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그러면…… 고은교 가이드는 임시 딱지를 떼자마자 팀장인 건가요?”
“아, 네. 부족하지만 그렇게 됐습니다.”
그는 너무 어리숙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이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 왜 자신에게 자꾸 관심을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랬다.
‘제주도 게이트’ 사건은 상당히 파란만장한 이슈를 몰고 왔다. 제주도에 발생한 게이트는 A급, 보스 방을 포함한 열아홉 개의 방을 가진 큰 규모의 게이트였다. 결코 이능력자 둘이서 독파할 수 없는 게이트였다는 의미였다.
만약 이승우가 S급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에스퍼의 상성이 그 게이트와 잘 맞지 않았다면(물론 보스 몬스터와의 상성은 끔찍했지만 대부분의 몬스터와는 상성이 좋았으므로), 하다못해 고은교가 기지를 발휘하여 이승우를 지켜 내지 못했더라면 클리어가 불가능했을 게이트였다.
그들의 게이트 클리어 과정이 언론에 공개되고, 고은교가 자신의 에스퍼를 구하기 위해 임시 탈출 포탈을 포기하고 그를 구한 것이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고은교는 단숨에 능력 있는 가이드로 급부상했다. 그 덕인지 고은교는 이승우와 한 팀을 이루어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는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팀장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고은서의 입김이 있었을 거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협업하면서 게이트를 클리어해 본 적은 있어요?”
오 팀장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직은 없습니다.”
“혹시 그럴 기회가 생기면 해 볼 의향은 있고?”
“아, 네. 게이트에 관심이 많아서 열심히 해 보고 싶습니다.”
“흠. 그래요?”
오 팀장의 특징 중 하나는 눈에 띈 사람이 생기면 그이를 시험해 보고자 하는 악취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시험에 통과한다면 제법 싹이 있는 녀석으로 기억 속에 남는다. 통과하지 못하면 그냥 얼간이 중 하나가 될 뿐이지만.
그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려고 왔다.
“내가 맡기로 한 A급 게이트가 있는데……. 혹시 들어봤나 모르겠네. 드라이밸리 게이트라고.”
“남극형 게이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알고 있다면 말이 빠르겠어요. 그래, 남극형 게이트야. 겉보기에는 휑하지만 그 안에 막대한 석유가 묻혀 있을 거라고 추정되죠. 클리어하고 나면 분명 떨어지는 보상이 아주 쏠쏠할걸.”
“그렇군요.”
“솔직히 말해서 좀 까다로운 부분이 있기는 해. 극지에 사는 놈들답게 꽤 독한 몬스터들이 많거든.”
그녀의 말이 옳았다. 드라이밸리 게이트는 붙여진 이름답게 남극의 차가운 사막이 배경인 게이트였다. 특별히 위험한 지형지물은 없지만, 몹시 낮은 기온과 건조한 공기가 이 게이트의 특징이었다. 또한 게이트의 몬스터들이 하나같이 파괴력이 높고, 위험한 놈들이라 강력한 원소 계열 에스퍼나 상급 에스퍼들 위주로 팀을 꾸려 들어간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거기에 못 들어가게 됐어요. 당연히 저기, 내가 데리고 있는 김승주, 그러니까 화염 계열 에스퍼 녀석이 하나 있는데 걔도 빠지게 됐거든.”
“아…….”
“안전하게 게이트를 클리어하려면 예상 전력보다 훨씬 웃도는 애들이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 응? 어때요. 이승우 에스퍼가 이번에 한 번 실력 발휘를 해 보는 건.”
기다렸던 말이다. 아마 오 팀장은 우연히 이승우를 보고 빠진 전력을 좀 메꿔 줄 생각으로 제안한 말이겠지만, 겸사겸사 고은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간파해 볼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이승우가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면 임시 딱지를 달고 있던 가이드 혼자 게이트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이었으므로.
자신이었어도 궁금했을 것 같다. 오 팀장의 호기심 가득한 의도 역시 이해가 된다. 햇병아리 가이드 안에 들어있는 게 구를 대로 구른 상급 가이드라는 걸 모른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협업한다는 건 서로를 지켜보는 눈들이 생긴다는 뜻이고, 유명 인사인 고은교의 진짜 실력이 어떤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은 얼떨떨한 모습을 연기하며 갑자기 주어진 호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가 오 팀장의 제안을 막 수락하려던 순간이었다.
“곤란합니다. 제가 그쪽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 서툴러서.”
차분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아, 그래요?”
아쉽다는 듯 오 팀장이 혀를 찼다.
“네. 그럼.”
이승우가 까딱 인사하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이 새끼가……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는 벙찐 채로 그들 사이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아니, 이렇게 지켜볼 때가 아니었다.
“아니, 잠깐…… 잠깐만요.”
하지만 오 팀장은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좋은 기회일 텐데. 뭐…… 당사자가 그렇다는데야 별수 없지. 그렇죠, 고 팀장?”
고은교를 시험해 볼 심산은 있었으나, 그녀가 본래 원한 인력은 고은교가 아닌 이승우였다. 이승우의 의사가 가장 중요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오 팀장이 멀어져 간다. 고은교의 흔들리는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설상가상으로 5시라, 이만 퇴근하겠다고 센터 직원이 그들을 내쫓았다.
‘이런 미친.’
이승우의 눈치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을 이런 식으로 퇴짜를 놔버리다니…… 게이트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이승우는 최근, 제주도 게이트에서 죽을 뻔했다.
이해한다. 이해는 하는데…….
그가 홱 이승우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네?”
“방금 이승우 에스퍼가 차 버린 게이트가 뭔지는 알아요?”
“…….”
전혀 모르겠다는 말간 얼굴이다. 너무 열받은 나머지 고은교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조절해야만 했다. 파트너 에스퍼는 무슨. 처음부터 이승우 같은 건 믿지 말고 적당히 다른 에스퍼를 찾았어야 했는데. 바짝 약이 오른 뇌가 마구 헤집어지는 듯하다.
“하. 이승우 에스퍼랑은 같이 일 못 하겠어요.”
그는 아주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훑은 다음, 빠르게 걸어가며 센터 건물을 빠져나왔다. 오 팀장은 두 번 기회를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뒤를 따라온 이승우가 그를 붙잡았다.
“왜 이러세요.”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그가 냉소적인 어투로 내뱉었다.
“내가 계속 같이 게이트를 클리어하자고 했죠. 거기에 동의한 건 이승우 에스퍼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안 하겠다니? 그런 건 일찍 말했어야죠. 이 자리에서 퇴짜 놓고 남의 일을 망쳐놓을 게 아니라. 그러면 내가 진작 다른 에스퍼랑 여기 왔을 것 아닙니까?”
“오 팀장님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으셨어요?”
“그러면 내가 진짜 출입증을 반납하러 여기까지 온 것 같나요?”
“…….”
“눈치 빠른 사람이 왜 이래요. 모르는 척은 관둡시다. 그래, 그 게이트가 가기 싫었어요? 그러면 나한테 미리 가기 싫은 게이트가 있다고 말했어야지.”
“그건 아닙니다.”
“아니면 왜 그런 건데?”
이승우가 곤란한 듯 눈썹을 휘었다.
‘하, 그래. 나한테는 말 못 하겠다, 이거지?’
빌어먹을, 언제까지 그가 고은교라는 이유로 불신할 거냐. 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색안경 끼고 봐도 이승우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이러면 그들과 이승우가 다를 게 없다.
이런 건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
불리할 때만 입을 딱 다무는 시건방진 에스퍼를 노려보던 고은교가 그대로 몸을 돌려 정문까지 뚜벅뚜벅 걸었다. 거의 눈썹이 휘날리도록 빠른 걸음이었다.
“교수님.”
센터 정문에서 이승우가 그를 한 번 더 붙잡았다.
“됐습니다. 그만하면 됐고, 그냥 이승우 에스퍼가 원하는 가이드 찾아가세요.”
그 말에 이승우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는다.
“파장 안 맞는 것 아시잖아요.”
“나랑 페어 맺기 전에 페어였던 가이드가 다시 입사한다는 소식 못 들었어요? 이름이 임한서랬나? 그 사람한테 가든지, 아니면 이번에 대거 입사한다는 가이드 중에 취향 맞는 가이드 골라잡든지. 그건 알아서 해요.”
“…….”
“그럼 이만.”
가이드를 바꾸라는 소리가 굉장히 기분 나빴는지, 이승우는 더 이상 그를 잡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귀를 씽씽 스치고 지나갔다. 너무 열이 받아 귀가 빨갛게 익어서 더 차게 느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백번 이해해서 그 게이트를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최소한 그 자리에서는 고은교의 말에 훼방 놓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나중에 따로 그 게이트에 못 들어갈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면 좀 곤란하기는 했겠으나 자신은 어떻게든 다른 에스퍼를 구해 그 게이트에 들어갔을 테니까.
이건 뭐, 같이 죽자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심보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승우가 자신이 가진 팀장의 권위를 개똥처럼 알고 있다는 거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팀장의 권위를 하찮게 여기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팀장의 판단을 우선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우선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니까. 이승우가 고은교에게 가진 편견을 도저히 지울 수 없다면 지금 갈라서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하지만 정말 이승우에게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면…….
‘짜증 나 죽겠네.’
센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고은교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차를 노려보았다. 이승우와 함께 타고 왔으니 그를 데리고 가야 했다. 하지만 이승우는 바람 에스퍼이기 때문에 사실 차 같은 건 쓸모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저 알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
잔뜩 헝클어진 머릿속을 의식적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하며 그가 차가운 차체에 이마를 댔다. 열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딱 그만큼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왜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지?’
자신은 열이 받치면 받치는 대로 막 나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이성적이었다. 몸이 어려졌다고 덩달아 정신도 어려진 건가. 화가 난다고 마구잡이로 쏘아붙이다가 그 자리를 떠나는 건 햇병아리 시절에나 하던 짓인데…….
홧김에 다른 가이드를 찾아가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금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운전석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앉고 나서도 한참이나 시동을 걸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대로 운전하면 난폭 운전을 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교수님.”
이승우가 다시 돌아왔다. 고개를 들자 단정한 얼굴의 미인이 운전석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약간 불퉁한 목소리였다. 운전석 시트에 파묻혀 있던 고은교가 한 번 눈썹을 찡그렸다가 튕기듯 일어나 앉았다.
“뭐라고요?”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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