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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콜 가이드-62화 (62/132)

#62

이승우는 몇 번이나 동행해 주겠다고 말했다. 사실 ‘동행해 주겠다’는 제안보다 그렇게 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웠지만, 정말로 이승우를 데리고 고은서에게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 전무이사를 만나는 자리에, 고은서를 볼 생각에 가뜩이나 긴장되는데 누군가를 데리고 가는 건 말도 안 됐다. 이건 친구를 만나러 가는 자리가 아니었고, 만일 고은서가 이 남자에 대하여 묻는다면 민망해질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보호해 주려는 이승우가 기특했지만, 지금은 그를 떼어 놓고 가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이건 내 일입니다.”

그 단호함 앞에서 이승우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바로 차선책을 내놓았다.

“그러면 사옥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것까지 거절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우는 약간 우울한 기색이 깃든 얼굴로 다가와 고은교의 정장 타이를 펴 주었다.

“같이 타고 가겠습니까?”

자신의 차는 아니지만, 동승해도 충분할 정도로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승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멀리서 따라갈게요.”

심 비서는 이승우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차는 아주 부드럽게 출발했다.

짙은 썬팅이 된 벤츠는 고은서가 손수 내준 것이었다. 일반적인 차량이지만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없는 상황이니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양해를 부탁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눈에 띌 리가 있습니까.”

그는 조금 웃고 말았다. 예전에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고은교는 상당히 편애받는 혈육이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손수 클리어 하신 제주도 게이트……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제주도 게이트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갑자기 심 비서가 손수건을 입가에 대며 심호흡을 하기에 깜짝 놀랐다. 멀미? 아니면 천식이라도 있는 건가? 그를 돕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심 비서가 그를 만류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너무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게 생각나서 그만…….”

“아, 그러긴 했죠.”

몰랐는데 심 비서는 꽤 다정하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불거북에게서, 그리고 수많은 골렘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꽤 애써야만 했다. 다시 생각해도, 지금 와서 그것을 ‘꽤 애썼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굉장한 행운이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떠들어댔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생긴 게이트가 얼마나 위험한 게이트인데 고작 두 명의 이능력자가 들어갔냐는 둥, 감히 도련님이 깰 수 없을 게이트라는 둥……. 전문가는커녕 전문가의 ‘ㅈ’도 아닌 사람들이 거의 일주일 동안 아주 시끄럽게 굴었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주일이었지요.”

“…….”

방금 심 비서가 좆같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착각이겠지.

“당연하지만, 도련님께서는 훌륭히 업적을 완수해 내셨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당분간 조금 귀찮아지게 되셨다는 걸 알고 계셔야 합니다. 여기, 새로운 휴대폰입니다, 도련님.”

“아…….”

내 원래 휴대폰은 어디 있지? 의아한 얼굴로 새 휴대 전화를 받아 들자 심 비서가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 덧붙였다.

“도련님의 원래 휴대폰은 지금 제주도 호텔에 있습니다만, 급작스럽게 서울로 오게 되셔서 당장 쓰실 휴대폰이 없으실 겁니다. 당분간 이걸 사용하시면 이번 주말 안으로 본래 도련님의 휴대폰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 그걸 물어보려고 했다.

“이승우 에스퍼는 왜 나를 서울까지 데리고 온 겁니까? 제주도에도 병원은 있을 텐데요.”

“그건…….”

심 비서가 한 번 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아까처럼 손수건으로 제 입을 가리지는 않았다. 그는 다소 경직된 태도로 설명했다.

“의사가 즉시 치료 계열 이능력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다리를 영영 못 쓰게 될 수도 있다고 진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승우 에스퍼는 그 길로 도련님을 안아 들고 서울까지 와 부상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지못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승우 에스퍼가 유일하게 잘한 일이었죠.”

라고.

많이 생략되어 있었으나 의사가 그의 오른쪽 다리에 대고 사망 판정을 내렸던 정황은 확실해 보였다. 확실히 게이트 안에서 고은교는 살기 위해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며 이대로는 이 다리를 못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심 비서의 말은 틀렸다. 이승우 에스퍼가 잘한 일은 그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승우 군에게 감사 인사를 한 번 더 해야겠네요.”

“…….”

분명히 말해 두지만, 게이트에서 막 나온 에스퍼가 능력을 가중하여 쓰는 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다. 게다가 이승우는 기절했다가 깨어났기에 기력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자기 가이드를 위해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날아온 것 자체는 꽤 희생적인 것이라 할 만했다.

물론 심 비서는 고은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래 시간이 지나지 않아 벤츠가 어느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고은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봐도 이승우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온다고 했으니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전무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리 정문 근처까지 마중 나와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갔다. 심 비서가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오래간만이구나.”

전화상으로 들었던 목소리를 실제 귀로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고은교는 약간 긴장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마주 보았다.

고은서에 대한 데이터는 아예 없다.

그가 고은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고은교에게 먼저 전화하여 왜 그따위로 살고 있느냐고 충고하고, 집안과 연을 끊겠노라 말하는 역할이라는 것(이것도 고은서가 고은교에게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고은교가 어떤 일을 잘 완수했을 때 그것을 칭찬하며 상을 주는 역할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혈육이라는 것까지.

하지만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고은서는 고은교와 거의 닮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일단 그는 인사했다. 그리고 명랑한 생기가 도는 고은서의 뺨과 입술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조금 우울한 인상인 고은교와는 체질적으로 다른 것 같은데.

그녀는 우울과는 거리가 먼 사람 같았다. 타고나길 지배자인 에스퍼들과 비슷해 보인다. 어쩌면 진짜 고은서는 에스퍼일지도 몰랐다.

“제주도 게이트를 단독으로 클리어할 줄은 몰랐어.”

“…….”

“앉아라.”

고은서의 목소리는 까랑까랑했고 많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권하는 대로 그 앞에 앉았다.

“단독이 아니라…… 제 에스퍼랑 같이 들어갔습니다.”

그녀의 말속에 있는 오류를 조심스럽게 지적하자, 고은서가 눈썹을 들어 올린다.

“그래?”

“네. 에스퍼 없이는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없으니까요.”

그건 당연한 말이다. 가이드는 자신의 에스퍼를 잊지 말아야 한다. 에스퍼 역시 자신의 가이드를 잊지 않아야 하고.

그는 항상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고은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런 건 지적해 두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재미있구나. 한국대에서 했던 강의가 너한테 꽤 깊은 감명을 주었나 보지? 아주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말했다. 웃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말과 달리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은교.”

“네.”

“언론은 우리 회사가 제주도 게이트를 손에 넣었다고 말하고 있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건 네가 한 일이지.”

“……하지만 회사는.”

“너를 포함하고 있지. 그 에스퍼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는 너에게 속해 있어. 그러니 이 일은 네가 단독으로 한 거야.”

“…….”

“잘됐구나. 괜찮은 녀석을 손에 넣게 되다니 말이야. 우시현도 쓸 만한 녀석이었지만, 이승우에 댈 건 아니지. 그 녀석은 제 가업을 물려받을 거고 그걸 다 너에게 바칠 거다. 그렇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기는. 나는 너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으라고 말이야.”

살 방법? 그건 아주 먼 과거에 고은서가 고은교에게 했던 말인 듯했다. 그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가만히 그 말을 되새김질하고 있는데, 고은서의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가 비쳤다.

“네가 갖고 있는 회사 지분이 얼마지?”

당연하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회사 지분을 고은교가 갖고 있는 줄도 몰랐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은서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그렇게 유의미한 수치는 아니지. 너도 알다시피 네가 회사 경영에 참여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건 네가 어려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탓이지, 아버지가 우리를 편애했기 때문은 아니야.”

“…….”

“너는 귀찮다고 유학조차 가지 않았던 애였으니까.”

뜻밖의 정보였다. 그는 눈을 내리 깐 채로 고은서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네가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서, 너만의 전선을 만들 생각이 들었다면…….”

“…….”

“나는 너를 도와줄 생각이다.”

“감사합…….”

“못 만든다면, 그때야말로 너를 내칠 거라는 의미야.”

그건 고은서가 단순히 고은교를 배려해 주기 위해, 혹은 그를 편애하여서 제주도 게이트를 준비해 주었다는 말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다정하다기보다는 살벌한 어조였다.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

“이건 마지막 기회야. 잘할 수 있겠지?”

그는 말없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냉혹하게 자신의 혈육을 바라보는 고은서의 얼굴. 비정해야만 소유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으나 완전히 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던 로마의 황제들이 저런 얼굴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네.”

그가 자로 잰 듯 딱 깔끔하게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고은서의 눈썹이 확 찌푸려졌다.

“감사합니다.”

그의 감사 인사는 고은서가 예상한 대답이 아닌 듯했다. 사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은교에게 도와주겠다고 말한 사람은 고은서가 처음이었다. 게이트를 따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많은 도움을 필요로 했다. 고은서는 한 기업의 전무이사였으므로 고은서가 자신을 도와준다면 다수의 이해관계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움의 이유가 동정이든, 아니면 혈연의 정 때문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고은서의 도움이 쓸모 있다고 판단했다. 훗날 고은서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해 그녀에게서 버려진다고 한들, 그때쯤에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테니 지금 그녀가 도와준다고 할 때 받아 두자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고은서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이상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고은서의 얼굴.

“너…….”

한참을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고은서가 고은교를 쳐다보며 뭔가 말을 하려 했을 때였다.

“전무이사님.”

정문에서 봤던 검은 정장의 여자 에스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은서가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지?”

“그…… 고은교 도련님의 에스퍼라는 분이 건물 안으로 침입하려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곳은 출입 제한이 걸린 건물이었다. 허락받지 못한 에스퍼는 들어올 수 없었다. 사실, 에스퍼를 가드로 고용할 수 있는 회사라면 대부분이 그랬다.

사옥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더니…….

이승우는 막무가내로 나오는 녀석이 아닌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인내심이 짧아진 거지?

“아주 충직하구나. 네 에스퍼라면 너를 제주도 게이트에서 데리고 나온 그 에스퍼지?”

“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창피함으로 인해 약간 얼굴이 붉어진 고은교를 보고 고은서는 너그러워진 어투로 말했다.

“가 봐라.”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일어나서 전무이사실에서 막 빠져나올 때였다. 닫히는 문 사이로 고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요즈음 너무 과로한 것 같다는 뒷말이 이어졌다. 거기까지 들은 그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까 고은서는 자신을 향해 ‘너, 누구냐?’라고 물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의적절하게 이승우가 끼어들어 주었고, 그는 고은서의 의심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우가 알고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잘한 일이 하나 더 늘었잖아.’

그는 웃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가볍게 복도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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