같은 건 조금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닐 텐데……. 그는 아직도 이승우가 불거북의 아가리에 처넣던 종유석을 기억했다. 껄끄러운 기분에 이승우의 팔을 놓고 엉거주춤 서려는데, 이번에는 이승우가 그의 팔을 붙잡아왔다.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않으셨어요.”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손이 허리 부근을 받쳤다. 이렇게까지 친밀한 스킨십이라니. 그는 당황했지만, 놀랍게도 이승우의 손길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그랬다. 그들은…… 게이트 안에서 너무 친밀해졌고 익숙해졌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이승우의 팔에 몸을 조금 기댔다. 그는 오랫동안 이 팔에 몸을 의지한 채 지냈었다.
“고 전무이사님께서 도련님을 직접 보기를 원하십니다.”
“예?”
그 소리에는 정말이지 깜짝 놀라 척추를 곧추세웠다. 옆에서 이승우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시면 지금이나 오늘 오후 중으로 환복하신 뒤 자사를 방문하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차와 경호원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지금 당장? 고은서와?
그녀가 굉장한 이력을 가진 커리어우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고은교의 혈육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전화상으로만 보던 존재를 직접 맞대면하려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존재다.
고은서와 대면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아직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는 고민 끝에 말을 짜냈다.
“아, 하지만 지금은 제주도고……. 우선 서울에 도착해서 스케줄을 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기는 서울입니다,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제가 기절해 있는 사이에 서울까지 운송해 주신 겁니까?”
“아니요. 삼 일 전에 제주도에서 날아오신 것으로 압니다.”
“예?”
“날아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저분의 손에 들리신 채.”
이승우에게 차가운 눈길을 던지며 심 비서가 말했다.
‘……날아와?’
멍한 얼굴로 심 비서를 쳐다보던 그가 이승우를 돌아봤다.
이승우는 별다른 말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심 비서는 그 위험한 비행이 얼마나 이 몸에 악영향을 끼쳤는지 떠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서울에 도착한 직후 센터에서 나온 치료 팀이 그의 몸을 치료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 환복하고…….”
“예.”
심 비서가 쇼핑백을 건넸다. 살짝 열어보니, 개켜진 정장이 있었다. 이걸로 갈아입고 나오라는 거다. 심 비서는 그에게 공손히 목례한 뒤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정신을 잃고 난 뒤, 이승우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를 서울까지 운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유가 있었겠거니 싶었다.
“고마워요, 승우 군. 게이트를 클리어한 직후라 승우 군도 몸이 좋지 않았을 텐데.”
“아닙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자 이승우가 대꾸해 왔다. 그는 이승우가 게이트에 대해서 무언가 더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승우가 꺼낸 건 아예 다른 말이었다.
“고 전무이사님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꽤 냉정하신 분이네요. 이제 막 깨어나신 분을 상대로 오라 가라 하다니.”
“……내 몸 상태가 그렇게 안 좋습니까?”
사람도 못 만날 만큼?
그렇게 크게 컨디션이 나쁜 건 모르겠는데.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제 몸을 내려다보자, 이승우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괜찮으시죠.”
그는 어이없는 눈으로 이승우를 바라보았다. 하긴, 몸 상태가 나빴다면 심 비서가 외출을 권했을 것 같지 않았다.
“승우 군은 사람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군요.”
“…….”
“나는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 준 것은 고맙습니다.”
이승우는 약간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어쨌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자기가 과보호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군.
그리고 이승우가 병실에서 나가기를 기다렸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승우는 나가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는데요.”
“네.”
이승우는 당연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러고는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뒤돌아서 있을까요?”
“…….”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트를 함께 클리어 하고 나왔어도 이승우는 이승우였다.
“당장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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