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68화 (68/132)

#68

2월 8일, 오후 12시 00분.

드라이밸리 게이트 안.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회색빛 우중충한 하늘이 그들을 맞이했다.

“더럽게 춥네…….”

드라이밸리 게이트는 극지 게이트답게 화염 계열 에스퍼와 상성이 가장 잘 맞았다. 듣기로는 매칭률 높은 가이드가 둘만 붙어도 얼음 계곡을 콸콸 녹이며 드라이밸리 게이트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들었다. 참고로 화염 계열 에스퍼는 한국에 딱 하나 있는데, 그 에스퍼는 오 팀장의 산하에 있으므로 못 오게 됐다.

물이나 바람은 강력하다는 이점 말고는 전혀 팀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론 마음먹으면 대기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에스퍼들이 있을 테지만, 20명이 넘는 인원들이 움직이는데 굳이 이런 데다 힘을 뺄 필요는 없다. 효율적으로 힘을 비축하며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놀러 온 건 아니니까.’

입김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낮은 기온이었다. 캠핑이라도 온 것처럼 따뜻하고 편안하게 있다가 갈 건 아니니 팀원들 사이에서도 춥다는 말이 한두 마디씩  나올 뿐 불평이 되지는 않았다. 코 안 점막이 얼어붙을 것 같은 강추위였으나 바람이 불지 않아 이만하면 참을 만했다.

“갔다 와.”

이승우는 바람 에스퍼였고, 운신이 자유로웠으므로 터닝 포인트까지 특별한 위험은 없는지 확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시현은 무뚝뚝하게 이승우에게 지시를 내렸고, 그 모습은 평소에도 자주 손발을 맞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승우는 곧장 자리를 떠나는 대신 고은교에게 물었다.

“같이 갈래요?”

“아, 씨발 좀 진짜.”

우시현이 나직하게 뇌까리는 욕설이 들렸지만, 이승우는 꿋꿋이 그를 보고 있었다. 고은교를 여기에 두고 가는 건 불안한 일이라는 듯.

이승우의 불안이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은교 스스로도 이승우가 이 팀을 떠나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팀장인 우시현도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고, 짜증을 좀 냈을 뿐 이승우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않았으니 함께 정찰을 갔다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고은교가 그러자고 대답하려는 순간, 함께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했던 가이드가 끼어들었다.

“어? 안 돼요. 가뜩이나 가이드 부족한데.”

“…….”

그 말도 맞았다. 20 명 남짓한 인원 중 가이드의 수는 고은교를 포함하여 넷. 에스퍼에 비해 현장 가이드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스무 명 중에 최소한 일곱 명은 챙겨 왔어야 했다.

그 사실은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 주어야 하는 가이드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우린 이제부터 몬스터 잡을 건데. 문제라도 생기면…….”

불만을 줄줄 늘어놓던 가이드가 찔끔하면서 물러났다. 이승우가 그 가이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에스퍼들이 많은데 아무도 가이드인 고은교를 지켜 주지 않으리란 생각은 비약이다. 게다가 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목적은 고은교 스스로가 제 몫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데 있었다. 이승우와 떨어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면 지나치게 에스퍼에게 의존하는 가이드라는 인상을 심어 줄 터였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이승우의 팔을 툭 쳤다.

“그래요. 나중에 봅시다.”

돌아온 이승우의 시선은 약간 부드러워져 있었다. 걱정이 약간 섞인 시선이었다. 정말 고은교를 두고 가도 될지 가늠하는 것 같은.

“……네.”

할 수 없다는 듯 대답한 이승우가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는 그대로 허공에 떠서 고은교를 힐끗 보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차라리 빨리 일을 마치고 오겠다는 생각 같았다.

“저 형님 너무 과보호하신다. 그쵸?”

가이드의 해맑은 말에 고은교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시현은 이미 선두에서 게이트 안쪽으로 진입 중이었다. 다른 팀원들 역시 우시현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우시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김민성. 뒤쳐지지 마라.”

그러자 고은교의 옆에서 친근하게 말을 붙이던 녀석이 찔끔한 낯으로 꾸벅 인사하고 걸음을 빨리한다.

제 팀원이 고은교에게 말 붙이는 게 싫다는 건가? 딱히 아쉽지도 않았다. 그는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우시현이 어디까지 유치해질지 궁금하다.

드라이밸리 게이트에서 나오는 짐승형 몬스터들이 내는 하울링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난폭한 기세의 늑대 무리들을 마주했다.

가장 선두에 선 우두머리 늑대는 머리가 세 개였다. 제각기 사방을 보는 거대한 머리들에서 누런 침이 뚝뚝 떨어졌다. 전조 없이 몬스터들이 그들을 습격했다. 가장 후미에 있었던 고은교는 그들이 벌이는 전투를 관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단하네.”

순수한 감탄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대놓고 고은교를 궁금해하는 우시현의 팀원 몇 명과 모의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도 의외로 실력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나로 합쳐 놓으니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몬스터를 도륙하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우시현이었다. 몬스터를 죽이던 그는 늑대 몬스터들이 드라이밸리 계곡의 돌 너머로 몸을 숨기며 팀의 가이드를 공격하려 하자 게이트의 지형지물을 전부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물이 이렇게 대단한 파괴력을 가진 줄은 또 처음 알았다. 고은교는 이 몸에서 깨어났을 때, 우시현이 자신의 에스퍼인지 확인하려고 ‘my’ 목록을 확인했던 일을 떠올렸다. 조그만 사진 아래에는 우시현이 물 에스퍼라는 간단한 정보가 쓰여 있었다. 활자로만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실제로 보니 우시현이 왜 거만한 남자로 성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럴 만한 능력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파도가 나와 계곡의 돌과 몬스터들을 쓰나미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단 한 번의 해일만으로도 전투의 수세가 완전히 이쪽으로 기울어졌다. 우시현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능력을 운용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괴물 늑대들을 전부 죽인 뒤 얼어붙은 돌의 계곡을 넘어가자, 넓게 펼쳐진 거대한 호수가 나왔다. 극지형 게이트 속의 호수답게 표면이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팀원들에게 멈추라는 수신호를 보낸 뒤 홀로 빙판 위를 걸었다.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계곡 몬스터들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우시현을 공격하는 순간, 그들은 뿌리처럼 솟아오른 호수의 얼음에 작살처럼 관통당해 일시에 죽었다.

그 순간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호수 얼음 아래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우시현의 시선이 호수 아래에 닿는 듯하더니 호수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너희는 호수를 돌아서 터닝 포인트로 간다.”

우시현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의 발밑으로 얼음이 사방에서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호수의 힘을 빌린 탓인지 꽁꽁 언 호수가 깨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가 자신의 맨살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는 물 위를 딛고 서 있었다. 고은교는 이번에도 가장 뒤에서 팀원들의 뒤를 따라갔다. 거대한 호수를 둥글게 돌아가며 호수 아래를 힐끗 보자, 얼음으로 만든 수백 개의 창에 꽂혀 죽어가고 있는 물뱀 형태의 몬스터들이 보인다.

‘바깥에서 몬스터들이 자신을 공격하게 유인한 다음, 호수 아래에 있는 몬스터들과 한꺼번에 제거한 건가…….’

초짜답지 않은 영리함이었다.

호수를 지나고 난 다음부터는 조금 더 난이도가 올라갔다. 아까는 그저 이곳이 게이트의 초입이었다는 듯 그러지 않아도 넓었던 길이 지평선이 보일 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어졌다.

거대한 드라이밸리 계곡이 그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한차례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는지 계곡을 가득 채운 것으로 보이는 곳에는 나무 밑동들이 즐비했다. 마치 숲을 거인의 칼날이 그대로 숲의 나무를 잘라낸 것 같았다. 정찰을 보던 이승우가 이 숲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능력을 사용해 숲을 제거한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잠깐 가이딩을 받고 가는 건 어떨까요?”

숨 가쁘게 에스퍼들을 따라가던 네 명의 가이드 중 하나가 제안했다. 우시현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팀원들이 가이딩을 받게 했고, 고은교를 제외한 세 명의 가이드는 바쁘게 팀원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능력을 과도하게 쓴 우시현에게도 가이드 하나가 붙었다. 일부러인지 우시현은 고은교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가이드시죠?”

“아, 예.”

가이드의 수가 워낙 적은데 그중 하나는 우시현을 가이딩하느라 쩔쩔매는 중이니 나머지 스무 명에 가까운 에스퍼들은 가이드 두 명에게 매달려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당연히 줄의 마지막에 있는 에스퍼 중 하나가 근처에 서 있는 고은교에게 관심을 보였다.

“혹시, 나중에 돌아오는 에스퍼님만 가이딩해 주시나요?”

예의상 미소를 지은 채 에스퍼가 물었다.

글쎄…… 딱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게이트 밖에서야 ‘my’ 목록에 있는 에스퍼 위주로 가이딩을 해 주지만, 이곳은 게이트 안이었고 고은교는 그들의 팀원 중 하나였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주고 싶었다.

“아닙니다. 손 주시죠.”

고은교가 흔쾌히 손을 내밀자, 에스퍼가 반색을 하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때 고은교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언제부터였는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우시현이 보인다.

그때, 강의실에서 남선재가 고은교에게 말을 붙였을 때도 우시현은 고은교를 노려보듯 쳐다보았지.

‘……어쩌라는 건지.’

제 팀원들에게 가이딩을 해 주는 것마저 아니꼽다 이건가? 하지만 굳이 우시현이 무서워서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에게 안 되겠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가이딩 했다. 이 남자와 매칭률이 그럭저럭 맞는지 리듬 게임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가이딩을 받은 에스퍼의 안색이 크게 호전되었다.

“감사합니다. 가이딩 좋네요.”

예의상 지었던 미소가 이제는 상당히 진심으로 보인다. 고은교 역시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아닙니다. 당연한 거죠.”

“저, 혹시 가이딩 끝났으면 저도…….”

가까운 곳에서 다른 에스퍼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고은교의 가이딩이 언제 끝나는지 옆에서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제 팀의 가이드에게 받을 가이딩 차례를 기다리려면 한참이라, 냉큼 이쪽으로 갈아타고 싶어 하는 듯했다.

고은교는 사양하지 않았다.

가이딩이 끝날 때쯤, 그의 옆으로 온 또 다른 에스퍼가 손을 내밀었다.

“아, 나도 좀 해 주쇼.”

“끝날 때까지 기다리……. 아.”

이번에는 익숙한 낯이었다.

“시뮬레이션 돌릴 때는 그쪽 에스퍼가 너무 무서워서 어디 가이딩해 달라는 말을 할 수나 있었어야지.”

지난주,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돌릴 때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지켜보다가 같이 하자고 다가온 에스퍼 중 하나였다.

“아까 가이딩 받는 것 봤습니다만.”

“참말로. 그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니까야.”

너스레를 떠는 투박한 사투리에 왠지 웃음이 났다. 고은교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 손을 붙잡았다.

쳐다보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가이딩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거나 빈정거리는 게 아니었으니, 그쯤 해서 우시현의 시선 따위는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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