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고은교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는 분명 유 대리, 그러니까 게이트의 출납을 담당하는 센터 직원이 퇴근까지 하는 것을 봤다. 게다가 오 팀장은 두 번 기회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즉, 한 번 거절당하면 그 사람 얼굴 위로 패배자라는 낙인을 땅땅 찍어 버리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다시 찾아가서 빌어 봤다는 이야기인가…….’
자신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그런 노력까지 감수했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원래 사회 초년생들은 이렇게 배우는 거다. 이승우가 영리하고 어른스럽다 해도 모든 걸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지금 노력해 보고, 안 된다는 걸 깨닫고…… 그러면 다음에 실수하지 않게 되겠지.
그는 그것을 도와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차에서 내리자 이승우가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붙잡아 그가 손쉽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습관에 가까운 접촉이었으나 그 순간 이승우가 망설였다는 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고은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렇게 말한 것만으로도 이승우는 고은교의 마음이 약해졌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도통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다. 잘 갈무리된 표정에는 감정의 조각 같은 것은 조금도 엿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무표정이 어쩐지 불만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고은교가 입을 열었다.
“오 팀장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지요?”
“…….”
“우리가 받을 뻔했던 그 게이트,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능력자가 얼마나 많을까요. 물론 아주 위험한 게이트지만…… 그 게이트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팀으로 세도 수십, 수백은 넘을 겁니다. 단순한 변덕으로 싫다 좋다를 정할 수 있는 게이트가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네.”
“같은 센터 소속에, 마침 오 팀장을 만나서, 그녀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해서 운 좋게 게이트를 잡았다면 일단 쥐어야 합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들어갈 수 있고 없고를 생각하는 건 기회를 잡고 난 이후의 일입니다.”
“네, 교수님.”
그가 이승우를 살짝 흘겼다. 그가 교수를 관둔 지 벌써 한 달째였다. 급한 상황도 아닌데 굳이 자신을 ‘교수님’이라고 부른다는 건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수업처럼 들린다는 뜻이었다.
“잘 알아들은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아까 다른 가이드를 찾으라고 했던 말은 사과하겠습니다. 내가 성급했어요.”
“네.”
예의상이라도 아니라고 말할 법한데, 이승우는 ‘네’라고 대답했다.
하여간 보통내기가 아니지. 그는 픽 웃으며 내도록 잡고 있던 손을 힘주어 움켰다가 놓았다.
“내일 늦지 않게 와요.”
*
1월 27일, 오후 2시 40분.
곤충형 게이트 종료.
하얀 손이 지네의 시커먼 내장을 헤집는다. 그가 딛고 있는 곳은 지네의 아래쪽 배 부근으로, 길이가 50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지네는 이미 목이 잘려 죽어 있었다.
그들은 정확히 오후 열두 시경에 게이트에 들어갔고, 2시간 40분 만에 게이트를 완전히 끝냈다.
“안 더러워요?”
마침내 손이 뭔가를 발견한 듯 동그란 구슬을 잡았다. 그는 자신의 곁에 선 채 비처럼 떨어지는 녹색 피를 막아 주는 장신의 남자를 힐긋 쳐다보았다.
정작 전투를 한 건 그가 아닌 그의 에스퍼, 이승우였다. 그럼에도 그의 옷에는 먼지 한 톨 없다.
“가서 씻으면 됩니다.”
시니컬한 어투로 중얼거린 그가 지네의 내단(內團; 오래 살아서 영물이 된 동물의 기가 축적되어 있는 결정체)을 끄집어냈다. 즈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내장 조각이 함께 딸려 나온다. 그것을 옷자락으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수백 년은 족히 묵었을 내단이 중후한 빛으로 반짝인다.
게이트에 들어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투성이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제주도 게이트에서도 그랬지만, 일단 게이트에 들어오면 품위 유지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 집중하는 쪽이 효율적이다. 아무리 조심하거나 시시때때로 몸을 닦아 내도 몬스터를 마주할 때마다 꼴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이 C급 게이트의 유일한 시료는 바로 이 지네의 내단이었다. 모든 지네들이 내단을 품고 있지만 이 보스 몬스터의 내단은 다른 내단에 비해 특별했다. 몇 년을 묵은 지네의 내단은 원기 보충을 목적으로 하는 건강식품으로 아주 쓸모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수백 년을 묵어 버린다면?
‘배당금이 몇억은 되겠는데.’
죽기 직전인 사람도 벌떡 일으키는 전설의 명약이 된다. 물론 과한 비유이긴 하지만, 상당한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장이주였을 때도 이런 내단의 도움을 꽤 많이 받았고, 스스로 수급을 하기 위해 꽤 많이 뛰어다녀야 했던 기억이 난다.
보스 몬스터는 일정한 확률로 내단을 뱉어냈다. 그는 내단의 크기를 확인하며 저절로 벙긋 벌어지려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건강한 몸을 가졌으니 이 내단이 약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센터에서 씻고 가시게요? 여벌 옷은 있으세요?”
돈으로 보이지.
그는 이승우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냥 입었던 옷 또 입으면 됩니다. 이제 나가죠.”
이승우의 눈이 지금 고은교가 입고 있는, 지네의 피를 잔뜩 뒤집어써서 지네 내장 냄새를 풀풀 풍기는 옷을 빠르게 훑었다.
“제가 사다 드리면 되죠.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이승우가 질색하는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소리 내서 웃자 이승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승우는 굉장히 빠른 이동 수단이었다.
기껏 지네와 깔끔을 떨어가며 전투를 했지만, 이승우는 별 거리낌 없이 엉망진창인 고은교를 안아 올렸다. 두 사람이 무려 두 개의 도시를 날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이십오 분.
그들은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같은 꼴이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센터 안에는 언제든지 이능력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샤워 시설이 비치되어 있다.
“센터 샤워실은…….”
“인폼에서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면 되겠다고, 자기는 속옷과 간단히 입을 옷을 사러 가겠다며 이승우가 먼저 돌아섰다. 고은교는 빙긋 웃는 낯으로 이승우를 정문에서 보냈다.
‘여기를 수천 번 드나들었는데 모르기는 왜 몰라.’
그의 망설임 없는 걸음이 센터 샤워실을 향했다.
거대한 공동 목욕탕처럼 되어 있는 곳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로 공동 목욕실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은교가 선택한 곳은 가이딩실에 딸린 욕실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가이딩실에 욕실이 딸려 있다.
뭐…… 게이트를 갔다 온 뒤에 가이딩을 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니까. 순수하게 씻고 가라는 의도로 만든 욕실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편법으로 쓰기에는 딱이다.
지네 체액 때문에 옷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어쩔 수 없이 드로즈와 바지를 한꺼번에 벗어야 했다.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샤워기에서 강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세 시간 만에 게이트를 끝내고 뜨거운 샤워를 하니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머리를 박박 문질러 감고, 온몸을 바디 워시로 닦은 다음 다시 몸을 헹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 갈아입을 옷 둘까요?”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을 잠근 고은교가 옆에 놓인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으며 문을 조금 열었다.
“아니, 줘요. 다 씻었습니다.”
문틈 사이로 이승우와 눈이 마주쳤다. 문으로 절묘하게 알몸을 가리며 고은교가 손을 내밀었다.
“어딜 봅니까?”
분명하게 경고하자,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가려던 눈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리고 눈꼬리가 살짝 접혔다.
이 자식이.
“아, 실수.”
“실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옷 주세요.”
물기로 인해 촉촉하게 젖은 둥근 어깨를 보면 그 아래의 광경이 궁금해진다. 이승우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게 분명했다. 고은교에게 옷을 건네주었으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넘겨주지 않아 고은교를 황당하게 만들었으므로.
“이승우 에스퍼.”
“아니, 여쭤볼 게 있어서요.”
“허.”
작작 좀 하지…….
하지만 이승우는 개의치 않았다. 예의 바른 척하며 눈을 반달로 접고 고은교를 자기 쪽으로 슬쩍 끌어당긴다.
“어제 말씀하신 A급 게이트, 소집일이 오늘이던데. 모르셨어요? 지금 팀원들이 다 모여 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눈썹을 찡그리며 옷을 놔 버릴까 고민하던 고은교가 뜻밖의 소리에 어리둥절했다.
“A급 게이트? 아, 드라이밸리? 그게 왜요?”
“저희도 들어가잖아요.”
“뭐라고요?”
고은교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승우의 말이 바로 이해가 안 된다. 뭐라고?
“어제 제가…….”
이승우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린다.
“저를 안 믿으셨군요.”
“무슨 소립니까? 당연히 믿었어요. 당연히 믿었지.”
고은교가 이승우의 손에 들린 옷가지를 후다닥 낚아챘다.
당연히 이승우가 실패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 팀장은 절대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장이주가 그랬듯, 그녀 역시 피부 사이로 바늘 하나 안 들어갈 FM 그 자체 인간이다. 그런데 이승우가 무슨 수를 썼길래 그걸 다시 번복해 줬지?
아니, 아니다. 그런 건 다음에 천천히 물어도 늦지 않다. 이 예쁜 자식. 그는 대충 팬티만 껴입고 문밖으로 나왔다.
“빨리 갑시다.”
가는 길에 바지 사이로 다리를 구겨 넣으며 가이딩실 밖으로 나가려는 고은교를 뒤에서 이승우가 붙든다.
“제발, 옷 좀 입으세요 교수님.”
“옷은 가는 길에 입어도 됩니다.”
“안 돼요.”
안 된다는 말에는 왠지 모르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숨어 있었다. 그를 단단히 붙든 손에 힘이 실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웃고 있지만 어쩐지 위험한 분위기의 이승우가 서 있다.
이승우는 천천히 한 음절, 한 음절 씹어 넘기듯 힘주어 말했다.
“절대 안 되니까 옷 입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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