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는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이승우를 돌아보았다. 꽉 잡힌 팔이 느껴졌다. 자신이 그렇게 막 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건가? 하긴 요즈음 충동인지 혈기인지 모를 감정들이 널뛰고는 했는데, 이것 역시 그런 일환인가 싶었다.
‘아니지. 일이라면 밥을 먹다 말고 뛰어나갔던 적도 있으니까…….’
크게 달라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요.”
이승우의 요청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제대로 채우다 만 바지의 지퍼를 끝까지 채우고, 대충 들고 있던 셔츠를 펼쳐 양팔을 끼워 넣었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승우가 감시했다.
“…….”
그에 더해 간단히 환복할 때 드러나는 살갗을 유달리 훑는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갑시다.”
에스퍼가 가이드를 향해 보이는 집착은 본능적인 것. 집착에는 절박함이, 또는 상대를 함부로 하려는 기질이 있다. 서로 상반된 성질이 어우러져 있는 에스퍼들의 행동에는 익숙해져야만 한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적 병폐다. 상대에게 애착이 생기다 못해 소유욕이 생기면 그렇게 된다. 그는 가이드가 되기로 결심했던 날, 도움이 필요한 에스퍼를 외면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던 초기의 다짐을 상기했다. 이승우에게는 아직 가이딩이 충분치 않았고 이 문제는 시간을 들여 조금씩 낫게 할 수 있었다.
그가 입술 끝을 들어 올려 웃어 보이자 이승우가 엷은 한숨을 흘렸다.
“네.”
그들은 센터 복도를 나란히 걸으며 A급 게이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정확히는 게이트에 완전히 집중해 있는 고은교가 일방적으로 이런저런 말을 하고 이승우가 들었다.
“드라이밸리 게이트는 그렇게 까다롭지만은 않아요. 사실 우리가 갔던 제주도 게이트에 비하면 난이도가 아주 낮은 수준입니다. 드라이밸리에 들어가기 싫다고 한 것을 보면…… 이승우 에스퍼도 비슷한 게이트에 가 봤던 모양입니다. 그렇죠?”
“한 번이요.”
“첫인상이 별로였나 봐요.”
가벼운 웃음기가 섞인 농담조의 말에 이승우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그는 ‘그러면 왜?’라고 물으려던 것을 삼켰다. 벌써 문이 앞에 있었다. 한 발짝 앞서 있던 이승우가 그를 대신해 문을 열었다.
*
소집일은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게이트에 들어갈 인원이 모여 작전을 주도하는 팀장의 브리핑을 듣는 날이었다.
특히 이번 A급 게이트는 팀 두 개가 협업하여 게이트 작전을 진행한다. 당연하지만 게이트 작전을 주도하는 팀장의 브리핑을 모두가 제대로 들어야 했다. 듣기로는 원래 이 역할을 오 팀장이 맡았으나, 그녀가 게이트를 못 들어가게 되자 이제 막 팀장이 된 송사리 같은 녀석이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고 했던가.
사실 센터는 그렇게 수직적인 구조가 아니었다. 이능력자라면, 현장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팀을 이루어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위치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팀장’이라고 불리며 활동하는 이능력자들 대부분이 짧게는 오 년, 길게는 십 년까지 현장에서 굴러먹은 사람들이었다.
그게 아니면 본인이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일신으로도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압도적인 능력을 가졌거나.
뭐, 아무리 강력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도 귀찮으면 고사하는 것이 팀장 자리였다. 그리고 팀장이란 아무래도 게이트를 따내고, 필요한 이능력자에게 콜을 하며 영업을 뛰어야 하는 자리에 가깝다. 실적을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동분서주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열정도 있어야 했고, 평판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자신은 불치병과 싸우느라 어쩔 수 없이 그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지만 부족한 인맥의 끈을 수많은 ‘my’의 에스퍼들이 채워 주었다.
‘새 팀장이 어떤 녀석인지 궁금했는데…….’
원소 계열 에스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대단한 미남이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이승우가 먼저 모습을 보이자마자 상당히 반가운 기색을 했다. 매사 냉한 표정을 유지할 것 같은 녀석이 웃는 얼굴로 ‘안 온다면서 어쩐 일로?’ 같은 소리를 하다가 이승우의 뒤를 따라온 고은교를 보고 그만 낯을 굳혔다.
“…….”
“…….”
뭐 씹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우시현을 보고 고은교도 비슷한 표정을 했다.
‘누군 좋은 줄 아나.’
솔직히, 자신 역시 당장이라도 이번 게이트는 안 하겠다고 말한 뒤 이곳을 나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전 이승우에게 게이트를 가져가는 일은 아주 중요하니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놓은 참이다.
‘어쩐지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게이트에 못 들어가게 하려더라니…….’
되도록이면 우시현과 마주치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나? 차라리 이 게이트, 우시현과 함께 클리어해야 하는 게이트라고 속 시원하게 말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은교가 우시현과 대면하자마자 확 나빠진 안색을 이승우가 슬쩍 확인해 보는 게 느껴졌다. 더해 묘하게 안심하는 기색까지도.
웃기지도 않는다.
그래, 고은교가 우시현을 짝사랑했던 전적이 너무 화려하긴 했지. 행여라도 우시현의 ‘우’조차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을 마음 역시 이해한다. 그럼에도 급격하게 하강하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걱정도 됐다.
우시현의 주도하에 무사히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을까?
‘드라이밸리 계곡에서 나를 밀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그걸 아는데도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망할…….’
드라이밸리. A급 게이트.
이 소집 장소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A급 게이트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정말로 드물게 온다. 천운같이 주어진 S급 게이트가 아니었다면 오동백 팀장이 이 A급 게이트를 나눠 주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제주도 게이트에 이어 드라이밸리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순간, 그는 상급 가이드로서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사실 고은교는 B급 가이드였으니 상급 가이드로서 인정받는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이드 ‘팀장’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능력자들은 모두 동등하다. 동등하다는 명제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강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지도자를 따르려는 기질이 있다. 에스퍼 팀장과 가이드 팀장이 있을 때, 저울은 현저히 전자에 기운다. 강력하고 아름다운 에스퍼 팀장이 주도하는 팀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많은 게이트가 쏟아졌다.
그 본인이 받는 콜 자체가 많으니 실적 내는 게 쉬운 건 당연한 일.
그에 비해 가이드 ‘팀장’으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고등급의 게이트를 확실히 클리어하는 이력을 차근히 쌓아 두어야 했다. 실적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하급 게이트만 클리어하면 가이드 팀장이 몸을 사린다는 이야기를 면하지 못한다.
“……어쨌든 다음 주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결과서를 가져와. 거기에서 멍청하게 발 삐끗한 것으로 떨어져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어렵게 그들로부터 시선을 떼어 내고, 우시현이 한층 더 냉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의 시뮬레이션은 좀 안 하면 안 돼?”
“너한테 하는 말이다, 김창석. 저번처럼 또 진흙탕에 미끄러지고 싶냐?”
“그때가 언젯적 일인데…….”
지명 당한 팀원이 투덜거렸다. 불평을 늘어놓았다기보다는 너스레를 떠는 느낌이었다.
우시현의 팀원은 애초에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위계질서는 땅에 던져 버리고, 편하게 의견을 낼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들 모두 같이 어울려 놀던 동기들인 것 같았다. 고은교는 빠르게 우시현의 팀원들을 스캔했다.
‘나랑은 안 맞네.’
이런 팀들이 많다는 것쯤은 안다. 편한 분위기의 팀이 많다는 것 역시. 하지만 지나치게 사적이고 친밀한 분위기에 섞이는 건 꽤 까다롭다. 게다가 그들의 주축이 되어 있는 리더는 그를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팀원들은 리더의 뒤틀린 심사를 예민하게 파악하고, 외부인을 배척하려 들 것이다.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우시현의 브리핑을 들었다.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먼저 진행할 것. 결과를 자신에게 보고할 것.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성큼성큼 걸어오는 우시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정신이냐?”
예상대로 우시현은 이승우에게 말을 붙이러 오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에게 용무가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의 눈이 있어서인지 바로 주먹이 날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말투는 거칠었지만, 일부러 소리를 죽인 티가 났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놓고 무력을 행사하려 해 봤자 그의 옆에는 이승우가 있다. 이승우는 고은교를 싫어했을 때조차 우시현이 폭력을 휘두를까 봐 그를 막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그때, 분명히 경고했지.”
우시현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솔직히 말해 우시현이 한 경고가 너무 많아 그게 어떤 것인지 단박에 떠오르지 않는다.
“뭐를 말입니까?”
고은교의 목소리는 방을 낭랑하게 울렸다. 덕분에 뒤에 남겨진 팀원들이 저들끼리 수다를 떨다 이쪽을 흘긋 응시하는 게 느껴진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우시현이 코앞까지 와 입술을 달싹이듯 말한 걸 무소용하게 만들었다.
조금 아차 싶었으나 뭐, 이대로 배짱 있게 굴기로 했다.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며 우시현이 원하는 대로 돌아서서 나가 줄 생각이었다면 아까 우시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즉시 나갔을 터였다.
우시현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죽고 싶으면 게이트에 따라오는 거라고, 이 새끼야…….”
회색과 갈색이 오묘하게 섞인 아름다운 눈이 고은교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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